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앞도 비춰주지 않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1)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이자 자신의 충복인 우리야를 헷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가난한 자가 갖고 있는 양 한 마리마저 빼앗는 탐욕스런 부자에 비유하여 그를 크게 책망했습니다.
본문은 그 책망 끝에 장차 다윗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 한 부분입니다. 다윗이 남의 처를 빼앗았듯이 다윗의 처도 남이 빼앗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다윗은 은밀하게 간음 했지만 그 사람은 백주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사람들 앞에서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으로선 자기 죄과를 톡톡하게 무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의 큰 아들 압살롬이었고 예언 그대로 이뤄졌습니다.(삼하16:22) 나단의 예언은 기원전 990년 경에 있었고,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985년경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나단은 길어야 5년 후,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나단이 좀더 구체적으로 압살롬이 그럴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거의 부인합니다. 후대의 사람이 이미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다 알고 난 후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해서 지어낸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정확하게 예언이 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을 믿지 않고 인간 이성에만 의존하는 그들이 추론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럼 이런 경우에도 그 이론을 적용하면 후대 기자들이 이왕이면 압살롬이라고 밝혀 기록했더라면 성경의 정밀성과 신뢰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도 예언과 사건이 5년의 시차 밖에 없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실제 성경의 기록이 비데오로 촬영하듯이 현장에서 즉시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은 압살롬 대신에 "다른 사람"이라고 무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단이 예언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조작의 가능성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직 진실만을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나단도 그 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압살롬의 이름을 나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 역사적 진실성과 무오성을 넘어서 참으로 오묘한 것 같습니다. 심오하거나 거창한 사건기록보다 이런 평범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표현이 훨씬 더 큰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다윗도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미리 압살롬의 이름을 가르쳐 주어 대비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리 알려주어 다윗으로 그 반역 사건에 대비케 하면 징벌로서의 효과가 없어집니다. 또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거나 적국을 정복했을 때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왕비를 잡아서 정복자의 후처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왕권을 말살하고 그 왕권을 자기가 새로 차지했다는 상징입니다.
말하자면 본문만으로도 하나님은 사실상 반역 사건을 예언한 것이며 다윗으로 대비케 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역 사건이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다윗의 처를 남에게 주겠다고 둘러서 표현한 이유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 값을 행한 그대로 받는구나라고 철저하게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만약 하나님이 압살롬의 이름을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압살롬을 죽였을지 모릅니다. 혹은 자기 아들인지라 죽이지는 않고 멀리 유배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 다윗은 압살롬을 자기 아들로 여기지 아니하고 아무 죄도 없는(반역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를 자꾸 증오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또 다시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마저 사전에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반드시 구원의 길을 열어 놓고 또 신자가 알 수 있도록 분명히 보이십니다. 당신의 자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회개토록 해 새롭게 소성 시키려 하십니다. 의의 열매를 맺기를 막상 당사자보다 그분이 더 간절히 원하시기에 징계를 허락하십니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으로선 비록 징계가 받는 당시로선 싫고 힘듭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선한 뜻이 그 가운데 있으며 결국 자신에게 크나큰 유익으로 돌아 옴을 믿는다면 달게 받아야 할 뿐 아니라 그 뜻을 겸허하게 물어야 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장남인 압살롬에게 반역과 자신의 처를 빼앗기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은 수치와 모멸을 당하고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삼하16:11) 심지어 반역을 평정하려 가는 요압에게 그를 선대할 것을 당부했습니다.(삼하18:5)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징계 가운데 자신의 죄부터 되돌아 보고 자기 성숙의 계기로 삼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더욱 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겠습니까?
또 많은 신자들이 자꾸 자기에게 실현 될 하나님의 계획을 좀 멀리까지 알 수 없을까, 왜 좀 화끈하게 계시해 주지 않는가 불만을 가집니다. 어떤 때는 바로 눈 앞의 일에도 전혀 대책이 안 서며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경우처럼 우리가 장래 일을 알면 죄에 빠질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전부가 죄에 빠져버리니까 그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결과란 인간의 안목으로는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로 밖에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결과면 영적인 나태를 부를 것입니다. 기도나 말씀을 볼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나쁜 결과는 미리 자포자기 하거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결과를 뒤엎어 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가 대신 차지하려는 교만이 앞설 것입니다. 이래 저래 결과를 미리 알면 짓는 것은 죄뿐입니다.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려고 하기 보다는 언제 어느 곳 어떤 사건에 처하든 당신의 자녀로서 올바른 모습으로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어떤 징계라도 그 안에 선의 열매가 숨겨져 있기에 전혀 염려할 필요도 없고 주께서 반드시 자신을 소성케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1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