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가 개신교 침체의 주범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10:13-16)
최근 10년 사이에 한국의 개신교 인구는 14만4천명이나 줄었는데 반해 카토릭은 같은 기간에 무려 74.4%나 늘은 것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세계가 놀라는 눈부신 성장을 자랑하고 있던 개신교로선 충격적인 결과였습니다. 일각에서는 통계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너무나 궁색한 변명을 내세웠지만 누구나 체감하는 사실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러 모양으로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합니다.
최근에는 카토릭과 합동으로 두 종교를 비교한 세미나까지 열리기도 했습니다. 카토릭 측에선 성장의 원인으로 천주교회의 결속력, 재정의 청렴성, 정의와 인권활동, 조상제사와 장례 의식에 대한 유연한 태도, 타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 등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 측에선 물질주의와 경제 지상주의의 강조, 성스러움의 상실을 쇠퇴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개신교가 쇠퇴한 원인을 다각도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따지면 성장 지상주의가 오히려 쇠퇴를 불러왔다고 보입니다. 번듯한 대형교회 건물과 교인 숫자가 목회 성공의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연히 그 부작용으로 헌금이 강요되고, 헌금 많이 한 교인들이 대접받고, 목회자들도 금전적인 스캔들에 휩싸이고, 전도와 섬김도 영혼 구원이라는 진정성보다는 자기 교회의 교인 숫자 채우기라는 느낌을 준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성장지상주의란 다른 말로 전도를 열심히 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더 전도를 막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전도를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 자성하며 개혁하는 일에 매진하는 동시에 전도에도 이전보다 더 큰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문제는 전도하는 방법에 있었던 것이지 전도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전도하는 방식을 완전히 고쳐야 개신교에 제 2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Barna Survey에서 2004년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미국 개신교인들 가운데 85%가 14세가 되기 전에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선 14세는 집에 혼자 있어도 되는 나이이며, 16세가 되면 운전을 할 수 있고, 18세는 완전히 법적으로 성인으로 칩니다. 어쨌든 14세도 일종의 준성인(準成人)이 되는 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한국과 미국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바꿔 말해 성인이 된 후에 믿게 되는 자는 사실 15%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뜻입니다. 또 정확한 비율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서 믿은 자의 거의 대부분이 큰 고난을 겪은 후라는 것이 여러 조사에서 밝혀진바 있습니다. 어쨌든 주일학교 이후의 결신자 15%를 순수 성인으로 잡고 그 중에 80%가 고난 중에 믿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체로 따지면 주일학교에서 믿은 자가 85%, 고난 중에 믿은 어른이 12%, 순수하게 말로서 복음을 전해 듣고 믿은 어른은 3%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현재처럼 무차별적으로, 현실적으로는 주위에 가까운 사람부터라 해도, 어른들을 상대로 전도지 건네주며 말로서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전도방식은 사실상 별로 효과가 없었고 또 없을 것이라는 뜻 아닙니까? 전도의 주 대상을 어린아이와 고난 중에 있는 어른들로 바꾸어야 함은 너무나도 명백한 이치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그들은 교회의 성장 동력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 아닙니까? 어린아이나 고난 중에 있는 어른이나 헌금이 안 나오고 교회 일을 맡기기는 무리라 교회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교인으로서 한몫 해주기를 기다리자니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어린아이를 전도 대상으로 삼으라고 이전에 헐벗었던 시절에 교회에 가면 선물을 주는 식의 물량 공세로 되돌아가선 안 됩니다. 집에서부터 신자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믿는 자로서 본을 확실하게 보여야 합니다. 매일 가정 예배를 들이고 기도와 성경 암송을 강요(?)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녀들이 어른이 된 후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막으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자녀들을 프로그램 좋은 대형 교회에 보내기 보다는 부모 스스로 절대로 위선적인 교인이 되지 않는 길 밖에 없습니다. 어떤 환난이 닥쳐도 믿음으로 이기되 선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들로부터 믿음의 진정한 능력을 산 체험으로 확신하게 되는데 어떻게 교회를 떠나겠습니까?
신자가 자기 자녀들이라도 제대로 믿게 하면 자녀들의 그 올바른 믿음이 친구들에게 저절로 전해집니다. 유아 및 청소년기에는 친구들로부터 가장 큰 영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최소한 그 자녀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라도 진정한 믿음을 전할 것입니다. 야곱의 가문 70여명이 사백년 만에 200 만이 되었듯이 몇 대 안가서 자연적으로 부흥하게 됩니다. 먼 장래를 바라보고 어린아이들에게 교회가 마련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신자 부모부터 순수한 십자가 복음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또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는 일차적으로는 어려운 불신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순수하게 교리로서 전도된 것으로 추산한 3%도 겉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그 심령이 아주 궁핍해 있었을 때 믿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자기 상황과 적절하게 연결되는 성경 말씀과 진심어린 기도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의 섬김”과 “빛과 소금으로서의 솔선수범”이 빠진 전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 전도 대상으로 삼아야 할 어린아이와 고난 중에 있는 어른은 사랑의 위로와 장래의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두 가지 긴급한 필요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어린아이들은 사실 인간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로선 진짜로 아무 도움이 안 되며 그야말로 성가신 존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자기들 스승의 사역에 방해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영혼 구원, 교회 용어로 전도인데 그 대상에 어린아이도 당연히 포함되므로 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전도 대상에 포함되는 정도가 아니라 주전도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전도란 그런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를 찾는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 위에 서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소원하는 것이 전도이지 개별 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 문을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어린이, 과부, 세리, 죄인, 병자 등 당시의 빈곤하고 핍박 받는 소외 계층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니 주로 그들을 전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사랑으로 섬기고 빛을 비추는 것이 전도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려 오셨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어 병자를 찾아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원칙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카토릭이 성장하는 데에 사회정의 실현과 인권활동이 큰 원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개신교는 지금부터라도 개신교가 성장하겠다는 생각을 당장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전도하겠다고 설쳐대다가 전도를 막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부터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빛이 비취면 밝음을 갈망하는 어둠들이 몰려오게 마련입니다. 특별히 신자부모들이 자기 자녀들 앞에 정말로 목숨을 걸고 바로 서야 합니다. 이 길 외에 개신교가 성장하는, 아니 예수교가 성장하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고도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닙니까?
12/12/2006
첨언: 한국 개신교 인구가 준 것이 왜 하필 144,000명입니까?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이상합니다. 천국에 채워져야 할 인원(계14:3)을 다 까먹은 셈 아닙니까? 천국 복음을 완전히 거꾸로 전했다는 증거이자 예수님의 무시무시한 경고라고 여겨지는 것이 과연 억지나 기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