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 있는 새 교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1:21-27)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자 뭇 사람이 서기관과는 달리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 같다고 놀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은 바벨론 유수 시절 이후 성전 제사보다는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고 기도하는 예배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 예수님도 똑 같이 구약 성경을 풀어서 강론하되 교수 방법이나 그 해석이 아주 특이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율법에 관해서 만은 오랜 경험이 있는 서기관만큼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훨씬 다른 것, 전혀 새로운 것이었기에 권세가 있게 느껴졌는데 본문에 바로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자 사람들이 다 놀라 또 다시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내어야만 권세 있는 교훈이 되는가요? 귀신을 쫓아내기 전에 회당에서 말로서 교훈을 가르칠 때에 사람들이 권세 있다고 이미 확인했기에 귀신을 쫓는 능력 자체를 두고 권세 있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귀신을 쫓아 내는 것과는 연관이 있는 교훈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성경이 ‘마침’ 귀신들린 자가 회당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친 내용과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이 연관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무슨 마술사가 자신의 쇼를 선전하듯이 이제 내가 귀신을 쫓아내는 시범을 보이겠다고 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귀신과 연관된 메시지란 결국 영의 세계, 영원한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한 마디로 천국에 관한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기관으로부터 배운 것은 율법의 도덕적 종교적 계명들이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하는 법,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 이웃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하는 법, 기도와 금식하는 규칙,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법 등등 모세 오경으로 시작하여 바리새인들이 첨가한 수많은 금령들만 주로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시골에서 올라온 이름 없는 랍비라고 짐작한 회중들로선 아마도 율법에 관한 비슷한 설교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메시지를 접했으니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 심령에 던져진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나아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준수해야 할 온갖 의무 사항들로 어깨가 무거운 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은 너무나 신선하기조차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풀어 설명했겠습니까? 단순히 지금껏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부과한 여러 금령의 부담과 잘못을 지적하였겠습니까? 일부 그렇게 말씀하셨을지는 몰라도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짐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묶여서 괴로워하는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짐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진정으로 회개하고 나를 따르면 그 모든 짐에서 풀리고 죄악에서 구원받는다라고 선포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향해 그 메시지에 맞장구를 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아마도 예수님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는 선지자의 예언이 응할 때가 바로 이 때라고 말씀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선 실제로 귀신에 붙잡혀 있던 한 불쌍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습니다. 당연히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라는 감탄이 나올 수 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됩니까? 권세 있는 새 교훈은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나아가 예수님 당신입니다. 율법의 희생 제사로 예표된 하나님의 구속이 때가 차매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새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새 교훈은 제대로만 선포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당연히 권세가 따르게 됩니다. 요컨대 교회에서 목사가 선포할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 메시지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때가 찾지만 오늘날에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 교회의 강단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권세 있는 새 교훈의 선포는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어렵게 교회를 방문해 준 사람들에게 죄책감만 불러 일으킨다고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조차 배타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말로 간단하게 하고 치웁니다. 그나마 도덕적 종교적 계명들 같은 권세 없는 오랜 교훈조차 잘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아니면 하늘에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줄 축복과 교환하는 조건으로만 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가 권세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지 않으니 자연히 힘을 잃고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목사는 심오한 사상과 고매한 철학을 우렁찬(사실은 기교에 더 충실한) 목소리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 관계의 처세술과 세상에서의 성공 철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돈을 받고 팔아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복음만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은 구태여 설득시키려고 인간적 지혜를 동원할 필요 없이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성경 대로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대의 인간들은 그 현실적 형편이 풍요하든 궁핍하든 관계 없이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묶여서 신음하고 있고 그 멍에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원토록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예수님에 관해 듣고 싶어 하는데 교회가 오히려 그 소원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너무나 아쉬운 때입니다. 이 권세 있는 새 교훈을 점차 듣기 힘들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분께서 직접 다시 오시는 일 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 예수여 어서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3/20/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