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도사 하나님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17:24-27)
가족끼리 숨바꼭질을 하다보면 가장 어린 아이가 술래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술래로선 식구들이 다 숨어버린 텅 빈 집안이 갑자기 무서워져 반쯤 울면서 돌아다닙니다. 보다 못한 아빠가 술래가 가까이 오는 기척이 여겨지면 일부러 헛기침을 해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나 아빠 찾았다”라고 소리칩니다. 울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워 아빠가 일부러 찾을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모르고 마치 자기 힘으로 찾은 양 자랑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곳곳에 숨겨 놓았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게”(롬1:19)해 놓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아무리 사람끼리 배상하고 용서해도 근본적인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즉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는 인간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인간 속에 있는 양심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만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없이 다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의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롬1:20) 해 놓았습니다. 자연 세계의 엄청난 위용과 너무나 신비한 조화 등을 보면 도저히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듯이 어쩌면 양심에 비해 더 분명히 보입니다. 아무리 불신자라도 나이아가라 폭포와 그랜드 케년을 보고는 “뭔가 모르지만 조물주가 있는 것 같기는 해!”라고 한 마디씩은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없다고는 “핑계치 못한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본문에서도 스토아 철학과 쾌락주의에 빠져 논쟁만 일삼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같은 맥락에서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구태여 눈을 부릅뜨고 샅샅이 훑지 않고서 단지 더듬기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뜬 눈으로 분명히 보고도 부인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다 이제는, 사실은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랬습니다만, 아예 부릅떠든 더듬든 찾으려는 사람마저 없어졌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대신에 썩어 없어질 것들을 그 자리에 대체해버렸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에다 최근에는 직장, 자식, 웰빙 같은 것들이 하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더듬어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방편 중에 하나가 같은 동족끼리 모여 살게 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숨바꼭질 할 때에는 아이가 어둠 가운데 텅 빈 집안에 혼자 남게 되어 두려워서라도 울면서 아빠를 찾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불신자들은 어둠 속에서 같이 놀 수 있는 자들이 더 많기 때문에 구태여 숨은 자를 찾으려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당신을 찾도록 만든 방법이 잘못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 잘못될 리는 전혀 없습니다. 동일한 체험을 한 사람들끼리, 즉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자연의 신비를 본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더러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또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더듬어서도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을 함께 찾으면 얼마나 더 쉽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오히려 정 반대로 가버렸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어둠 속에서 같이 놀 수 있는 동료가 많아서입니다. 나아가 괜히 숨어서 꼼짝 못하고 있느니 술래가 되어 어둠 속에서 뛰어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고 스릴 넘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파티 중에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바로 가면무도회이지 않습니까? 또 최근에는 인터넷 상에서 익명으로 악플을 다는 일에, 그것도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하면서 얼마나 쾌감을 느낍니까? 어둠의 제왕이자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그 영이 미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아시고 사단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저히 당신을 더듬어서도 찾지 않으려고 할 때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빛을 어둠에 보내셨습니다. 인간들더러 그 동안 놀았던 곳은 어둠이며 모든 놀이는 추하고 더러웠다고 분명히 보여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눈을 가려 빛을 외면하고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어둠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또 빛 안에서 살려면 어둠에서 놀던 놀이를 더 이상 놀아선 안 된다는 것을 눈치 채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둠 속에 있어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상태는 남아 있어서 더듬으면 찾을 수 있음에도 더듬는 것마저 귀찮고 싫은 것입니다. 아니 어둠이 다른 모든 것에 비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들은 알고도 완악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자기에게 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니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도 마치 자기가 자기 힘으로 찾은 양 큰 소리로 자랑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아이처럼 어둠이 두려워 울면서 찾으려 다닌 것은,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간섭한 은혜이지만, 인정합니다. 다 큰 어른이라면 그럴수록 더더욱 먼저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해야지 자기를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꾸 자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음 번 숨바꼭질에선 괘씸해서라도 헛기침도 안 해 주시고 진짜 꼭꼭 숨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다시 술래가 너무나 두려워 울면 어지간히 참으시다가도 못 이긴 척 구원의 신호를 또 보내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이번에는 하나님을 숨바꼭질의 도사라고 착각해 버립니다. 너무 잘 숨어서 도무지 찾을 수 없다고 계속 투정 부리고 불평합니다. 신자로 자기 자랑을 하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이 일부러 당분간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숨바꼭질의 도사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착각하듯 숨는 데 천재가 아니라 아빠처럼 먼저 신호를 보내주는 데 천재입니다. 술래가 도무지 찾지 못하도록 숨어버리면 그 놀이는 재미없을 뿐 아니라 아예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진짜 숨바꼭질 도사는 적당히 들켜도 주어 술래를 바꿔 가면서 하는 자입니다. 누가 잘 찾느냐, 잘 숨느냐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당신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특별히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더 쉽게 찾도록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절대로 주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합니다. 아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 바로 곁에, 아니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당신은 숨고 신자는 찾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결코 삼지 않습니다. 우리와 계속 재미있게 교제하자고만 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항상 어둠 속에서 두려워 서 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비록 불신자들이 어둠 속에서 자기들끼리 뭉쳐서 신나게 놀고 있을지라도 사실은 의식하든 못하든 그 영혼의 깊은 내면은 형편없이 썩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썩는 것을 잊으려고 더 신나고 화끈한 놀이만 찾고 또 찾는 것입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는 끝까지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그들이 불쌍한 존재입니까? 나아가 그들을 뒤에서 그렇게 조종하는 사단은 얼마나 더 끔찍하고 더러운 존재입니까?
신자도 의식하든 못하든 세상과 사람과 죄악 쪽으로 향할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 어둠 속에서 신나게 놀았던 재미를 자기도 모르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넘어가고 있는 중임을 아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어둠의 냄새인 줄 눈치 채거든 빨리 더듬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앞에 이미 뻗쳐 나와 있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에 정작 평생토록 주의 할 것은 자기가 찾은 양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러면 주님이 일부러 오랫동안 침묵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더듬기만 해도 사랑과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실 분 앞에서 감히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괘씸한 것은 둘째 치고 너무나 어리석은 짓 아닙니까?
4/1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