출4:10-12 모세는 입이 뻣뻣하지 않았다.

조회 수 1217 추천 수 36 2009.09.09 2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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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입이 뻣뻣하지 않았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0-12)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소명을 받은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바로를 대면해 설득시키고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려면 남을 감동시킬만한 유창한 언변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과연 그러한지 한번쯤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대의 왕자는 모든 학문을 다 배우되 특별히 논리학, 법률학, 웅변술을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처럼 삼권분립이 확실하게 되어 있어 조직과 체계로 나라 일이 운영되지 않고 모든 것을 왕이 혼자서 그것도 말로서 다 처리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을 재판, 격려, 고무하고 신하들과 논쟁할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 스데반이 이스라엘 역사를 회상하는 설교 가운데 나오는 말입니다. 분명히 말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하나님의 도움 대신에 애굽에서 배운 학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아론을 모세의 대변인으로 붙여 주셨지만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아론이 말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모세는 웅변가였음이 틀림없는데 스스로는 눌변(訥辯)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 능통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문가일수록 더 높은 차원이 있어 배울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비전문가들은 무엇을 더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진심으로 그 소명을 맡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겸손하게 사양했다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형성되는 가장 큰 근거는 성격과 경험입니다. 성격 때문에 입이 둔해지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매사에 낙천적이되 서두르지 않는 성격은 대개 말을 정확하게 잘 하되 천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반대로 다혈질이고 아주 급한 성격이라면 더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할 때는 더 그렇게 됩니다.

성경이 그가 말에 능했고(행7:22) 온유한 자(민12:3)라고 표현해서 느릿느릿하게 말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굽 관원을 죽이고, 반석을 치고, 금송아지를 갈아 마시게 했고, 하나님이 주신 돌 판을 던져 부순 것으로 봐선 오히려 성격이 불같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자신의 기질을 잘 아는지라 바로 앞에 가서 출애굽이라는 너무나 중요한 일을 두고 말할 때에 더듬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도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소명을 생각하니 더 말이 떨릴 것 같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나아가 모세에게는 말로서 실패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출2:13,14)

모세가 히브리 사람의 싸움을 말리려 시도했습니다. 그른 자를 말로서 야단쳤습니다. 누가 그른지 판단할 때에 법률적 논리를, 야단칠 때에 웅변술을 동원했다는 뜻입니다. 야단을 맞은 사람이 “네가 주재와 법관이라도 되느냐?”라고 따지고 든 것을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또 “비록 내가 조금 잘못했지만 살인이 훨씬 더 큰 죄 아닌가? 살인자 주제에 감히 나를 야단칠 수 있느냐?”라고 따졌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논리에도 그 사람에게 졌습니다.

전문가에게는 자기 전문 분야에서 실패한 경험은 아주 큰 상처가 됩니다. 두고두고 뼈아픈 추억으로 남습니다. 모세도 나름대로 말에 자신 있다고 나섰다가 완전히 본전도 못 건지고 창피만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살인자로 웅변에 실패한 자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두고 그의 자화상(Self-Image)에 따라 다녔습니다. 그로선 혀가 둔하다고 스스로 확신(?)하기에  하나님 앞에서조차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진술한 것입니다. 한 번 실패했으면 되었지 또 다시 실패하기는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실패는 사실 말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출애굽의 소명을 주기 전에 그는 이미 그런 목표를 스스로 세웠습니다. 민족 전체를 탈출시켜야겠다고 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바로의 왕자라는 신분과 권력을 이용해 동족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이 자기 형제를 치자 소명감에 불타 좌우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쳐 죽였습니다. 형제들의 분쟁도 해결해주려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방족속 가운데 40년간의 양치기로 허송  세월을 해야 하는 대실패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금 하나님에게 말로는 혀가 둔하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속마음으로는 출애굽을 시키려면 내가 한참 사명감에 불타 있었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 도와주었으면 쉽게 되었을 텐데 왜 다 늙어 힘도 의욕도 없는 지금에 와서야 날더러 그 일을 하라고 하느냐라는 불만을 터뜨린 것입니다.

모세가 이런 속마음을 감추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핑계를 댈 정도면 웅변술이 대단한 것 아닙니까? 정말 혀가 둔했다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눌~님! 저...저는...말을...제대로...” 물론 성경이 비디오로  촬영한 것처럼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구체적인 표현을 쓴 것만은 분명한 만큼 그는 사실 말에 능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마저 당당하게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모세를 탓하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그러합니다.  그는 비록 아주 선한 일을 목표로 정해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판단과 고집을 꺾은 적이 없었습니다. 학식과 무술 실력 등 자신이 가진 것만을 동원해 동족을 도우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시적으로 시키는 일조차 자신의 실패했던 경험을 들어 고집스럽게 거절했습니다. 자기라는 틀을 철옹성같이 붙들고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지난 80년간의 쓰라린 세월을 겪고도, 심지어 스스로 그것이 실패였다고 자인하면서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제목들을 정말 솔직하게 다 점검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까? 일단 선한 목표들입니다. 나쁜 것을 두고는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뤄나가는 과정들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 아니 하나님 앞에서조차 고집부립니까? 자기 판단과 지식과 경험에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이전에 실패했던 방향으로는 죽어도 가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주신 계명도 정당해 보이는 핑계를 대면서 뻔뻔하게 거절합니다. 그 선하게 포장된 기도 제목들에 감춰진 진짜 속마음을 완전히 까뒤집는다면 도저히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자신을 바라보아도 너무나 염치없다고 여겨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가장 웃기고 말도 안 되는 사실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이전에 하나님이 없어서 실패했던 경험마저 그 핑계에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실패해 쓰라렸다면 이제 함께 해서 보란 듯이 성공시켜 주겠다는데도 싫다고 합니다. 80년을 연단해도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의 가장 큰 위인으로 보는 모세마저 그러하니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신앙이란 자기 안에 거룩하고 의로운 실력을 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따라 다니는 ‘자아’라는 철천지원수 괴물을 쳐부수는 것입니다. 그 자아에는 세상의 모든 더럽고 헛된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원죄로부터 시작해, 가문, 학벌, 외모, 지성, 체격, 교양, 인격, 경험, 편견, 선입관, 여건, 성장배경, 심지어 도덕성, 종교성까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복적, 율법적, 성격개조론적, 성공처세학적, 심리치유학적, 신비주의적 등등의 잘못된 신앙관들이 여리고성처럼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아를 부셔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다 철갑을 더 입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기도나 말씀이라는 거룩한 도구를 사용해가면서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모세의 그런 뻔뻔한 거짓말에도 하나님이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한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속셈을 몰랐겠습니까? 그래서 모세에게 정말 다시 웅변술을 가르치려 한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다 알면서도 그 거짓말에 속아주신 것입니다. 또 할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때그때 입에서 나오는 말마저 당신께서 전적으로 주관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속내대로 하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문둥병이라도 일으켜야 하는데 참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체질이 진토이며 연약하고 치사한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더럽고 치사한 모습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신앙에서 확실하게 붙들 것은 오직 둘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생을 두고 자아를 다 깨트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언제 어디서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7/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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