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운이 좋았겠지요!
월요일 아침 먼저 물새는 곳을 발견해 파이프 수리부터 해야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거래해 오던 교포 아저씨는 꼼꼼하게 잘 고치면서 비교적 싸게 청구하는 분입니다. 경험이 많은데다 자부심이 대단해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면 당장 야단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 하나가 흠입니다. 말하자면 주관이 뚜렷해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 전형적인 경상도 중년 남자입니다. 오래 전에 이민 왔어도 교회 나가지 않는데 전도의 씨알도 먹히지 않는 분입니다.
이번에는 마침 항상 함께 다니는 부인에게 우회적으로나마 복음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목사인 줄 아니까 UC Berkely를 졸업하는 아들이 신학교를 가려해 미치겠다는 하소연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제발 좀 말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저는 전문사역자의 길로 가겠다고 나서도 선뜻 찬동하지 않으며 또 아무에게나 그렇게 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에게 반드시 Calling을 주심을 확신하기에 삼자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제 삼자의 권면도 소명을 주시는 방식에 포함은 되지만 당사자를 오랫동안 지켜봐서 잘 아는 경우에 한합니다.
그러겠다고 약속하고선 어제 참석했던 10주년 기념예배 때 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이미 나눴던 LA 폭동 간증 이야기가 아닙니다. 워낙 이름 없이 자그만 교회인지라 공식적인 순서를 맡아 축하하러 오신 분은 은퇴하신 노목사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담임목사와 저까지 세 목사가 식사하며 교제를 나눴는데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두 암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노목사님은 50세에 백혈병에 걸려 조기 은퇴를 하시고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후로 16년째 투병해오고 있는데 이제는 꽤 건강한 편이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10여 년 전에 혀에 암이 생겼고, 그 교회의 목사님도 수년 전에 목에 암이 생겼지만 수술해서 살아났습니다.
제가 그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필 이 이야기를 택한 이유는, 마침 바로 그 전날에 있었던 일인 탓도 있지만, 두 가지였습니다. 목사의 길이 순탄치 않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아주 심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정말 복음 전파에만 순수하게 전념하면 하나님이 죽을병에서도 고쳐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 원리를 전혀 모르는 그 엄마에겐 오히려 목사가 암이 걸리기 쉬운 직업이라는 인상만 심어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암이 나은 이야기를 좀 더 나눴습니다. 수술 받는 12시간 동안 교인들이 2명씩 짝을 지어 금식하며 교대로 기도했던 일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교인들의 눈물어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셔서 수술 후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받지 않게 되었고 side-effect는 좀 있지만 지금껏 10년간 보시다시피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지 않느냐고 자랑처럼 말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일하고 있는 남편도 들으라고 조금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별히 그분이 술 담배를 하시는 분이라 설암의 주요 원인이 술 담배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저도 33살에 예수 믿기 전까지는 술 담배에 절었고 자존심과 고집 세기는 꼭 그분 같았기 때문입니다. 전혀 관심 없는 척은 하지만 다 들렸을 것이며 또 조금은 찔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딴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기적적 치유도 일어난다는 뜻으로 누차 강조하며 전한 이야기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딱 이 한마디였습니다. “아마 운이 좋았겠지요.” 하나님의 실존(實存) 자체도 믿지 않는 그녀로선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전도할 생각으로 열심히 전한 저로선 아주 큰 실망이었습니다. 그 순간 역시 성경의 진술이 하나 틀린 것 없는 진리라는 확신이 다시 생겼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이 부부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으로선 영적 차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 믿기 전에 동일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틀림없이 똑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더 야단쳤을 것입니다. 감히 누구(?)에게 황당무계하고 요상한 사설(邪說)을 푸느냐고 말입니다.
동일한 복음이 LA 폭동 때에 어려운 일을 겪은 그 집사님에게는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반면에 이 부부에겐 아직도 전혀 다른 세계의, 어쩌면 지어낸 이야기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로선 비록 그 경위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의해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요? 반면에 이 부부로선 영원한 운명은 둘째 치고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가 있다는 것도 모르니 얼마나 더 불쌍하고 안타까운지요?
운이 좋다 나쁘다는 즉, 우연의 일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에 아무런 계획, 뜻, 힘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진행되어져야만 하는 필연성, 심지어 개연성조차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경우에 대입하면 출석교회의 담임목사의 생명을 살려달라는 성도들의 선하고 진정어린 기도와 아무 상관없이 병이 치료되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그냥 헛된 짓거리만 한 것일까요? 단순히 서로 마음의 위로라도 얻으려고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선각자에 불과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종교놀음을 한 것밖에 안 될까요?
물론 현대의술이 좋아서 고쳤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 교환교수로 와있으면서 저희 교회에 출석했던 서울의대, 고려의대 교수와 또 교포 미국심장전문의 세분이 제 병의 경과를 상당히 우려했음에도 키모는 물론 방사선치료도 받지 않게 된 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연의 일치는 어떤 일이 진행됨에 선하든 악하든 사전에 고안된 의미나 가치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매사가 그저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인생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어떻게 되어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운명이려니 할 뿐입니다. 아무리 비상한 일이 생겨도 느릿느릿한 소의 뒷발질에 재빠르기 짝이 없는 생쥐가 밟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저의 치유를 위해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해 준 젊은 유학생들의 진심, 선의, 사랑 등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을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염려 걱정해준 정성, 간절히 기도한 행위, 함께 나눈 위로나 격려가 한갓 쓰레기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아들이 신학교에 가려는 것을 구태여 막을 이유나 필요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의 팔자거니 치면 그만입니다. 어떤 일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필연성이 내포되어 있거나, 최소한 필연성을 스스로 부여하겠다는 뜻입니다. 또 필연이란 이미 어떤 의미와 가치를 내포한 것입니다. 최소한 특정 목적이 있어서 그것을 이루는 쪽으로 움직이는 방향성은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진짜로 우연의 일치인 일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이므로 우연의 일치인 줄도 모를 정도로 너무나 드물게 일어납니다. 이미 우연의 일치라고 깨달으면 사실은 필연입니다. 또 기도하여 응답되는 일 가운데도 간혹 그런 우연의 일치가 섞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진리는 우연의 일치는 기도하면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반복해서 자주 일어나면 벌써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필연입니다. 나아가 어떤 선하고 의로운 방향으로만 그 일치가 일어나면 그 배후에는 선하고 의로운 힘이 작용된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 보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은, 특별히 그 응답은 항상 선하고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 대부분의 우연의 일치는 인간의 통제와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인간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우연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연의 일치가 기도 가운데 가장 많이 일어난다면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선하고 위대한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연의 일치 같아 보이는 놀랍고도 큰일은 기도가 아니고는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법입니다.
어쨌든 이 부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어보려 했던 시도는 기도에 응답해주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마당인지라 아무 효과 없이 끝나버렸습니다. 완고하기 짝이 없는 그 아저씨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아들이 끝까지 목사가 되겠다고 우기면 어떡하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속담대로 “그럼 뭐 어쩔 수 없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분명 이 부부를 아주 사랑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고장이 안 나는 이상 만날 수 없는 저보다는 신학교에 가려고 고집 부리는 아들을 통해 분명히 복음 전파의 역사가 일어날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아들의 종교와 자기들 사상과는 다르니 서로 간섭하지 말라고 고집했을지 모르지만 막상 아들이 교회 일에 전념하면 모른척하지는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아저씨가 제게 던진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아이가 너무 착하고 순합니다. 전혀 약삭빠르지 못하며 남에게 해코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덧붙였습니다. “그런 아이에겐 목사 직업이야말로 제격입니다.” 아마 다른 말은 몰라도 이 한마디는 그 아저씨도 분명 수긍했을 것입니다.
현실적 인간적 수단과 방법에 능통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돌봐주는 길 외에 갈수록 험난해지는 인생길을 헤쳐 나갈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직을 수행하면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그분께 엎드리며 의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언젠가는 그 부부도 젊은 학생들의 눈물어린 기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어 이 죄 많고 부족한 종으로 복음전파 사역을 이어갈 수 있게 하셨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도록 계속 기도해야겠습니다.
9/18/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