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84:5,6 꼭 연단을 거쳐야만 성장하는가?

조회 수 392 추천 수 11 2009.09.18 01: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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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연단을 거쳐야만 성장하는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 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84:5,6)


복숭아보다 더 귀한 인간

복숭아 과수원을 경영하는 한 젊은 신자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 통보 없이 교회에 결석하기 시작했다. 담임 목사가 심방을 가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복숭아 수확철에 갑자기 서리가 내려 올해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복숭아가 썩도록 내버려 둘만큼 저에게 관심이 없는 하나님에게 예배드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제는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

그래서 목사님이 진지하게 권면했다. "하나님은 복숭아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신다. 그분은 때 이르게 서리가 내리면 복숭아가 썩는다는 것을 잘 아실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서리가 내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도 아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복숭아를 잘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당신을 훌륭하게 성장시키려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시련도 허락하신 것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몇 번씩은 겪었던 혹은 겪었을 뻔 한 일이며 또 그럴 때마다 목사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권면의 말씀이다. 한 마디로 신자는 복숭아보다 더 귀하기에 하나님은 연단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거치는 가장 전형적인 시험이며 또 그에 정확하게 맞는 성경적 해답이다. 오히려 너무 도식적이라 이제는 신자들이 목사가 어떤 말로 위로할 것인지 미리 알아맞출 수 있을 정도다.

말하자면 신자들은 그런 시험에 들고 있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고 목사의 권면이 정답인 것에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도 파악하고 그 정답도 나왔다면 그 시험에서 바로 빠져 나와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해야 하는데도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한일이 아닌가?

물론 사람이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만으로 당장행동에 쉽게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벌써 세상은 낙원으로 변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도 이미 하나님에게 품었던 서운한 감정이 해결되지 않았고, 게을러지려는 습성도 있고, 여전히 하나님과 반대편을 향하려는 죄악 된 본성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으로만 신자가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도를 병행해 성령의 씻음과 치유의 간섭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주 믿음이 좋아 보이는 신자도 때에 따라 기도할 의욕과 힘마저 나지 않을 수 있다. 단순히 열심이나 의지력의 부족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여전히 신자에게는 풀리지 않는 마지막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꼭 연단을 통해서만 신자를 성숙시키려 하시는가? 그 방법 외에 신자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얼마든지 스스로 잘 할 수 있는데…"

욥이 아무 죄 없이 고통에 처해졌을 때에 하나님께 끝까지 그 이유라도 좀 가르쳐달라고 떼를 쓴 것과 동일한 의문과 불만이 오늘 날 우리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한 머리로는 하나님이 결국은 나에게 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려 이런 힘든 일을 겪게 하는가 보다 인정은 하면서도 가슴과 몸은 쉽게 따라 나서지 않게 된다.

신앙의 본질

신앙이란 인간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더 얻어내려는 싸움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인간더러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게 하려는 그분의 끊임없는 간섭이다. 신앙의 과정도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적 주권 하에 있다. 그래서 그분의 간섭을 감사함으로 얼마나 잘 받느냐가 신앙이지 내가 능동적으로 얼마나 잘 믿는냐는 그분의 은혜를 받고 난 후의 온당한 반응일 뿐이다.

복숭아 농장 주인은 복숭아보다 자기를 몰라주는 것 같은 하나님에게 마음이 상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기대나 예상보다 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에게 한 권면은 "당신에 대한 관심은 복숭아에 대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어려운 일도 다 당신을 사랑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정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로선 왜 꼭 그런 방법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안 풀린 것이다. 솔직히 하나님이 복숭아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이야기 아닌가? 천지를 인간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니까 더 사랑한다면 더 사랑한 표시가 나타나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니까 불만이다.

그래서 대다수 신자가 평생을 붙들고 있는, 사실은 허비하고 있는 신앙의 싸움은 이것이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다면서요.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저 또한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조금만 더 저에게 관심을 나타내 보여주면 안 됩니까? 그럼 저도 정말 흔들림 없이 어떤 경우도 더 사랑할 텐데요. 관심을 더 나타내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고통을 주시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제 사랑마저 흔들리지 않습니까?"

신앙이 인간이 하나님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싸움이라고 해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자, 목사, 선교사가 되어 당신의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에 대해 딱 한 가지만을 제대로 알아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진리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조금이라도 알아 나가는 것, 아니 그분의 품 안에 있는 것만이라도 바로 선의 근본이며 나아가 인간이 선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선(善)"을 도덕적으로 착한 일로만 제한해선 안 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좋은 것, 즉 기쁨, 자유, 평안, 위로, 평강, 능력, 행복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이다. 그 중에는 도덕적인 선과 나아가 현실적 축복도 당연히 포함된다. 세상만사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 하신 일 모두가 선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아나가기 위해 매일매일 그분 앞으로 한발자국씩 다가가야 한다. 그분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왜 나에게 더 관심을 안 가져주느냐는 문제가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선 절대로 그 사랑을 잴 수조차 없다.

관심의 크기를 재려면 최소한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있고 그것도 어느 면으로나 유용할 정도의 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잴수 있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거나 있어도 쥐꼬리만큼도 안 될 것 같으면 재어볼 엄두조차 생기지 않는다. 연애할 때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얼마나 좋아할까를 자꾸 재어보려 들지만,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거나 보아도 건성으로 쳐다본다면 그 크기를 재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그저 어떡하든 그의 눈길에 한 번이라도 들어 보려고 애를 쓸 뿐이다.

삶이 매일 똑 같다면?

한번 가정해보라. 만약 인생살이가 평안하든 고되든 상관없이 매일 똑 같다면 과연 인간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자연 재해가 없이 날씨가 365일 평탄하여서 죄도 없이 돌발적이고도 억울해 보이는 죽음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찾겠는가?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번갈아 주시면서 풍년과 흉년을 그분의 주권으로만 조정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 힘만으로 살 수 없으며 이 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신자는 이미 하나님을 찾았고 믿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자 완전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완전하며 선하다"라는 진리를 확실히 붙들고 있지 않다. 하나님으로선 아직도 당신에 대한 관심을 더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품성 알아맞추기 시험을 보아 그 점수를 올리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만 선이 오기 때문에 인간더러 언제 어디서나 더 크고 풍성한 선을 누리라는 것이다.

이 진리를 놓치면 솔직히 이 세상을 살아감에 신자만큼 억울한 자도 없다. 도저히 불공평해서 살지 못한다. 현실에선 손해봐가며 성실하게 살았고 교회에선 정말 열심히 주님을 섬겼는데도 그러지 못한 악인이 더 형통하고 있다. 당장 눈에 닥친 현실과 하나님의 사랑 간에 생긴 괴리를 메우지 못해 의심과 불평이 끊일 새 없다. 그 불만을 종교적 행사나 신념으로만 누르려 해선 오히려 속으로 골병이 도질 수도 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마저 오해 하게 된다. "제가 아무 자격이 되지 않았을 때에 오히려 그 반대일 때도 당신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저를 사랑했다면 왜 지금은 이렇게 힘들게만 하십니까? 무조건적이고 무한하신 긍휼은 어디에 갔습니까? 지금은 당신의 관심을 받아야 할만큼 어느 정도 조건과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절대 스스로는 의롭고 선해질 수 없기 때문이었지 않는가? 당신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오는 인간의 선은, 또 다시 선행만이 아니라 참 행복을 추구하려는 모든 의로운 노력을 의미함, 어디까지나 인간적, 상대적 선으로 불완전할 뿐이다. 그래서 이제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선으로 인간을 이끄시겠다는 뜻이었다.

그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이 보일 반응은 오직 벌거벗고 엎드려 항복하는 길 뿐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에 대한 관심은 너무나 완벽해 단 한 치의 오류, 조종, 가식, 위선이 없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당연히 지금까지 스스로 선을 추구하려 했던 모든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한 마디로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그래서 모든 선한 것이 오직 당신께로만 나온다는 것을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서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항복해 놓고는 왜 또 다시 그 항복을 수정 내지 철회하려는가?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거나 없다고 의심하고 불평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당신을 알게 해 주시고,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고, 우주의 주인을 감히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게 해주셨는데도 말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당신께서 성령님으로 신자의 속에 영원토록 좌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그래서 가장 큰 이유는 당신에게 더 관심을 가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분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따지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있는가 물을 자격과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이미 십자가의 예수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이유는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제대로 이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신자더러 그런 일도 하나님의 절대적 선임을 의심치 않을 믿음이 있는가부터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이 하신 일에는 악한 의도라고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는가를 따져 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방법 말고는 신자가 하나님에게 갖는 관심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테스트 해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겠는가?"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신자가 환난조차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는 절대적 선(善)임을 확신하기 전에는 환난은 끝까지 환난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시작한 것조차 아니다. 신자에겐 이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반면에 하나님이 언제나 완전한 선임을 확신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 환난이 신자의 행복이자 축복임을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비로소 환난이 소망으로 변하고 인내할 힘이 생기며, 나아가 환난 자체를 기뻐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 어떤 형편에서나 완전한 선이다라는 것에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눈물 골짜기를 통행할 때에, 아직 그 골짜기를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바로 그곳이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른 비가 비록 복숭아는 썩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자신은 더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 있음을 확신하여 환난 중에 찬양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영원무궁토록 신실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꾸 확인하는 것이다. 신자더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게 해 주시는 이도 그분이시다. 그런 사랑을 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하나님이 사랑을 더 많이 부어 주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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