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가장 중요한 소명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단1:8,12,13)
대부분의 신자들이 소명이라면 종교적으로 어떤 큰일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전도를 하거나, 선교사로 가거나,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거나,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섬기는 등 하나님을 위하여 또는 대신해 일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보냄 받았기에 사나 죽으나 자신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보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세상 사람들로 목도케 해야 합니다. 물론 예를 든 종교적 일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지만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가 증거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 체계와 교리를 소개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자가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는 삶이 그러지 못한 삶과 비교해서 얼마나 의롭고 참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지를 불신자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배제한 채 그분을 거역하여 흐르는 세상의 풍조, 사상, 철학, 관습, 유행, 등에 신자는 반드시 반대되거나 초월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가장 근본적이고도 큰 소명입니다. 예배, 전도, 선교, 성경공부, 기도, 구제, 교제 등에 그런 모습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단순히 종교적 행사를 한 것뿐이지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격적 체험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아나가야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당연히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할 테니까 신자는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동적으로 그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컨대 부정부패, 우상 숭배, 동성애, 낙태, 인간 복제 등에 과감히 맞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체계와 그 운행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만홀히 여김을 받는 일이나,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부정하고 거역하는 일 앞에 하나님의 진리를 들고 가로막아 서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일 성수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일차적 소명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 시간에 골프나 여행 같은 세상적 유흥을 즐기지만 신자는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속해서 살고 있는 시공간의 창조자이자 주인이기에 일주일 내내 이뤄지는 삶의 모든 부분이 그분의 것임을 고백하는 표시입니다. 일주일 중 하루 만이라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자기 죄를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었음을 철저하게 깨달았다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구원 이후의 삶에서도 매순간 풍성하게 체험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의 높으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이런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과 자신은 물질에서 우연히 생긴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자기 주먹을 믿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던 죄인이라는 인식이 들 리가 없습니다. 윤리적 죄는 수행하여 고쳐나가면 된다고 믿습니다.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자기이므로 일주일에 따로 하루를 빼서 유흥과 안락의 목적 외에 허송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것도 자기 가족이나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본다는 것은 너무나 웃기는 짓이라고 여깁니다. 신자는 하나님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주일 예배를 드린 다음 주간에 평강과 자유가 넘치며 의롭게 사는 모습을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경우 그렇게 하나님을 증거한 가장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바벨론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야채와 물만 먹겠다고 환관장에게 선언했습니다. 진미와 포도주는 악하고 야채와 물은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에 바쳐진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마시면 우상숭배에 동참하고 사단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바벨론 왕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경배하지 말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위반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가 내려졌음을 알고도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창문을 연채 그렇게 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참 하나님을 거역하는 흐름에 항거했습니다.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도 단순히 무엇이 더 건강에 유익한지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우상 숭배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왕의 진미를 먹은 자와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처분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만약 다니엘이 얼굴이 초췌해지면 환관장이 관리 책임을 소홀히 한 죄로 크게 혼나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달아날 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히 다니엘에게 그 일을 허락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9절)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환관장의 마음을 다니엘의 요구를 허락해줄 만큼 담대하게 변화시켜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간섭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의 말미 후에 만약 자기 얼굴에 빛이 나지 않으면 자신이 왕에게 이실직고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확실히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온전한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당신의 진리를 품고 세상, 죄악, 사단 앞에 당당하게 맞서는 그에게 하나님은 그것들이 절대 대적하지 못하도록 당신의 권세로 덧입혀 주셨던 것입니다.
신자가 기독교적인 큰일을 이루면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도 세상의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그 가르침과 유익은 다른 종교와 유사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로선 아무리 큰일을 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 내의 행사를 했다는 차원으로만 이해합니다.
반면에 신자가 그들과 전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우선 호기심을 갖습니다. 겉으로 무시하고 비방할지 몰라도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러다 자기들이 전혀 갖지 못하는 유익을 발견하면 호기심이 관심으로 변합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씩 둘씩 쌓이면 자기도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흥미가 생깁니다. 신자가 불신자로 최소한 이 자리까지 이르도록 해야만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증거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사단에 미혹된 불쌍한 영혼들에게 십자가의 진리가 얼마나 귀한지 증거하고 있습니까? 요컨대 세상 사람의 99.9%가 따르는 흐름이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반대 된다면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까?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좁고 협착한 길을 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큰일을 해도 그분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7/1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