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실족(失足)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73:1-3)
신자들이 기도할 때나 신앙 권면을 하는 중에 실족하지 않게 해달라는 말씀을 자주 하고 듣게 됩니다. 세상과 죄악과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실족’(失足)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실족이란 앞에 계단이 있는데도 사방이 캄캄해 볼 수 없거나, 대낮이라도 딴 생각하느라 보지 못해 헛디디는 것 같은 경우를 뜻합니다. 만약 정상인이 계단이 있는 줄 미리 알아서 조심해 걷는데도 헛디딘 것은 실족이 아니며 또 사실상 헛디딜 가능성도 없습니다. 신자는, 아니 상식과 양심이 제대로 살아 있는 일반인조차 죄악이 어떤 것인지, 세상과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 무당이 얼마나 사악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익히 잘 알거나 예상되는 잘못에 빠지는 것은 실족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사탄은 너무나 교묘하고 음흉하여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나타납니다. 정말 대낮에 완전히 딴 생각하느라 지갑이 땅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자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시기에 언젠가는 깨닫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자에게 죄악과 관련해 엄격한 의미에서 실족할 염려는 크게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별 것 아니라고 쉽게 간과하거나, 죄인 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의롭다고 확신하는 경우에 실족하는 일이 훨씬 자주 일어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왜 현실에서 의인은 고통 받고 도리어 악인은 형통하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불신자들도 그런 세상을 보고 불공평한 하나님이라 믿지 못하겠다고 반발합니다. 반면에 본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두고 실족한 것, 다른 말로 하나님께 죄 지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기자는 지금 악인이 형통하는 모순과 부조리 그 자체 즉 죄악을 두고 안타까이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악인이 형통하며 사는 모습을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잘 믿는 자기를 그런 자들보다 더 형통케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솔직히 자기도 세상에서 정말 번창하고 싶다는 소원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경 기자로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의 실족할 뻔했지 완전히 실족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질시는 잠시 뿐 곧 바로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기자는 지금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찰나에 불신자가 범하는 잘못에 빠질 뻔 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을 문제 삼는 것은 기독교나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비난이 아니라 자기를 형통케 해주는 하나님이라면 믿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런 것 같지 않으니까 스스로 이 땅의 형통만 추구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정한 공의에 대해 의아해 했습니다. 선악을 가름하는 그분의 완전한 통치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선지자의 거창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너무 심오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앞뒤 문맥상 아무리 세상에서 죄인이 형통하는 것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 굽지 않는다고 믿는 자가 의인 즉, 진정한 신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악인이 왜 형통하는지 묻는 질문이 정말로 죄악이 싫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도 악인처럼 형통하고 싶은 질투심에서 그러는 것인지로 의인과 악인의 기준이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아무리 신자라도 사실상 악인과 동류라는 것입니다. 그런 질시가 들 때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성행하는 악은 때가 되면, 당장 현실이 아니라면 영원한 형벌로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여 바로잡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기가 현실적 괴로움을 당해도 때가 되면, 당장 현실이 아니라면 영원한 복락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하여 바로잡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공의와 사랑은 이 땅에서나 죽음 이후에서나 절대 결핍하지 않고 완전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므로 신자가 일생을 사는 동안에 진정한 소망을 두어야 할 곳은 영원한 천국이어야 합니다. 악인이 아무리 형통을 해도 이미 그 앞에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운명이 판가름 났습니다. 그들을 질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하루 빨리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오기를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신자의 실족의 참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악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질시하는 것입니다. 죄악과 부조리를 진정으로 안타깝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세상 쾌락을 즐기는 자들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저주하고 죄인은 긍휼히 여겼습니다. 신자가 그 반대로 죄는 미워하지 않고 죄인을 부러워한다면 그만큼 큰 실족이 없습니다.
물론 신자라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대로 현실의 형통을 부지불식간에 부러워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럴 때마다 불신자는 자기도 논을 더 많이 사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논을 다 팔아치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논의 많고 적음으로 자기의 가치마저 많고 적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에 그분 안에서 자신의 가치는 완전히 고귀해졌습니다.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고 그분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세상의 형통만 구하는 자는 신자도 아니며 믿음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거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믿음은 전혀 별개로 너무나 마땅하고 좋은 믿음입니다.
신자들이 상식으로도 알 수 있는 죄악에 대해 실족하지 않도록 간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앞에 계단을 빤히 볼 수 있고 다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고 정신도 말짱한데 아무래도 넘어질 것 같으니 잘 붙들어 달라는 뜻입니다. 넘어질 것을 스스로 미리 가정한 셈입니다. 남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니까 재미있어 보여 자기도 괜히 넘어지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오만한 자를 질시한 것입니다. 실족하지 않게 간구하는 그 자체가 자칫 실족한 상태에 이미 빠졌거나 빠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실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악에 빠져 있거나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증상에 계속 시달리고 있지 않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신자라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플 수 있지만 거의 실족할 뻔했다는 순간적 해프닝으로 그쳐야 합니다. 바꿔 말해 일생의 소망이 진정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지 날마다 순간마다 점검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 증상이 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6/5/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