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1-3 처자가 가장 걱정인가?

조회 수 665 추천 수 44 2009.09.10 19:10:41
처자가 가장 걱정인가?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1-3)


가데스 바네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의 비관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믿음  조차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린 사람은 주위 환경을 자신의 지식과 체험으로만 분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전력으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상대도 안 될 것은 너무나  빤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원망이 참으로 이상야릇합니다. 겉으로는 모세와 아론을 향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여호와께 향한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이 불평 안에는 어떤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여호와가 지금 그 자리에까지 인도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를 잠시 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원망을 하는 가운데도 여호와를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원망이나 불평은 반드시 그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없으면 잠꼬대나 독백입니다. 그들도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그 자리에까지 왔으니 모세와 아론에게는 이 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신에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며 원망을 했다는 자체가 벌써 그 일의 배경에 여호와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여호와가 그곳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도 여호와께 원망한 것입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이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오늘날 우리도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나 처하게 만드신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이런 꼴로 나를 버려두느냐고 바로 원망부터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이스라엘은 아주 완악하고 배역한 종자요 우리는 잘 믿고 있는 양 착각하니 우리가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그렇게 원망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둘 있습니다. 무조건 믿음이 없었다거나, 하나님 대신에 환경만 바라보았다는 것 둘 다 너무나 교리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실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유가 그들의 불평 가운데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를 칼에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과 “처자가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는 두 가지입니다. 자기가 죽거나 처자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자기와 식구들보다 훨씬 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오직 자기와 가족들이 형통해지는 것뿐이며 또 자기와 가족이 형통해지기 위해선 목숨까지 바치지만 하나님을 위해선 목숨을 바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가족의 평안이 하나님을 찾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찾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명시적으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다시 노예가 되더라도 하나님보다는 자신과 가족을 먼저 챙기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 때문에 하나님마저 버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광야에서 유리하게 만든 것만도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이미 택한 백성이며 그들과 언약을 맺은지라 그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그들의 후손이라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6-38)고 했습니다. 자기 집안 식구들과 원수처럼 지내고 그들을 나 몰라라 팽개친 후에 교회에만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광신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분명히 식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잘못만 지적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과 가족의 안녕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자기 삶의 근본 목적을 오직 자기와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둘 것인가 아니면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에 둘 것인가 그 순서를 명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또 실패해왔듯이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단의 방해와 우리의 욕심이 합쳐졌기 때문입니까? 사람과 환경이 자꾸 그렇게 하도록 부추깁니까? 아직도 우리는 죄가 많고 연약한 존재라 그렇습니까? 이 또한 너무 교리적인 설명이자 핑계 아닙니까?

예수님이 “가족을 원수로 취급하라”고 신자가 지켜야 할 계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추측 내지 분석하는 어법(語法)을 사용했습니다.  가족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되면 그 사람에게 원수가 되고, 그 반대면 동지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아가 가족 전부도 하나님을 자기 삶에 최우선으로 두지 않으면 그 가족이 서로 원수가 되고 참된 가족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순서를 강조했습니다. 순서란 반드시 개인의 체험적인 선호도, 기호, 취향에 따라 결정됩니다. 쉽게 말해 본인이 하나님이 확실히 더 좋다고 여겨져야 더 사랑하게 되지 그렇게 하라고 해서 더 사랑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가족끼리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진정한 가족이 아님을 처절하게 여겨져야 하나님을 먼저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하나님이 없이는 도저히 자기 인생이 진정한 인생이 아니라 살아도 죽은 것과 같음을  절감해야 됩니다. 실감나게 말하자면 예수 없고 살아 있는 것이 예수 있고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 예수 없이 가족과 잘 사는 것보다 예수 있고 가족과 원수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선 가족부터 예수 있게 해야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식구들이 교회 간다고 방해를 하니까 원수가 되고 신자에게 십자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가장 먼저 자기를 죽여야 하고 또 가족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알게 해야 원수가 아닌 참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가 져야할 십자가의 의미도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와 가족을 더 사랑하려는 원초적 본성을 죽이는 일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원죄로 인한 부패된 본성이 계속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매순간마다 처절할 정도로 실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가장 큰 원수요 이겨내야 할 대적임을 실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의 간섭과 주님의 보혈로 그 본성을 죽여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는 날이 갈수록 바울처럼 저야 말로 죄인 중의 괴수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눈물로 고백해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내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라는 절규가 매일 아침마다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라도 세상의 장대한 아낙 자손과 견고한 성읍을 보면 차라리 예수 안 믿고 옛날 생활로 되돌아갔으면 갔지 내 생명과 가족의 안녕을 희생하지는 않겠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예수 믿은 체면에 감히 공개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그렇게 행동해 놓고는 “십자가만 바라보고 이 모습 이 대로 나왔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난주도 주님보다 세상을 따라 갔습니다.”라는 판에 박힌 회개의 기도만 늘어놓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처음 한 두 번은 몰라도 계속해선 들으시지도 않을 테니까 회개의 기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넋두리 독백이 되지 않을까 두렵지 않습니까?

7/21/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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