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과 우리의 극명한 차이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단9:12)
목숨을 걸고서 주께만 충성하여 이방에서 여호와를 증거한 다니엘의 생애는 정말로 우리가 본 받아야할 귀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위대성을 그의 굳건한 믿음과 신령한 기도에서만 찾으려 듭니다. 그가 곧바로 죽을 줄을 알고도 믿음을 지키며 조국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부터도 막상 그와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과연 사자 굴에 스스로 머리를 밀어 넣을 수 있을지는 끝까지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믿음을 온전히 본받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괜히 구호로만 그치고 실현도 못할 일은 말 안하느니 못한 것은 아닐까요? 물론 당장 실현불가능해도 그런 목표로라도 정해서 조금씩 노력해야지 미리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그를 닮으려 노력은 하되 그 굳건한 믿음의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 사장에게 순종, 충성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순종, 충성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데 그러지 않을 바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회사 사장보다 못한 존재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주관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찌 순종, 충성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비유가 믿음의 근거로서 너무 평범한 설명이라고 무시해선 안 됩니다. 아무리 평범해도 가장 정확한 설명입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많은 신자가 그분께 온전히 순종, 충성하지 않을 만큼 죄에 찌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정, 도적, 간음, 살인을 일삼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일날만 교회 출석함으로써 내 처지에선 적당할(?) 정도로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벌은 안주시겠지 스스로 안도 내지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위로가 현재 즐기는 세상 쾌락에서 빠져 나올 의도가 전혀 없음에 대한 핑계도 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인 이유는 또 따로 있습니다. 회사 사장은 당장 손에 잡히는 현찰을 주는 위대한(?) 분이지만, 하나님은 기도 응답 받아본 기억이 아마득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하늘에 있는 생판 남 같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첫째 이유가 현실의 축복 때문일 뿐입니다.
다니엘이 우리와 다른 위대성은 하나님 그분을 더 깊이 정확히 알았다는데 있습니다. 또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분께 충성,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마음 속 깊은 심령에서부터 진정한 경외심이 우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바로 본문이 그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예루살렘에 큰 재앙을 내려 벌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큰일이었다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당신께 불순종하며 우상숭배를 하고 죄악으로 타락했기에 포로로 잡혀가게 만드셨기에, 요컨대 큰 벌을 주셨기에 그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이런 신은 상천하지에 없고 또 이런 일도 전무후무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이런 고백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 수십 년 동안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섬겼던 봉사 경력이 곧바로 우리 믿음의 실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고백도 없으면서도 그의 믿음과 기도를, 그것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본받으려는 우리가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물론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이니까"(출15:11) 문제는 출애굽 후에는 모든 백성이 홍해를 건너자마자 이런 찬송을 기꺼이 또 즐거이 불렀지만 징계로 받은 재앙을 두고 동일한 고백을 한 자는 다니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빤히 알고도 평소처럼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받고 있는 재앙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절감했고 나아가 그 때문에라도 그분을 더 진정으로 경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들 죄는 당연히 그분의 심판 감이며 죽음으로도 그 죄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죽음으로라도 자기와 민족의 죄를 갚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여호와가 이 일로 자기를 죽게 만드셔도 그분께는 하등 잘못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일로 인해 그분의 영광은 더 높아진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 분 품 안에선 사나 죽으나, 아무리 세상 사람들 앞에 후패해져도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죽을 줄 알고도 "감사하면서"(6:10)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진짜로 기꺼이 감사하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기록이 얼마나 정미한지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는 어떤 자였습니까?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루에 세 번씩 그쪽을 바라보며 창문을 열어놓고 뜨겁게 기도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에 이런 큰 재앙을 내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너무나 거룩하신 위대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그처럼 제대로 실감하십니까? 또 다니엘의 우리와 다른 위대함을 이제 조금 이해되십니까?
우리는 잘 봐주어야 이스라엘 백성 정도밖에 안 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으로 현실 문제가 해결되면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합니다. 감사 헌금도 과분할 정도로 두둑이 냅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힘들면 어떤 불평이 입술에 절로 맺힙니까? "제가 전 번에 감사헌금도 얼마나 많이 냈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재앙은 또 왠 까닭입니까? 그 동안에도 제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충성했습니까? 왜 내 믿음과 진심을 몰라줍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잘 모르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누가 누구를 모릅니까? 하나님이 과연 그러할까요? 기도할 때마다 입술로는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 침 삼킬 동안도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하나님,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정말 침이 마르도록 그분을 칭송해놓고는 조금만 힘들면 그냥 왜 나를 모르느냐고 따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그럴 줄을 너무나 잘 아시니까 조금 힘든 일을 진짜로 시험 삼아 우리에게 허락해 보인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이 기대(?) 아니 알고 계신대로 우리는 그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간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나, 여전히 너희는 떡으로만 살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도 너희는 내가 너희를 몰라준다는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네.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하고도 말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러고도 뜨겁게 금식하면서 기도했는데도 왜 다니엘 같은 기적을, 아니 그 반 정도만 되는 기적을 안 일으켜 준다고 투덜거릴 수 있겠니?"
"주께서 내게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주께서 내게 하신 말씀을 이루셨으니 내 인생에 이만큼 크게 복되고 은혜로운 일이 없으며 또 하나님 같이 위대한 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저의 모든 감사와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언제 어디서 아무리 힘든 환난을 만나도 이 고백이 없이는, 아무리 다니엘의 믿음과 기도를 본받으려 해야 헛수고이지 않겠습니까?
3/5/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