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으로 둘러싸이는 축복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열방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도 행치 아니하였느니라.”(겔5:5,6)
하나님이 유다를 1/3은 온역과 기근으로, 또 1/3은 전쟁으로, 나머지 1/3은 사방으로 흩는 벌을 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당신의 율법을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거스리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지키지 않는다는 뜻 외에 ‘바꾸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노골적으로 반역했을 뿐 아니라 자기들 생각대로 변경 해석하고 심지어 다른 이방의 규례로 대체했던 것입니다. 또 요란하다는 말은 소리를 크게 낸다는 뜻 외에 ‘무리’나 ‘많음’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가증한 악을 행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잘못을 지적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 민족 전체가 고의로 온갖 죄악을 즐기면서 자행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방인의 규례대로도 행치 아니했다고 합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표현입니다. 우선 도덕적으로 이방인보다 더 악했던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섬기되 이방인이 자기들 신을 섬기는 정성과 열심보다도 못했습니다. 나아가 이방의 우상 신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놓고 섬기되 이방인보다 더 음란하게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선 치가 떨릴 정도의 배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솔직히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 도덕적으로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방인들은 최소한 자기들 신을 배반하지는 않습니다. 소멸하는 불로 당장에 유다를 멸절시키지 않는 것만도 하나님으로선 최대한의 인내와 긍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대로 유다로서도 물론 할 말은 있었습니다. 열방의 침공을 계속 당할 뿐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잘 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들을 섬기면 그들처럼 현실적으로 형통해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저히 여호와를 배반할 수는 없어서 여호와도 믿고 그들 신도 믿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스로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다가 핑계로 삼은 바로 그 이유를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이 심판하는 근거라고 합니다. 즉 유다는 이방에 둘러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갔지 않느냐고 변명하는데 반해, 하나님은 이방에 둘러 있게 한 목적이 바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도 그렇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미 확실히 약속했습니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출23:24,25) 사방에 이방에 둘러싸여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 그러면 절대 현실적으로도 핍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단순히 핍절하지 않는 것에 자족하지 못하고 더 풍요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면 더 흥해야 하는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지 않기에 흥하고 있는 이방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먼 옛날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비록 우리는 유다처럼 내놓고 다른 신을 섬기지는 않아도 또 불신자보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은 해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더 형통하는 것이 부럽고 시샘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항상 품고 있는 불만도 잘 믿고 있는데 뭔가 그에 비례하는 보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신자들이 크게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빛과 소금으로 살면 하나님이 더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으로 둘러싸이게 했으니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이방에 둘러 싸여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빛이 아니라 흑암이기에 신자는 가는 곳마다 자동적으로 흑암으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구태여 하나님이 힘들게 고생해보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흑암 가운데도 빛으로 살면 더 보상을 해준다는 의미는 따로 없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흑암이 죽기보다 너무나 싫어서 이제는 빛으로만 살겠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된 신분과 의미만으로 그 후의 평생은 필연적으로 항상 흑암이 둘러싸게 됩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를 지으며 현실에서 풍요롭게 사느니 차라리 굶어죽더라도 하나님만 따르며 죄를 짓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 신자이지 않습니까?
스스로 흑암은 너무 싫고 빛이 너무 좋아 빛 가운데만 살겠다고 해놓고 빛에 살고 있으니 보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굶어죽더라도 하나님만 따르겠다고 한 자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재물만 모으는 자가 더 부러워져서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됩니다.
왜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핍박받는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그에 대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으로 살면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신자는 신자된 것으로 이미 받을 복은 다 받았는데,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흑암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가 누릴 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받을 복이 잘 믿어도 가끔 환난이 생길 수 있지만 믿음으로 이겨내어 상 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세상 대적으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지금 당신은 고난으로 둘러싸인 것을 오히려 축복이라고 여겨집니까? 세상 사람이 형통하고 자신은 그보다 훨씬 못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모르고 나는 그분을 소유하고 있기에 더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합니까? 최소한 그들이 그리 부럽지 않다고 자신할 수는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자가 아니거나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우습게 알아 그분의 당면한 심판을 시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6/2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