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의 입을 봉하는가?

조회 수 272 추천 수 16 2011.03.25 0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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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의 입을 봉하는가?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단6:17)


하늘에서 웃으시는 하나님

바사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여 방백은 물론 총리 중에서도 뛰어나므로 전국을 다스리게 합니다. 외국인을 신하로선 최고 직위에 올린 것입니다. 시기심에 불탄 총리들과 방백들이 그를 제거하려 계책을 꾸몄습니다. 국사(國事)에선 고소할 틈이 전혀 없기에 종교적 문제로 올가미를 씌우려 했습니다.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도록 하는 조서를 왕으로 내리게 만듭니다.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6:10)하였습니다. 열린 창에서 기도했으므로 조서를 어긴 것을 누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사자 굴에 잡혀가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께 감사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다리오가 다니엘을 신뢰하고 총애해서 구하고 싶어도 왕 스스로 국법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고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고 인을 쳐서 봉인까지 했습니다. 특이하게 왕과 귀인들이 인을 함께 쳤습니다. 왕의 인만 있으면 다니엘을 아끼는 왕이 혹시라도 사자나 다니엘을 꺼냈다가 다시 넣고서 인을 새로 치는 그런 가능성까지 막았다는 뜻입니다. 왕도 도무지 어떤 수를 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완전히 사자 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22절)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기에 아무리 따져 봐도 그가 살아날 확률은 제로였습니다. 왕과 귀인들은 굴을 막은 돌에 봉인까지 했지만 다니엘의 하나님은 대신에 사자의 입을 봉인해버렸습니다.

틀림없이 그 사자 굴은 평소에 죽음의 형벌을 주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형 집행이 있기 전에는 사자들을 일부러 굶겨서 난폭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 죽음은 처참하고 고통이 심해 최고 중죄인에게 극형을 내리는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를 그 굴에 던져 넣었더니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24절)는 기록이 이를 입증합니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뼈까지 부숴버릴 정도면 얼마나 굶주렸겠습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로마로 향하던 중에 폭풍우를 만난 바울과 그 일행처럼 정말 문자 그대로 "머리 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세상의 최고 권력자가 최고 맹수 사자의 입을 빌려 행하는 사형집행이었기에 어떤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와 동행하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봉해버렸습니다. 크게 벌려져있는 죽음의 아가리를 막은 것입니다. 인생의 살고 죽음은 오직 그분의 몫일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해도 그분의 당신 백성께 베푸는 거룩하신 역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로마제국(세상의 최고 권력자)에 대한 반역죄로 최고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대 관원들은 제자들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백성들에게 부활했다고 속일까 염려했습니다. 유대 대제사장이 봉인하고 파숫군까지 세웠습니다. 어느 누구도 무덤의 돌을 굴릴 엄두도 못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니엘처럼 사자의 아가리를 막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스스로 죽음 자체를 뚫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인간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근원임을 만천하에 내보였습니다.

인간들의 행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서로 대비해 보면 너무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굴에 큰 돌을 막고, 왕과 귀인들이 봉인 하고, 사자를 굶겨서, 하나님 그분을 가두거나 죽이려 했으니 말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선 고성능 크레인을 동원해야만 돌을 움직일 수 있고, 생사여탈권이 있는 왕이 봉인했고, 삼손이라도 사자 떼에 이길 장사는 없기에 물샐 틈이라고는 단 하나 없이 가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 가두려는 상대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를 비웃으시리로다."(시2:1-4)

참으로 성경이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선 다니엘의 사자굴 인봉 사건에 관한 구약 기록이 예수님의 무덤 인봉에 대한 사실성을 더 높이지 않습니까? 마치 구약에 태가 막혔던 여종들이 다시 수태하는 기사로 인해 동정녀 탄생의 가능성도 입증되듯이 말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그 큰 능력 앞에 항거하는 자들과 또 오늘날도 그 모든 기록을 보고도 믿지 않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서, 하늘에서 오히려 웃으신다고 아주 친절하게(?) 해설 기사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기도만 하면 만사형통?

바꿔 말해 오늘 날의 신자들이 이런 기사를 읽고선 하나님의 능력은 참으로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감탄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다니엘 같은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위급한 순간이 닥쳐도 하나님은 사자의 아가리를 봉해줄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가 땅 끝까지 가더라도 동행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감명 깊고 은혜로운 성경 구절이 아니라 현실의 실제적 체험, 그것도 매일 매순간의 살아가고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니엘처럼 아무리 바쁘고 위급한 일이 있어도 하루 세 번 씩 기도해야 합니까? 또 지혜가 풍부해서 세상일도 민첩하게 잘 처리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신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가 행해야 할 너무나 기본적인 사항들입니다. 또 기적을 맛보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에는 흔히 간과해버리기 쉬운 신앙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전혀 다른 다니엘만의 특성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왕 외에 경배토록 못하는 금령은 유효기한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7절)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한시적 조치였습니다. 다니엘로선 한 달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던지, 혹시 기도하더라도 남들 모르게 창을 닫고 기도했으면 되었습니다. 우리라면, 아니 저라면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도 습관적, 의무적으로 기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만큼 자기 민족과 예루살렘 성전에 좌정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뜨거웠고, 자신과 민족의 죄 사함을 갈급하게 구했다는 뜻입니다. 누가 뭐래도, 심지어 죽음이 자신의 앞을 가로 막아도 하나님의 구원을 울부짖으며 간구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로선 그 외의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속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속이 불붙듯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잇을 것임이로라."(고전9:16)고 고백했던 것 같은 심정과 상태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크게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보다 못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야단치라고 충고하자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40)고 하셨지 않습니까?  다니엘의 사자굴과 예수님 무덤의 돌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크신 역사를 보고 찬양한 셈 아닙니까?

우리의 감사와 찬양과 기도와 경배가 과연 다니엘의 그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 하지 않으면 중심이 오히려 무겁게 눌리고, 그리하면 주님 주시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정도까지 되는가요? 그들 같은 담대함과 견고함이 없다 해도 최소한 어떤 신앙 행위를 해도 그 본심과 동기만이라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할까요?

단지 기도만 열심히 하면 매사 형통한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라도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속고 있는지, 아니면 틀린 줄 알고도 그대로 믿고 싶은 것은 아닌지 진짜 곰곰이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그렇게 뜨겁게(?) 기도했는데도 왜 자꾸 사자 굴에 집어넣느냐는 의심과 불평이 심심찮게 생기지 않습니까? 다니엘과는 전혀 다른 믿음으로 다른 방식의 기도를 해놓고 어찌 다니엘 같은 기적을 안 일으켜 주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선 너무나 가소로운 일이며, 우리로선 쥐구멍을 찾기에도 부끄러운 짓 아닙니까?

엄밀히 따져보면 공중에서 뼈까지 부셔질 정도의 사자 굴에는 즉, 곧바로 죽게 되는 순간까지는 아직 처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임종직전에 이르러서도 그런 불평과 의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죽이셔도 아무 반발도 할 수 없는 우리이지 않습니까?

과연 사람 앞에 무죄한가?

다니엘이 우리와 분명히 달랐던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6:22절)  

다시 말하지만 당시 상황을 이모저모 다 따져 봐도 사자 굴에서 살아나올 수는 절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살아나왔다면, 거기다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굴에 던져진 것은 최고 중범죄를 범해 사형을 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살아났다면  죄가 없음을 하나님이 증명해준 셈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했다고 단언했습니다. 왕을 대놓고 해치려한 적은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왕의 조서를 위반하여 여호와께 경배하며 기도했지만 절대로 그 본심이 왕을 배반, 거역, 심지어 무시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을 향한 충성된 마음에는 추후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열망에 불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의 영적인 열성과 이방 땅에서의 종교적 사회적 업무 간에 사실상은 아무런 충돌, 모순, 타협, 조종, 왜곡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조서를 위반했지만 절대로 총리 직분을 소홀히 하거나, 그 직분을 이용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혜를 주는 차별적인 행정 처리를 한 적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신앙을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 빌미로 직무 수행에 차질 혹은 나태조차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만 잘 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진심으로 하자 없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핑계로 그들에게 손해를 전혀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시기하던 자들로선 그가 믿는 종교에서나마 억지 하자를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으면 도무지 그를 모함할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사의 우상들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구실조차 통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우상에게 절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왕의 허락을, 어쩌면 그가 해몽을 정확하게 해준 선대왕 느부갓네살 때부터 받아놓은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참조2:46-49) 또 다리오 왕도 다니엘의 신 즉, 여호와를 믿었거나 최소한 인정하고 있음을 시기꾼들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신에 "왕 외에 구하면"이라고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왕 외에 "절하면"이 아니고 "구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교묘하지 않습니까? 다리오로선 모든 국사를 자기 승인 하에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들의 숨겨진 음모는 미처 모르고 어인을 찍어 주었던 것입니다. 왕은 다니엘이 국사 수행에서 자기에게 구하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의심도 하지 않았고, 또 그가 여호와에게 기도하는 것이 이 조서에 위배된다는 것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욕한 것과 민중을 조금 소요케 한 것만으로는 로마의 사형선고를 받을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복음 선포를 뒤틀어 유대인의 왕이 되려 했다는 죄목으로 바꾸고선 기어이 골고다로 이끈 모습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세상에서 잘못한 것 하나 없듯이, 다니엘도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을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했듯이 다니엘도 여호와께 기도하는 일로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그대로 실천하는 자라는 평을 받았던 것입니다. 흠이라면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와 똑 같이 세상 사람도 사랑한다는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 처형을 당할 줄 알고도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과 예표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맡은 직분에서 흠결 하나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짜 순수하게 믿는 열정만이 흠이라는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까? 교회에만 열렬히 충성하는 종교적인 사람 말고 말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다른 한 발은 교회에 담그고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양쪽에서 다 호사 형통하려는 우리의 기도가 어찌 다니엘의 기도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돌들도 외칠 것을 믿는가?

작금 교회에선 기도만 하면 사자 입까지 봉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열심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숨겨진, 사실은 성경이 엄연히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두 가지 특성은 전혀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알고도 안 가르치는 것은 영적인 타락이요, 진짜로 몰라서 안 가르쳤다면 영적인 무지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분명 틀렸음을 잘 아는 온전한 신자조차도 실제로는 다니엘처럼 충성하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불만이 터져 나오기 일쑤입니다. 교회 생활 수십 년간 온갖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성실히 참여 했고 또 주위에서 믿음이 좋다는 칭송을 받는데도 그러합니다. 그럼 도무지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기적을 평생을 두고 한 번도 맛볼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니엘의 대적자들이 그 조서의 유효기한을 보통의 경우라면 무한정으로 하든지, 아니면 일 년 정도는 해야 될 것 같은데 기껏 한 달로 제한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해줄 실마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제한한 이유는 우선 바사의 신들에게도 절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 외에 일절 다른 신에게도 간구하지 못하게 했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자기들 신전의 모든 제사마저 중지하고서 다니엘 한 사람만은 어떻게 하든 잡아 죽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사탄이 내뿜는 시커먼 죽음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느껴지십니까?

그럼에도 겉으로는 왕에 대한 충성도를 테스트 한다는 선한 구실을 내세웠습니다. 이제 사탄이 얼마나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까?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무리수를 쓰더라도, 나아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룩한 명분으로 위장해서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작정한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둘째 이유는 한 달만 해도 자기들이 쳐놓은 덫에 다니엘이 안 걸릴 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기도의 종인 줄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조차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처럼 살짝 한 달만 죽음의 예봉을 피하고 보자는 너무나 간단한 꾀도 못 낼 정도로 그는 진짜 우직하고 충성된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이런 다니엘과 비교하니 우리의 기적에 대한 소망이 오히려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바사의 신전 제사조차 한 달 간이나 폐한, 설령 제사는 계속 하되 기도 행위만 금지시켰다 해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예배나 기도를 꼭 성실히 행할 이유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바사에선 화려하고도 거대하게 꾸며진 신전에서 엄숙하거나 풍요로운 종교적 행사만 계속 벌렸을 뿐입니다. 또 그런 행사하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음란한 행위를 하면서 즐긴 것입니다. 순전히 인간이 고안해 낸 인간들의 잔치였습니다. 그들의 신은 자기들 삶에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아니 아예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니 그들 스스로도 신께 뭐든 바칠 테니까 제발 귀찮게만 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할 정도였습니다.    

우상은 실존하지 않고 또 아무리 경건하고 신비한 모습으로 숭배해봐야 그  종교는 허상일  뿐입니다. 불쌍하게도 그들은 사탄에게 미혹되어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로선 다니엘이 목숨까지 걸며 기도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조차 못했고 오히려 조롱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니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실존하시고, 신자의 바로 곁에서 일일이 그 삶을 간섭하시며,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배하는 자를 사자의 입을 봉해서라도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루 세 번 아니,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사자 굴의 인봉된 돌들도 굴러버리고, 온 천지에 깔린 돌들로도 당신을 찬양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분을 알고 또 구원을 얻어 아빠로 부를 수 있게 된 우리가 어찌 호흡이 있는 동안 찬양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우리의 그분에 대한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경배가 때로 멈춘다면, 때로 막힌다면, 때로 힘이 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분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는 손도 멈추거나, 막히거나,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힘이 주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의심과 불만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우리의 의심과 불만이 는는 만큼 기도, 찬양, 감사, 경배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 죄악, 사탄, 죽음에 맞서는 우리 믿음의 힘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니엘 같은 기적은 점점 우리 신앙생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믿음의 크기가 그것밖에 안 되는 줄 하나님은 먼저 아십니다. 그래서 아무나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 같은 위급한 경우에 빠트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죽겠다고 아우성이니 참으로 하늘에서 웃을 일입니다.

왜 나에게는 사자 입을 봉하는 것 같은 기적이 안 일어나지라는 의심과 불만이 생기면 곧바로 사탄의 속임수임을 아셔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 경배, 감사, 기도한다면 그 입을 세상 어떤 것도 막지 못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정말로 사자 입 정도는 언제든 봉할 수 있고 대신에 돌들로도 당신을 찬양케 할 수 있는 하나님임을 다니엘처럼 확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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