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하나님은 왜 잔인한가요?
[질문]
목사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약간은 난감하기도 하고 가끔 비신자들에게도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을 여기를 빌어 질문 하고자 합니다.
구약에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 즉,
1.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인간제물, 그리고 한 사람의 아들을 제물로 요구하는 하나님
2. 욥의 고난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보이기 위해,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욥의 자식들이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액세서리처럼 죽어나가는 것
3. 이스라엘의 전투에서 이방 민족이라면, 신앙에 대해 알 수도 없었던 아기까지 가차없이 살해하도록 명하는 하나님. 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신약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사랑해 주셨던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그 성품과는 동일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이것저것 합쳐서 만들어진 우화이다라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답변]
구체적으로 답변 드리기 전에 먼저 확실히 해 놓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이론적인 답변이 아니라 정서적, 감정적인 설명을 요구하셨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감정이란 일차적으로 본인이 직접 체험했을 때에 본성적으로 느껴지는 정서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 사건은 이미 수 천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떤 그럴싸한 설명으로도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대했던 정서적 반응을 현대의 독자에게 똑 같이 불러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영화나 소설처럼 간접 체험을 통해서도 상당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극중의 상황과 인물에 자신을 대입하였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건의 발생 경위, 과정, 결과를 정확히 알아야만 정서적으로도 어떤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감정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선 더욱 사실적인 배경 설명-혹시 이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이 필요합니다.
구약의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예로 세 경우를 드셨는데 먼저 각각의 전후 상황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질문자님의 뜻이 너무 교리적인 언급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가능한 쉽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삭의 경우-인간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하나님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구속사적인 관점-죄인인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역사적 실현-에서 전체 문맥을 관통하는 뜻을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어떤 기록이든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라고해서 신비하고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그분 고유의 계획과 뜻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은 어떤 사건도 우발적, 순간적, 일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어떤 분명한 목적을 수립해 그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과 순서를 거쳐서 소기한 열매를 반드시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한 사건도 그 자체만 따로 떼어내 생각해선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잘 믿었고 당사자 이삭은 더구나 아무 잘못이 없는데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이유로만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너무나 잔인한 하나님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요구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추적해야만 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요구한 하나님의 목적
아브라함의 일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를 온 인류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그가 살 당시까지 하나님을 찾거나 두려워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우상, 자연신, 막연한 신적 존재를 섬기는 이방 종교는 많았지만 천지를 창조하고 세상 만사를 주관하며 살아 역사하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진 자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선택하여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당신의 제사장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로 세웠습니다.
그 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오직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자 인도였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말년, 햇수가 아닌 믿음의 여정으로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서 하나님이 그 믿음을 시험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죄악에 빠지게 유혹하는 시험(Temptation)이나, 환난을 통해 믿음을 키우는 연단으로서 시험(Trial)이 아니라, 믿음이 확실한가 아닌가를 알아보는 시험(Test)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서야 하므로 그가 정말 어떤 상황 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가, 그래서 세상의 어떤 귀중한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런 테스트 방법으로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백 살에 난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것 이상 유용한 것이 없습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할 때에 하나님이 “네 사랑하는 독자”(창22:2)라고 강조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삭은 그에게 현실적으로 아기를 가질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약속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은혜로 받은 것을 다시 돌려 달라고 할 때에 언제든지 기쁨으로 선뜻 내놓을 수 있는가도 보고싶었던 것입니다.
테스트의 의미
그런데 테스트 해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테스트의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으로 끝이지 일부러 어려운 테스트를 통해 곤경에 빠트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들의 체력 단련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한겨울에 얼음 물에 들어가 일 분을 견뎌보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끝까지 들어가지 않거나 채 일분을 견디지 못해도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미 체력과 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버지는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물에 일부러 집어 넣어서 일분 동안 못 나오게 하지는 않습니다.
한겨울에 차가운 얼음 물에서 아들을 고생시키는 것 자체가 테스트하는 아버지의 의도가 아니듯이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테스트해 그가 정말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는지만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순종할 때까지 또 다른 연단을 시켰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삭을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래서 인간을 제물로 받을 만큼 잔인한 하나님이 절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테스트만 목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믿음만 테스트 해 본 후에 이삭은 살려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테스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선 “독자 이삭을 내가 네게 지시한 산에서 번제로 드려라”고 명령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명령만으로 하나님의 진의를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22:12-14)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실제로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당신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그 시험을 중지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 훨씬 전부터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수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아흐라함이 뒤를 돌아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이미 그가 오기 전에 양은 그런 모습으로 바로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식의 시험을 안 해도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기에 그의 믿음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모두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들이 일분간 얼음 물에서 견디면 아들 스스로도 자기 체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뿐 아니라 아버지도 아들에 대한 신뢰감이 더 크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믿음의 조상으로 시험을 통과했다는 기록을 성경에 남김으로써 후대의 신자들에게 믿음과 순종에 대한 의미를 더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생겼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기대에 완전히 부응했습니다. 이삭이 아무 제물도 준비하지 않은 아버지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더니,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수양이 수풀에 걸려 제물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을 제물로 기꺼이 바치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기의 어떤 소중한 것도, 비록 백 살에 난 자기 목숨보다 귀한 외아들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든 하나님을 순전하게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비록 당장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억울해 보이는 요구라도 그분의 선한 뜻은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가 차라리 이 아들 대신에 자기가 죽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주신 아들이오니 당신께서 거두어 가시겠다면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런데 그가 그렇게까지 믿음이 견고해진 것이 자신의 실력과 노력 탓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아 오면서 스스로 한 판단과 행동은 사실상 전부 실패로 끝났습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동생으로 속여 목숨만 부지하려 들었고,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후사 문제로 아내와 후처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조카 롯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소돔과 고모라에서 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실패를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회복시키고 당신의 약속을 재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로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길 외에는 인생에 성공이 절대 없음을 숱한 체험을 통해 뼈저리게 실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믿음이 완전히 견고해졌다고 판단한 인생 말년에서야 이런 테스트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충분히 테스트를 통과할 줄 처음부터 아셨기에 이삭을 제물로 받을 의사는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는 것 외에도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한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오랫동안 살았던 갈대아 우르 땅은 우상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특별히 ‘불(火)’이라는 뜻의 ‘우르’에선 인간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만연했던 곳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런 일을 다반사로 보았고 또 그것이 신에게 바치는 가장 경건한 예배 의식으로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인간을 제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에게 이삭 대신에 미리 준비한 수양을 통해 확인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그의 잠재 의식 속에 우상을 숭배했던 시절(수24:2,3)의 사고 방식, 습관, 태도 등의 찌끼가 그도 모르는 사이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마저 깨끗하게 씻으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이 이천년 후에는 바로 골고다 언덕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독생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사실과 진리의 모형)을 거쳐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습니다. 반면에 당신의 독생자는 의식이 아니라 실제로 죽여서 그 아들을 믿는 자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가장 확실한 예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동시에 오직 당신의 은혜로만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충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잔인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2. 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아들마저 죽이는 하나님
신자가 성경을 이해하는 또 다른 원칙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모르거나 실패하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일어난 사건과 하신 말씀 전부가 단 하나 빠짐 없이 완전하다고 믿고 그 선한 뜻을 추적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완전하신 일을 해야만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거나, 잘 이해가 되지 않으니 혹시 불완전한 하나님이 아닌가라고 의심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살아 역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열심히 파고들어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질문을 자꾸 제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인식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어떤 말씀도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육성으로 들려 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정의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인간 이성과 반(反)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만으로 제한하려 들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 고백
욥의 믿음을 연단(이번에는 Test나 Temptation이 아닌 Trial) 하는 과정에서 그 아들들마저 하루 아침에 다 죽습니다. 정말 질문자님께서 의아해 하듯이 마치 액세서리처럼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에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라면 그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경배를 받을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이런 부분에서도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욥의 아들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하신 뜻 가운데 죽었다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고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욥의 사건에 아들들이 액세서리처럼 등장 시킨 것 자체가 욥을 위한 완전한 계획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들들은 그들의 죄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죽였거나 단지 욥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해 죽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욥1:4,5)
잔칫날 방탕하게 놀면서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아무리 경건해도 항상 죄를 짓습니다. 윤리적인 죄뿐 아니라 생각, 말, 행동으로 하나님을 수시로 배반합니다. 그런데 욥이 매년 아들들의 생일날 속죄제를 드려주었습니다. 욥의 믿음은 훌륭할지 몰라도 아들들 스스로 번제를 드리지 않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서 욥만큼 진정으로 겸비한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공적과 선행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미칠 자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규정된 속죄 제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번제를,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를, 일년 일차 전백성의 대속죄제를 반복해서 드려야 했지만 그것으로는 단지 십자가의 표상이었지 구원 받을 수는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자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이 언제 어느 때에 그 생명을 앗아가도 신자로선 그 앞에 도저히 불평할 수 조차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지으신 토기장이로 언제든 토기를 자기 주권 하에 귀하게 혹은 천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바로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정말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으로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신자의 삶 뿐 아니라 죽음마저도 그분의 은혜입니다. 인간으로선 선뜻 그 이유나 배경이 이해되지 않는, 그래서 억울해 보이는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다윗처럼 사방으로 대적에게 둘러싸여 크게 군급 할지라도 주의 인자가 내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을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어야 참 신자입니다.
욥이 아들들의 갑작스런 죽음의 보고를 받은 후에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욥1:21) 아들들이 다 죽었는데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 받기에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욥의 고백은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언제든 취할 수 있으시기에, 그래서 절대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당신께서 응당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기에, 저는 단지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릴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지금 당장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을 다 쓸어 없애버려도, 지구 자체를 완전히 폭파시켜버려도 인간으로선 하나님 앞에 억울할 것 하나 없으며 당신의 영광에도 한치의 손상이 없다는 것을 진정 확신하는 것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물론 인간의 지정의 만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고 정서적으로는 더욱 인정하기 싫은 억울한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2-5)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는 것을 보면 무조건 죄의 심판의 결과로 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죽은 자가 완전히 무죄해서 억울한 죽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자연 질서는 일반인에게나 성도에게나 동일하게 작용되기 때문에 성도들도 얼마든지 그런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자연 재해가 신자라고 피해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똑 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억울해 보이는 죽음을 볼 때에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먼저 되돌아 보고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정서적으로는 인정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그 일 가운데도 하나님만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욥의 아들들은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라고 기록했듯이 자연 재해로 죽었습니다. 비록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억울하고 슬프기는 욥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욥은 “그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절대로 잔인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신자가 겪는 억울한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이 신묘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가장 억울해야 하는 당사자 욥이 하나님 앞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지적한대로 아직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몸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닥치자 불평이 아니라 그 이유라도 알고자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따졌습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을지라도 내심으로는 아들의 죽음도, 자신의 고통도 억울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비교되지 않는 믿음을 지녔던 욥마저 하나님 앞에는 말로, 마음으로 배반한 죄를 범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하지 않는 자 하나 없다는 반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선 인간에게 억울한 고통이나,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욥기의 결론이 어떻게 납니까? “주께서는 무소 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한 마디로 인간의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려 들었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지 절대로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언제 죽어도 마땅한 죄인,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건만 하나님을 거역했던 모든 인간에게는 억울한 죽음이 없습니다. 단지 먼저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의 시차만 있을 뿐입니다. 나아가 신자의 경우에는 어떤 억울해 보이는 죽음도 오히려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어 평안에 들어간”(사57:1,2)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욥의 아들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 가나안 족속을 아기까지 진멸한 하나님
욥기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또 다른 원리를 하나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살고 죽음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가 이 세 번째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아기까지 진멸했다는 사실에 너무 연연하여 잔인한 분이라고 의심할 여지는 기독교 신앙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그분의 완전한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성경 안에 기록된 당신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四代) 만에 이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15:13-16)
하나님이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특별히 “가나안 땅을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창15:6)한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바로 차지하지 못하고 후손들이 사백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치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온갖 우상을 섬기며 악에 찌든 가나안 족속들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장 벌 주거나 아브라함의 후손을 권능으로 보호하셔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가 차고 넘쳐 도저히 죄말고는 다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때까지 사백년이나 참아 주었습니다.
반면에 그 기간 동안 당신의 백성들은 다른 나라의 노예로 전락시켜 고생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한 나라의 백성 전체가 사백년 동안이나 품삯도 못 받으며 다른 나라의 완전한 노예가 된 적은 이 때말고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에게 평생을 두고 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원수가 있었는데 그 피해자가 자식들에게 이런 유언을 한 셈입니다. “절대 그 원수 집안에게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후손, 후손의 후손까지도 그렇게 해라. 혹시라도 복수할 마음이 들지 모르니까 아예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가서 고생이 되더라도 사백년 간(한 세대를 20년으로 잡으면 20대 후손이 태어날 때 까지임)을 있다가 돌아 오너라. 그때 가서도 도저히 사람이 될 가능성이 안 보이고 전혀 뉘우치지 않거든 돌아와 복수해라. 아이들도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나쁜 짓밖에 없어 크면 선조보다 더할 테니까 괜히 인정사정 봐줄 생각을 하지 말고 씨를 남기지 말아라.”
과연 이렇게 유언한 할아버지가 잔인한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원수의 후손은 20대 선조 때 죄로 취득한 재물로 호사스럽게 살면서 여전히 그보다 더한 죄를 짓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가나안 지역을 발굴한 결과 당시에 온갖 성적 질병이 만연했고 그 여파로 아이들마저 기형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가나안의 우상 숭배 의식은 신전에 소속된 남창이나 여창과의 혼잡한 난교와 동성애가 그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공존하지 못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와는 절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백성도 자기를 닮아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사백년 간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해 내고 역사상 최초로 그 백성들로 가나안 땅에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원했습니다. 그 나라는 당연히 죄악이 섞여서는 안 되고 장래에 발생할 소지도 남겨 두어선 안 되었습니다. 죄악의 뿌리를 근절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통혼은 당연히 안될 뿐 아니라 그 족속은 아이까지도 완전히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멸당한 이유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 자신의 죄가 관영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의 죄악상은 바로 노아 홍수 직전의 상태와 똑 같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만약에 그들 가운데 의인이 열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 아이들마저 진멸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종살이를 더 오래 했을 것입니다.
사백 년이니 참았는데도 물 컵에 물이 찰랑찰랑 차서 아무리 더 부어도 흘러 넘치는 모습처럼 가나안 땅에는 죄가 흘러 넘쳤던 것입니다. 컵에 완전히 썩은 물이 꽉 차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완전히 다 버리고 새 물을 부어서 씻고 씻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썩지 않고 조금이라도 새물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새물이 들어가면 썩은 정도가 희석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상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잔인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의 죄가 하늘을 찔렀던 것입니다.
4. 신구약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인가?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은 사랑이나 공의의 측면에서 절대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품성과 능력과 사역에서 하나의 차이도 없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가 사랑에서 예수님보다 뒤지지 않고, 신약의 예수님도 공의에서 구약의 여호와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드러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몇 개만 대표적으로 살펴 봅시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실체를 보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의 품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자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6,7) 인자는 천대까지 베풀되 악은 삼사대까지만 보응한다고 합니다. 비록 강조하는 표현이지만 당신의 품성 가운데 사랑이 공의보다 근 삼백 배나 강하다는 것 아닙니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선 어떻게 한탄하셨습니까?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11:8,9)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의 죄악상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예대로 하자면 심판을 해도 여러 번 했어야 함에도 하나님이니까 여러 번 참는다고 합니다. 맹렬한 진노대로 심판하는 대신에 속에는 긍휼이 불붙듯 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편애(偏愛) 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욘4:10,11) 당신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의 도시, 죄로 가장 타락한 성읍 니느웨의 백성과 육축마저 아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신약의 예수님도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신약에 ‘심판’이라는 단어가 108번(NIV영문판 기준)이나 나옵니다. 예수님 당신도 심판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할 정도로 선포했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ㅇㅏㅎ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그럼에도 성경을 읽으면 구약의 하나님이 더 엄격해 보이는 반면에 신약의 예수님은 사랑이 더 넘쳐 보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의 난제들(Hard Sayings of the Bible, Walter Kaiser 외 3인 공저)”이란 책에서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구약에서 심판은 대부분이 이미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으므로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신약의 심판은 거의 모두가 역사의 종말에 이뤄질 예언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격의 심판을 두고도 정서적으로는 당연히 구약의 심판이 더 강해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과 증오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죄악에서 멀어졌는가 아닌가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를 벌하지 않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용서가 전제되지 않는 심판은 공의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하나님의 이 기준은 절대 동일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언뜻 보면 사랑이 결핍되고 더 잔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때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회상하셔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십자가이며 해석하는 열쇠도 예수님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 지금 내어 드린다면 조금이라도 그분의 긍휼과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부분이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지금 당장 그분이 나를 죽여도 한 마디 항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백성이라도 이 엄정한 진리 앞에는 예외라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과연 구약의 하나님이 잔인한 하나님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입니까?
1/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