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42:3-5 영혼과 생각의 이중주

조회 수 358 추천 수 7 2009.09.18 00: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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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생각의 이중주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3-5)


신자들이 성경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을 본다면 도저히 제대로 볼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산이 흔들리게 보이며, 한곳을 집중해서 볼 수 없으며, 순간적으로 힐끔 보고 지나치게 됩니다. 주마간산은 요즘 식으로 따지면 운전하면서 경치를 구경하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운전 같은 다른 일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깊이 묵상하지 않고 단순히 휙 한 번 읽고는 치워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쁜 성경읽기 습관은 뭔가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부분이 있어도 그 의미를 따져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데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구태여 따질 이유가 있는가? 아직 내 믿음이 약해서 그렇지 내 믿음이 자라면 더 잘 이해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혹 궁금해서 교회 안에 믿음이 좋다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면 똑 같은 시선으로 쳐다봅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여야 믿음이 자라는 법인데 믿음이 자라면 잘 이해될 것이라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는 본인도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런 성경적 무식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거나,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이 좋다고 오해하고 있거나, 믿음을 오직 현실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세 가지 잘못 중의 하나를 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신자가 당신의 말씀이 이해도 안 되고 심지어 의심이 생겼는데도 그냥 무조건 믿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곰곰이 따져서 제대로 이해해서 믿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나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을 왜 주셨겠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당신의 말씀인지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해하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약한 신자라도 간절히 기도하면서 묵상하면 성령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따져서 믿음이 자랄 수 있다면 역으로 말해 성경을 읽다가 이상한 부분을 잘 발견해 내는 신자가 오히려 믿음이 좋아질 가능성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에서 최소한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는데 혹시 그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는지요?

우선 기자는 아주 큰 고통에 빠져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로 누가 봐도 확연히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롱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 때 이 기자가 성전으로 인도하여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했던 동료 신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초신자가 가장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도대체 믿음이 그렇게 좋은데 어떻게 고난을 당할 수 있느냐고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상한 점은 소위 전도왕이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성도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심지어 일부 신자마저 잘 믿으면 고통이 없어지고 복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직 개인적인 안락과 현실의 형통을 구하기 위해서만 믿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피면 그 생각이 아주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믿음과 상관없이 고난을 주되 이왕이면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인도함을 받은 자는 인도한 자보다 아직 믿음이 적은 자입니다. 그런데도 그 믿음이 적은 자가 믿음이 좋은 자더러 네가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벌로 고난을 주지라고 비난하는 모순을 범한 것입니다. 그런 비난 자체가 잘못이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셈인데도 본인들은 못 깨닫고 있습니다. “저렇게 믿음이 좋은 자도 고난을 겪을 수 있다니 잘 믿는다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구나? 믿음 안에 뭔가 다른 본질이 있는가보다”라고 따져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주마간산 식 믿음이라 그렇습니다.

물론 아직 믿음이 적어서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그러나 비난하는 자들은 처음 성전에 인도함을 받았을 때에 정말 감격해서 인도자와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드렸습니다. 그럼 지금 현재 인도자가 겪는 고난의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도 같은 성도로서 서로 위로하고 함께 기도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치 자기들이 믿음이 더 좋아진 양 교만에 차 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기만 해도 다행일 텐데 오히려 어리석은 자들이 더 완악하기까지 합니다.  

이 시편 기자로선 현실의 고난에다 자기가 전도한 신자가 오히려 자기를 조롱하는 그야말로 심령이 찢어지는 고통마저 보태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억울한 고통을 허락한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아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될 정도로 주님께 그 이유를 따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의문문을 사용해서 역으로 부정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영혼이 낙망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신과 자기의 영혼을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을 마치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객체(客體)로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낙망과 불안 가운데 있어도 영혼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자기는 몰라도 영혼만은 하나님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현실적 여건과 나아가 그 정신 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더 깊은 내면의 영혼의 상태는 그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믿음에 혼선이 생겼지만 자신의 영혼은 위로와 평안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신령한 위로가 하늘로부터 와서 신자 안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의 영혼에 부어진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 참 위로와 평강이 임한 것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잠시 의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이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의 믿음과도 별도로, 아니 가장 먼저 그 영혼만은 당신의 품 안에서 아름답고도 깨끗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믿음의 강약 여부와 현실적 고난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즉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현실의 평안보다 영혼의 평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 그런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자신 같이 먼저 된 자의 고난이 하나님에게 필요한 소도구였음을 안 것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당신의 진리가 성도들에게 밝혀짐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본인도 그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나는 세 번째로 이상한 점은 기자가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선 여전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큰 정신적 상처를 받았고 현실의 고난에 대한 염려 또한 남아 있었지만 그 영혼만은 하나님을 바라며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가는데 현실의 고난이, 심지어 자신의 믿음이 보탬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단계를 넘어서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찬양하는 것보다 더 진보된 단계의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현실이 형통하거나 정신적으로 낙망과 염려가 없을 때는 쉽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어떤 위급한 형편에 처해 있어도 그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면 하나님은 위로와 평강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참 신자는 환난을 당해 정신이 낙망과 염려 가운데 있어도 그 영혼만은 하나님을 바라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정신과 영혼이 서로 다른 곡조로 이중주를 올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도무지 불가능해 보입니까? 영혼이 신자도 잘 알지 못하는 천상의 방언으로 노래 부르며 찬양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방이 완전히 막혀 도무지 절망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 그 영혼이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면, 쉽게 말해 주야로 눈물이 식물이 될 만큼 하나님을 갈망하면 주님의 사랑이 반드시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게 되는 마음의 평강이, 아니 그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갈증 자체가 바로 그분을 향한 찬양입니다. 애통한 심령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찬양입니다.

본 시편 기자는 영혼이 하나님을 바랄 때에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하필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어서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손의 도우심”이라야 고난이 없어질 것인데 아직 그런 도우심을 받기 전이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가기를 향해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만 우선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자기를 감싸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울한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오히려 그분이 더 통분해 하고 계시는 모습을 신자가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것입니다. 그분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분의 울음과 웃음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영혼이 주를 갈망하여 주의 얼굴을 영과 영으로 대면하게  되자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도 영혼은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고난에서 믿음에 혼선이 온 기자가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영혼은 찬양하며 더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 출발은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이 의심으로 그치면 불신앙으로 가지만 의심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갈 때에는 하나님은 반드시 찬양으로 되갚아 주십니다.  

성경을 주마간산 식으로 읽는다는 의미는 성경 통독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 생활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현실에서 갈등과 의심이 날 때마다 주님을 붙들고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고난이 생길 때만 하나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지는 당혹되고 덧붙여서 내 믿음이 약해지고 혹시 죄를 지었는지 불안해할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좋은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난 가운데 영혼이 주를 바라고 주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찬양한 적이 있습니까?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아 주님을 진심으로 갈망해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말해 고난을 당할 때에 내 억울한 형편만 주께 알려주려 애를 쓰기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정말 한 번이라도 제대로 헤아려 보려한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1/8/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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