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생활을 자청한 이스라엘

조회 수 809 추천 수 37 2009.11.18 0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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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생활을 자청한 이스라엘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창45:17 -20)


형들의 시샘과 모의로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400년간 애굽 종살이의 원인을 제공한 셈입니다. 그를  비전을 끝까지 붙든 믿음의 사람이라고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보다는 그 또한 허물과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은 신비하게 간섭하셔서 이스라엘과 맺은 당신의 언약을 기필코 이루셨다는 관점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흔히 이해하는 식으로 그가 비전을 끝까지 붙든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꿈에 그리던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고 원수진 형들과 화해했으니 7년 흉년의 사건을 잘 마무리 지은 후 당연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다고 한 땅은 가나안이지 애굽이 아니었고 또 그런 큰 공을 세웠다면 바로에게 얼마든지 가나안 귀환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가 현실적으로 총리 직분을 쉽사리 사임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자기는 남고 나머지 가족들이라도 먼저 돌려보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을 포함한 70명이 넘는 야곱의 가문들이 애굽 땅에서 장사되었고 심지어 그는  애굽식으로 장사되었습니다.(창50:26) 비록 야곱이나 요셉이 죽을 때까지 가나안 귀환의 꿈은 버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한 번이라도 생전에 가나안 귀환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창세기는 야곱과 이스라엘 12지파의 선조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아름다운 땅과 기름진 것들”에 빠져 평안한 생활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 스스로 애굽의 노예가 될 것을 자청한 셈입니다. 지금처럼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지도 않은 고대에서 자기들 영토 안에서 이민족이 강성하는 데도 끝까지 잘 대우해줄 나라는 없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아무리 가나안 땅에 애굽보다 덜 기름지더라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하고 일단 노예로 그 신분이 바뀌자 바로가 공짜 노역자들을 놓아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결국 아브라함의 신앙, 즉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소망이 이삭, 야곱, 요셉까지는 갔을지 몰라도 그 이후로는 아주 약해졌거나 끊겼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신앙 교육의 부재라기보다는 풍요로운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환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결코 먼저 찾지 않습니다. 남의 나라의 노예가 되더라도 먹고 살 것에 부족만 하지 않으면 우상이라도 경배합니다.  

인간은 끝없이 하나님에게 형통만 요구하고 눈에 보이는 축복이 없으면 바로 배반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겠다는 믿음을 찾기 보다도 노예 살이 고통이 도저히 못 견딜 정도로 심해지자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지 않습니까? 또 그 많은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과 신령한 간섭을 체험하고도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었지 않습니까? 잠시라도 먹고 마실 것이 떨어지면 하나님께 불만을 터뜨리는 정도를 넘어 바로 배반해버립니다.    

요셉과 그 완악한 후손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언약을 단 한 치도 변경하지 않고 당신만의 방법과 시기에 반드시 이뤄내십니다. 야곱과 그 후손이 평안한 생활에 눈이 어두워 노예 생활을 자청한 셈이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다 아시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해주겠다는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먼저 야곱이 애굽 땅으로 내려간 것도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러 갈 때에 아무리 생이별한 아들이 보고 싶었지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하며 주저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상 중에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46:3)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있었으면 계속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곳곳에 산재된 이방 족속의 방해로 제대로 번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온갖 우상들을 받아 들여 여호와 신앙마저 지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만약 요셉 때에 귀환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애굽의 종과 군사들을 대동하고 들어와서 가나안 땅에 어쩌면 애굽의 속국이 생겼을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애초 계획이었습니다. 우선 비록 노예지만 강력한 제국의 보호 아래 한 지역을 차지해 있어야만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지고 또 고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같이 어느 날 갑자기 외국에서 나타난 갑부가 집안의 명맥을 이어가기는 그 민족과 동화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노예로 있는 한에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아무리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그 땅에 기왕에 살고 있는 나라들도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셨듯이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아모리 족소의 죄악이 관영하도록 기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주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해 그들과의 언약을 지키려는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가나안 땅에 만연한 죄의 심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신에 그때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은 오히려 고난 가운데 두셨습니다. 환난을 겪지 않고는 당신을 진정으로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믿음이 온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선 죄악이 관영하기를 또 애굽의 고센 땅에선 당신만을 찾는 부르짖음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동안에 야곱의 후손들은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졌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전쟁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하려면 숫자가 창성하고 노예 생활로 다져진 강건함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만 판단하는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먼 장래까지 한 치의 빈틈없이 예비하셔서 선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그분의 일은 세상의 어떤 천재적인 현인이나, 철학자나, 과학자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항상 꿈을 꾸고 그 꿈을 먹고 산 요셉조차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은 알아맞히었을지 몰라도 400백년 종살이 후에 어린양의 피를 통한 출애굽의 구원과 홍해의 기적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맺으신 언약을 전 역사를 꿰뚫어서 당신만의 전적 주권으로 신실하게 이뤄내십니다. 인간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섭리를 그나마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만이 역사를 움직여가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안에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 두 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의 끝없는 배교와 그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죄와 허물이, 신자들의 것도 당연히 포함하여, 이 땅을 더럽혀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덮어가며 당신의 역사를 성경대로 진행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진행되리라는 것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인류 역사는 계시록의 말씀대로 반드시 종말이 있고 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땅과 기름진 것에 현혹된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자청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난이 없으면 당장 우리의 모든 시선은  아름다운 땅과 기름진 것으로 향합니다. 신자도 여전히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잊지 않고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곳을 차지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져야할 책임은 큰 실패와 허물이 없이 그곳을 차지하여  후손에게 제대로 잘 물려주느냐 아니면 우리 후손마저 동일한 실패와 허물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만들 것인가 뿐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길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칙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은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믿음으로 소망하고 있어도 계속해서 넘어지고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6/1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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