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짓는 최후의 죄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奧妙)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11:4-6)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지혜의 오묘하심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특별히 환난이 이해가 안 된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이해력이 미치는 범위는 참으로 좁습니다. 인간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아는 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고 있는 것이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많습니다.
고난의 이유라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는 욥에게 하나님은 38-41장까지 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대답해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좋고 당시의 현자(賢者)라 할 수 있는 욥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라는 첫 질문부터 완전히 입이 봉해져버렸습니다. 오늘 날의 세계적인 최고 석학들을 다 동원한들 여전히 이 첫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대영백과사전이 우주 아니 지구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사물에 관해서 과연 몇 %의 지식을 정리해 놓았을까요? 현재까지 정리된 지식의 수만 배를 더 알아낸다고 해도 여전히 전체 지식의 수만 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수만 배의 지식을 알아낸들 우주만물을 창조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선 과연 몇%를 알아낸 것일까요?
당연히 인간의 이해력이 미치는 범위는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에 비해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인간은 상상 속에는 그나마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 가능한 모든 영역보다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껏 자기 이해력 안에 붙들어 매려 든다면 그것은 전혀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열을 세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차츰 셈본과 수학을 배우게 되면 열을 넘어서 백, 천까지 셀 수 있고 또 세 자리, 네 자리의 덧셈 뺄셈뿐만 아니라 곱셈, 나눗셈, 이차, 삼차 방정식과 미적분까지 풀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 무한대와 허수(虛數)의 개념도 정리될 뿐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계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무한대나 허수도 하나님 안에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장대하심은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실수와 허수의 무한대조차도 무한대로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된다고 믿음이 약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비유하자면 아이들처럼 다섯 손가락 겨우 구부려가며 하는 셈본 속에 그 분을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도무지 상상도 안 되는 그분의 장대하심 안에 우리 모두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자기 쪽에 책임이 없는 고통을 당했기에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끝까지 주장하며 그 원인이라도 알기 원했습니다. 그에 대해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의 고난 이면에는 비밀스런 죄악이 있다고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는 욥이 자만과 위선에 빠져 죄악을 숨기고 합리화 한다고 지레 판단하여 반드시 죄가 있기에 벌을 받는다고 반론을 퍼부었습니다.
비록 그가 욥의 상황을 그릇 판단하였고 또 모든 고통의 이면에는 반드시 죄가 따른다는 잘못된 신앙관을 갖고 있었지만, 반론 중에 하나님에 대해 상식적 원리로 말한 내용은 너무나 음미할만한 진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또 그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지혜의 오묘이며 그 지식의 광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문자적으로만 봐도 광대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죄지은 것보다 심하게 벌하면 쩨쩨하거나 신경질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죄지은 그대로만 벌하면 공평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죄 지은 것보다 적게 벌하면 긍휼하신 하나님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욥 같이 순전하고 믿음에 자신이 있었던 자, 죄를 짓지 않았던 자, 혹시라도 자식이 죄를 지었을까 걱정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자에게 성경 최대의 징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벌이 죄보다 너무나 중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욥이 고통을 당한 것은 필립 얀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한 내기에 희생된 면이 있습니다. 그의 믿음을 시험해보자고 사단이 건 내기에 하나님이 그의 목숨만은 손대지 않는 조건으로 흔쾌히 승낙하셨기에 그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기 믿음을 버리지도 않았고 약해지지도 않아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욥은 스스로 자신하듯이 죄를 안 짓고 가족과 이웃들을 잘 섬기며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고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무조건 억울한 벌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문자적인 기록상에는 그가 죄를 지은 적이 없지만 하나님께 원망하며 말로 불평을 늘어놓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 생각과 말로는 얼마든지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잘못이 별반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알고자 끝까지 따지고 들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장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그 좁디좁은 이해력 안에 우겨넣으려한 것입니다.
아무리 욥처럼 믿음이 좋은 자라도 마지막에 범하는 죄는 하나님을 꼭 이해하고야 말겠다고 덤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마저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이해하려고 들면 그 자체가 잘못일 뿐이 아니라 정말 쥐꼬리 같이 이해한 지식을 가지고 신자가 독단으로 판단 결정하여 행동하는 추가적인 죄까지 반드시 짓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참으로 오묘하게 나타납니다. 결정적으로 두 단계에 걸쳐 나타납니다. 우선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죄에 비해 그 벌은 너무나 경미합니다. 참으로 오묘한 그분의 지혜가 완전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지은 자를 살려만 주신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고 당신의 유업을 이을 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인간의 이해력 범위 안에서 표현하자면 마이너스 무한대에서 플러스 무한대로 바꿔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당신의 동역자로 삼아 이 땅을 다스리는 그 영광과 권세는 도저히 우리 상상의 범위조차 넘어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타나는 하나님의 오묘는 구원 이후에 신자가 욥처럼 고난 받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오히려 그 벌이 죄보다 더 중한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그분은 우리의 심령을 완전히 꿰뚫어보시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죄까지 전부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받는 벌이 우리 죄보다 중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간혹 우리 가운데 욥처럼 순전한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오히려 더 중한 벌을 받게 하십니다. 그 사람을 더더욱 예수님을 닮게 하시려고 정말 정금같이 나오게 정련하시려고 아무 이유 없는 고통마저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을 이해력의 범위에 붙들어 매지 말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마지막 시험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외아들마저 바치라고 요구했듯이, 신자가 하나님에게 그 원인이라도 알고자 떼쓰는 그것마저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욥이 결국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는 의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또 구원받은 신자에게 고난이 필요 없는 자 또한 단 한명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아니 가장 중요한 사실은 광대하신 하나님의 그 광대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기 위한 당신의 오묘한 사랑이 없는 고난도 단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스카트 펙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자마자 내가 닫혀 있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미개척 분야가 열렸던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고 인정하자 그 모르는 부분까지 다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더 많은 모르는 부분이 실체임을 깨닫게 되고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말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벌은 우리의 죄보다 경하기에 무서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보다 너무나 적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이 바로 참 겸손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참 은혜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고난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소망을 더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광대하신 하나님에게 인간이 보일 반응은 오직 찬양과 경배뿐입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시48:1)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11/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