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3:13 천의 얼굴을 가져야만 하는 신자.

조회 수 385 추천 수 6 2013.01.04 19: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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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져야만 하는 신자.


화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의만,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랑하려 들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야단맞은 것은 자업자득이었습니다. 문제는 천국에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외식함으로써 그들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처럼 외식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선 물론 사람들 앞에서도 결코 외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외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선 위선(hypocrisy)으로도 번역되는데, 고대 희랍의 연극배우가 맡은 역할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는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어원으로 따지면 외식은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정황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말(사실은 한자말)로 위선(僞善)과 외식(外飾)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내면은 악하고 거짓인데도 겉으로만 선하고 진실한 척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외식은 위선은 위선이되 경우에 따라 위선의 방식을 교묘하게 변모시켜 천의 얼굴을 갖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 앞에 외식하지 않고 하나의 얼굴만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의 얼굴로 서는 것은 시종일관 굳건한 믿음과 헌신을 보이기보다, 자기 있는 그대로 전혀 숨기지 않고 서는 것입니다. 외식이 위선의 의미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절대 위선을 떨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참고 - 말씀단상 사이트 #781 “신자 된 가장 근본은?”) 그럼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허물, 잘못, 비밀을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야 합니까?

본문을 다시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 변화무쌍하게 여러 가지 얼굴로 변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가지 얼굴로만 사람들을 대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얼굴에 변화가 심했다면 사람들이 도무지 그들을 믿을 수 없어서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함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분명 대중이 그들을 추종, 지지, 최소한 호응은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여서 선하고 의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잘 유지했던 것입니다.

쉽게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최근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가 불신자가 봐도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일을 하면서도 담임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는 아주 좋지 않습니까? 또 그들에게 종교적 도덕적으로 유별난 하자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스로는 아주 의롭다고 자부합니다. 인간적 방식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말고는 큰 흠이 없습니다.  

신자가 사람 앞에 하나의 얼굴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의 얼굴로 대하되 인간적 얼굴이 아니라 신적인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과 위엄을 가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적 권세라면 더더욱 인위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찬양과 기도를 뜨겁게 하여 어떤 초자연적 절정을 맛본 표정으로만 지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 임재하신 그리스도라는 보배의 광채가 겉으로 자연히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속에 임재하신 예수님의 광채를 세상 사람들 앞에 반사하며 살아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말과 행동은 생각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둘은 일부러 틀리게끔 노력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일치될 수밖에 없습니다. 속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은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의로 가장, 과장, 변장하려면 더 힘든 법입니다. 그것은 사기꾼입니다. 매번 일관성 있게 사기 치려면 너무 힘이 들어 보통 사람은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일부러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행동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하고 믿는바 대로 행한 것이며 또 그 생각과 믿는 바에 동조하는 자들이 그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 앞에 구태여 신자 된 표시를 내거나 그리스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말과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짓은 금방 본색이 드러나기에 그 효력이 절대 오래가지 못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일부러 거짓되게 산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내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로 타락된 영혼이 자꾸만 자신의 실체와 달리 겉모습을 과장, 가장, 변장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신자의 체면에 손상 가지 않으려고 속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우선 급하게 겉만 바꾸려드는 경향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날마다 자기 내면부터 부인하며 모든 잘못과 허물을 주님께 먼저 용서 받아야 합니다. 위선과 외식은 당연하고 인간적인 허례, 고집, 편견, 선입관, 사상, 철학, 교만, 의, 등등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다 깨트려야만 합니다. 그분의 광채를 가리는 모든 것이 사라져야만 그 광채가 온전히 비춰질 것 아닙니까?

이 부분에서 주지해야 할 사항은 자신이 아무리 깨어진다고 해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수아비로 전락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지정의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죄와 허물과 잘못들을 회개하기만 하면 자동적 순간적으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깨는 것은 자신의 안에서부터 예수의 생명이 먼저 활기차게 작동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닮아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닮은 마음, 말하자면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라야 그분의 빛을 드러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죄와 사탄과 사망에 묶여 있는 불신자들의 영혼을 너무나도 불쌍히 여기는 긍휼입니다. 어떻게 하든 그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서 다시 그분과 화목 시키려는 소망과 열정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선 어떤 핍박과 멸시와 손해를 보더라도 한 죄인의 영혼이 거듭나도록 죽기까지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또 그런 마음에서 말과 행동이 절로 겉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제외하고는 가장 외식하지 않았던, 하나의 얼굴만 가졌던 자의 대표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서 참으로 흥미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천의 얼굴로 변화무쌍하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럼 사람들 앞에 하나의 얼굴로 서지 않았다는 뜻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나의 얼굴로 서라니까 얼굴에 드러나는 외적 모양, 태도, 감정, 예의 등으로만 판단하려 듭니다.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 마음이 자동적으로 그냥 겉으로 나오게 해야 하는데 그 마음이 하나면 겉모양새가 어떠하든 하나의 얼굴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하나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고백한 그대로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 오직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데만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또 이미 믿은 신자라면 날이 갈수록 주님의 권능과 은혜를 더 많이 맛보아 누리도록 하는 일에만 초점을 모았습니다.

요컨대 신자가 세상 앞에 가져야 하는 얼굴은 십자가 복음의 얼굴입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확장되어지는 얼굴입니다. 일부러 도덕적 성자나 종교적 위인으로 가장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내면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펄펄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관습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관습을 표방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해야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처럼 죄인을 견책하고 죽음과 흑암의 세력을 저주할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한없이 낮아져서 문둥병자나 창기와 식사하며 말씀으로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 빠져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종교적 경건과 도덕적 의를 통해서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드러내었습니다. 오늘날 몇몇 문제가 되는 대형교회가 그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뒷전으로 처지고 말았지 않습니까? 모든 죄인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긍휼이 그 마음에 있으면 겉으로 어떤 얼굴이 되든 하나의 얼굴이며, 그 마음이 없이는 겉으로 아무리 하나의 얼굴이 되어도 외식하는 얼굴일 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천의 얼굴로 변신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변신해야 한다는 진리라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교적 경건과 도덕적 의만 우직하게 드러내느라 한 가지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합니까? 바꿔 말하면 한 사람이라도 복음 안으로 인도하려 듭니까? 아니면 자기가 신자인 표만 모두에게 확실히 내려고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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