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7:1-4 찬양의 마약에 빠진 신자들

조회 수 474 추천 수 4 2009.10.26 00: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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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마약에 빠진 신자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1-4)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1953년에 초등정하여 세인들 사이에 위대한 산악인으로만 존경받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에서 내려 온 후에 50년간 히말라야 고산족들을 위해서 학교와 다리 등을 지어주었습니다. 사실은 그의 생애는 최고 높은 산을 오른 한 번의 영웅적 행위보다는 산 밑에서 한 꾸준한 봉사 활동으로 더 위대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들도 지금 생전 처음 보는 너무나 신기하고 장엄한 광경 앞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을 천상의 위대한 영웅으로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내려가지 말자고 했지만 예수님으로선 산 밑에 내려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로선 변화산 상의 장엄했던 광경을 어렴풋이 상상만 하지 구체적으로 짐작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느꼈던 감정과 그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뱉어져 나온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정도에선 비교할 수 없지만 그나마 비슷한 경우를 우리도 가끔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뜨거운 찬양 집회에 가면, 말씀과 기도로 가슴 가득 은혜가 차면, 또 성도 간에 아름다운 나눔과 섬김의 장이 펼쳐지면 더 이상 현실의 다른 것으로 그 감동을 방해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예수 믿는 최고의 기쁨과 보람이 바로 이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산 위에서만 계속 머무르고 싶습니다. 산 밑으로 돌아가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요청에 일언반구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요청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옳은지 나쁜지 아무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간접적인 대답만 받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빛과 구름 속에서 바로 나와 묵묵히 산 밑으로 내려온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은 기쁨이 정말 이런 것이라고 여길 정도의 감격과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신자에게 평생은 좀 그렇다 치고라도 좀 더 길게 허락해주시면 어디 덧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신자가 최고로 잘 되는 것인데 신자가 지금 최고로 좋다고 하는데 왜 당장 그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더러도 힐러리 경처럼 평생을 산 밑에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짜로 신자가 가장 잘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꼭 봉사의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산 위가 최고 기쁨이고 산 밑은 기쁨이 아니라고 보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기쁨은 고통과 환난이 없는 것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산 위에 있으니 산 밑의 골치 아프고 복잡한 것에서 해방됩니다. 정말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있으니 서로 속을 전혀 안 썩입니다. 그야말로 문제가 없는 순간만 이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참 기쁨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비록 수난의 종으로 오셨지만 과연 그 본인은 수난만 받고서 생애를 마감한 것입니까? 즉, 당신께서 당신의 3년 생애를 스스로 평가할 때에 수난으로만 일관된 삶이었다고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기쁨과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하겠습니까? 말하자면 지금 산 위에서 초막 짓고 계속 있는 것과 산 밑에 내려가 사람들로부터 수난 받는 것과 어느 것을 더 참 기쁨으로 여겼을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참 기쁨은 환난과 문제만 피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과 문제 중에 참 기쁨이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환난과 문제를 믿음으로 잘 인내하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과 은혜를 베푼다고 여기면 동일한 착오입니다. 여전히 환난과 문제가 없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만약 그런 기쁨만 허락한다면 신자로 기쁨을 더 크게 느끼게 하려는 계산된 목적 밖에 없습니다. 큰 슬픔과 아픔이 있어야 그 후에 오는 기쁨이 더 진정하고 큰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시쳇말로 “병 주고 약 주고”입니다. 그럼 솔직히 기쁨을 더 잘 느끼게 하는 훈련을 시킨 것밖에 더 됩니까?

성경이 신자에게 약속하는 기쁨은 속에서 샘솟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참 기쁨은 신자의 영혼 속에서 영원토록 목마르지 아니하도록 솟아나야 합니다. 또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으려면 환난과 문제 중에서도 당연히 목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서있는 데서 오는 중단 없는 기쁨입니다.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目前)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그는 분명히 원수의 눈앞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상을 받았는데 쉽게 생각하듯이 상(Reward, 賞)이 아니라 상(Table, 床)입니다. 즉 대적을 망하게 해서 구원 받은 은혜가 아니라 그런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 당신과 갖는 인격적 교제 때문에 잔이 넘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산 밑의 생활 그 자체가 기쁘고 보람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산 위의 기쁨보다 더 기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신자더러 너희가 신자가 되었으니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참 신자가 먼저 되면 당연히 봉사를 통해 인생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보장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가 언제 어디서든 심지어 원수의 목전에서도 잔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넘치는 은혜로 인해 봉사를 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자원해서 그분의 마음과 심장을 갖고 하는 봉사라 봉사 자체에도 은혜가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는 완전히 변화산 상에서 초막을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나마 초막을 짓고 있으면 다행이려만 궁궐을 누가 더 거창하게 짓는가 시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궁궐 속에서 기도와 말씀과 찬양에 파 묻혀 지상 최고(?)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진통제 같이 일시적으로 고통과 환난을 잊어버리게만 하니 탈입니다. 진통제가 과해서 이젠 마약의 수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진통제나 마약은 계속 복용하지 않으면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자꾸 교회에만 더 모이게 마련입니다.

그런 현상을 두고 그 많은 헌금을 교회 치장에 쓰고 교인들끼리만 좋아 한다고 비평합니다. 말하자면 산 밑에 내려와 봉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잘못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가 참 기쁨을 교인들에게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  밑의 생활이 더 큰 기쁨이라고 여기지 않는데 어찌 산 밑으로 내려가겠습니까?

참 기쁨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의무와 책임으로 하는 봉사는 하나마나입니다. 하나님도 모든 신자를 거창하게 자선사업가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참 신자가 되어 자기가 속한 어느 곳에서나 빛과 소금의 역할만 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봉사를 안 하는 것보다 참 기쁨을 몰라서 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종된 것입니다. 참 기쁨을 진정 안다면 산 위에서 초막 아니 궁궐이나 짓고 있겠습니까?

신자의 참 기쁨은 오직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내 영혼이 그분의 은혜로 소생되어 내 마음에 그분의 마음으로 채우는 기쁨입니다. 그분이 기뻐할 때에 신자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아직도 원수의 목전에 서 있는 중에 나아가 환난과 문제가 더 겹치더라도 그분이 나의 주시기에 내 잔이 넘칠 수 있어야 합니다. 환난과 문제 자체 혹은 그 와중에서 은혜와 기쁨을 발견할 줄 모르면 참 기쁨은 영영 맛보지 못합니다.

또 그래서 나보다 더 못하거나 똑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그 넘치는 은혜를 나눠주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그중에도 예수를 몰라 어둠 속에 헤매는 영혼에게 그분의 빛을 비추어 생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또 그 새롭게 변화된 자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 주위에 나누는 자리에 까지 가는 것을 함께 이루고 곁에서 지켜보는 기쁨이 가장 큽니다. 산 밑이 아니고는 도저히 맛 볼 수조차 없는 기쁨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은 절대로 진통제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그것에 취해서 정말 “주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며 평생토록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그것에 묶여버릴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마약의 단계까지 갈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찬양 등은 절대로 진통제, 마약, 심지어 치료제도 아닙니다. 단지 보약일 뿐입니다. 어떤 환난과 문제 가운데서도 신자를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가고자 하는 소망과 힘이 되살아나게 하는 보약입니다.

여러분은 전도, 구제, 선행, 기도, 말씀, 찬양, 경배 모든 신앙 행위를 어떤 의미로 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 가운데 최고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속에서 샘솟는 기쁨을 영원토록 준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24시간 찬양 테프를 틀고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자는 주님과, 또 주위 사람과의 관계를 항상 십자가를 통해서만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힘든 환경과 문제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가 있기에 실제로 기뻐서 봉사하고 봉사 자체의 기쁨까지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결코 신자가 공적과 선행을 쌓은 후에 상을 받아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참 기쁨을 익히 알고 계속 누려본 체험이 있는 자가 자꾸 그 참 기쁨을 맛보려는 열정과 소망이 솟아나고 또 실제로 그 기쁨을 누리고 나누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산 위에 있습니까? 산 밑에 있습니까? 산 밑에 있는 것도 두 종류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보지도 못해선 안 됩니다. 산 위에 올라갔다가 반드시 다시 내려 와야만 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신비하고 장엄한 여기가 좋습니까?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흑암의 세력이 붙들고 있는 거기가 좋습니까? 당연히 후자가 되어야 참 기쁨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8/2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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