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8:3,4 너무나 위선적인 기독교 신자

조회 수 444 추천 수 19 2009.09.17 23: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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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위선적인 기독교 신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3,4)


모르긴 몰라도 기독교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안에 들어와서 보는 것이 아주 극명하게 다른 종교의 대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다 위선적이고 교회는 부패했다고 보았지만 그렇지 않은 신자와 교회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가 믿기 전에 예상, 추측,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본질도 사실은 불신자 시절에 기독교를 현상적으로만 보았던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불신자 시절에 기독교를 믿지 않으려 고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뭐라 해도 신자는 위선적이고 교회는 부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종교를 가지면 반드시 착해져야 하고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착해야 천국을 가고 악하면 지옥을 가는 것이 절대적 진리이며 종교란 그것을 가르치고 훈련받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의 그런 선입관은 기독교와 좁게는 죄에 대한 생각의 차이, 넓게는 모든 사물을 보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불신자는 선과 악을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만 기준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면 흔히들 “나는 간음, 살인, 거짓말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적도 없으니 하나님 믿을 이유도 필요도 없어!”라는 반응을 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고 바로 그런 반응이 얼마나 잘못인지 지적했습니다. 생각으로 짓는 잘못도 죄이며 심지어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형제를 말로서 바보라고 욕하면 살인죄라고 했고, 간음이나 살인은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는지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선 행동으로 범한 죄가 아니고는 벌을 줄 수 없으며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을 품었는지 아닌지, 형제를 얼마나 시기하고 미워했기에 말로 바보라고 욕했는지 과연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더 고급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악을 하나님의 관점, 그분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바로 그렇게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셈입니다.

불신자들의 근본적 가치관은 결국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많이 해야 천국을 간다는 종교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선을 얼마나 행했느냐만 가지고 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삼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뒤로는 호박씨 까더라는 비난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한 것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행동뿐만 아니라 말과 생각과 영혼까지 다 감찰할 수 있으며 실제로 감찰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내부에 들어와 외부에서 보와 왔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현상적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에 대한 관점이 본질적으로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쎌서스라는 2세기의 로마 철학자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모순을 지적하려는 의도로 그의 책 ‘참된 강화’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오류는 인간 영혼에 대한 과대평가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있다.” 즉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구원을 얻은 한 죄인의 영혼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고귀해지고 참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신으로선 그것이 충분한 불신의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불신자로선 창조주 하나님이 한 개인에게 그것도 죄에 찌든 보잘 것 없는 자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語不成說)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 또한 아무리 당대의 고매한 사상가였을지라도 오직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전에 착하게 살면 되고 또 하나님은 얼마나 착하게 행했는가를 가지고 심판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과 영혼까지 꿰뚫어 보실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기껏해야 시험 채점관에 불과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까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면 정말로 행위로 구원해주는 것이 타당합니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과 영혼까지 살펴볼 때에는 단 한 명도 구원 받을 수 있는 자 없으며 몽땅 당신의 진노 아래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은 후에 당신의 기준으로 볼 때에 모두 지옥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절대적 선이자 완전하신 당신께서 그 선악의 기준을 바꾸거나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이 그 죄를 감당해서 죽고 죄인들은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지금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을 십자가 없이 그냥 그대로 두어선 살아서나 죽어서나 단 한 번도 진정한 평강과 안식을 누리지 못함을 그분께서 너무나 안타깝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을 만들고 자연에 자동적인 운행법칙을 부여한 후에는 그냥 그대로 버려둔 절대자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이 세상(죄인)을 절대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결국 기독교를 밖과 안에서 볼 때에 가장 크게 달라지는 핵심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신자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관대 하늘의 별과 달을 다 만드신 그분께서 생각하고 관념하셨는지 너무나 신기하다고 깨닫게 된 자입니다. 그 분이 나를 지으시고 지금도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전혀 알지 못했고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나를 속속들이 아시고 관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어떻게 하든 그분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와 임무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예쁜 여자를 보면 쉽사리 음욕을 품고 형제가 싫고 미워서 툭하면 말로 바보라고 욕하는 줄까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 용서해주시고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계심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와 보니까 절실하게 깨달아졌고 또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너무나도 놀랍게 된 것입니다.

불신자들로선 신자가 위선적이고 교회가 부패했다는 비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로선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전부이기에 행동으로 짓지 않는 한 죄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것도 죄에 찌든 한 개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그들로선 육신이 죽었다 깨면 이미 지옥이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길은 살아 있는 중에 그것도 죄에 찌들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을 때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길 뿐입니다. 더럽고 추한 죄인이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완전히 발가벗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런데 정작 문제는 신자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날마다 생기는 문제입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왜 나를 몰라주시는가? 아예 관심을 끊으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부터 하지 않습니까? 불신자 시절의 잘못된 선입관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의 죄까지 다 아시는데 우리 어려운 형편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아니 마음속에 그런 의심과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아시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아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보일 반응은 영원토록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앞에 날마다 순간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그 놀랍고도 기이한 보혈의 은혜(Amazing Grace)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과연 무엇이관대 이토록 나를 관념하십니까?”라는 감사의 찬송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과(過)하거나 부족하면 참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 밖 불신자가 우리를 호박씨 깐다고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말보다,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선적인 신자라고 비난할 것을 더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11/2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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