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후유증(2)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19,20)
즐거운 일이 생겨 큰 기쁨을 맛본 다음에는 그에 반비례해 쓸쓸함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기쁨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고 다시 그런 기쁨을 반복해서 찾으려는 성향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재미만 탐구하는 자란 뜻의 "Pleasure Seeker"라는 영어 관용구처럼 솔직히 우리 모두가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는 자입니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전용하면 신자는 모두 “Grace Seeker(은혜를 찾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은혜를 받은 후에 더 큰 은혜를 소망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신앙생활의 전부를 은혜만 찾아 나서는데 소비해선 곤란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사실은 은혜가 과연 정확하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긍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심판장에서 밧줄이 목에 걸려 곧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아무 이유 없이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독생자의 공로에 의해 완전 사면을 받은 자입니다.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나 이제는 덤으로 거저 사는 인생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 이후의 신자의 삶 전부는 평생을 걸쳐 아무 자격 없는데도 공짜로 받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 간섭하고 인도하는 일에 은혜가 아닌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그분의 인도와 간섭을 받기를 소원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흔히 생각하듯이 더 새롭고 더 크고 더 화끈한 기도 응답이나 기쁜 일은 은혜의 한 종류, 더 정확하게는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미국 NBC TV의 심야 토크쇼 사회자이자 유명한 코미디안인 Jay Reno는 고급차 수집광(Mania)으로 유명합니다. 그에게는 평범한 차는 눈에도 안 들어오고 돈 들여 살 필요가 전혀 없지만 특이한 고급차는 무슨 수를 써도 손에 넣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더 화끈한 은혜만 찾는 자는 "Grace Seeker"의 차원을 넘어서 "Grace Mania"가 되어버립니다. 평범한 은혜는 성에 안 차고 화끈한 집회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 참석해야 합니다. 자동차 수집광인 Jay Reno는 그나마 뒷받침 해줄 돈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만 일부 신자는 신앙수준은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데 은혜 수집광이 되니까 문제입니다. 아니 "Grace Mania"가 된 것 자체가 신앙에 이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 전체가 은혜가 되는 까닭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신자와 항상 동행하여서 보호하고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혜가 진정으로 은혜가 되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수적으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데도 은혜가 안 생길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없이도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스스로 그런 척 가장했거나 아니면 종교적 환각상태에 빠진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당신과 교통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했습니다. 인간에게도 인격을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은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야만 진정한 만남이 되고 또 그래야만 진정한 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소위 은혜 수집광이 선호하는 초자연적인 신령한 체험이 되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인격에는 지정의(知情意) 세 요소가 있습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려면 당연히 인간의 지정의가 하나님의 지정의와 서로 교통이 이뤄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그 중에 일부만 만나져선 온전한 만남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정의 세 요소가 동시에 다 같이 만나는 전인격적인 만남이어야만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을 머리로만 혹은 가슴으로만 믿어선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머리로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지성으로만, 가슴으로만 믿는 것은 감성으로만 만난 것에 해당됩니다. 나아가 지성과 감성을 다 동원해 믿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즉 의지를 동원하여 삶에 그 믿음을 반영하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이제 은혜 수집광의 두 번째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감성으로만 만나려 드는 것입니다. 부흥회, 수련회, 은사찬양집회, 기도원 등에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정적으로 충만해진 그 상태가 그리운 것입니다. 거기다 외적인 이적이 나타나면 금상첨화입니다. 감성적인 흥분과 감격이 따르지 않으면 마치 은혜가 아닌 것처럼,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물론 감성적인 만남만 있어도 어쨌든 하나님과의 부분적인 만남이 이뤄진 것은 사실입니다. 또 지성적인 만남만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적인 충만은 따르지 않아도 성경 말씀만으로 회개와 헌신을 새롭게 불러일으킵니다. 여전히 일부분이긴 하지만 그분과의 만남은 이뤄진 것입니다. 마치 소경이 귀나 코만 만져도 코끼리를 만진 것은 분명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코끼리 전체는 아직 그려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 만남이란 한 사람 전체가 다른 사람 전체와 상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학자끼리 만나거나 연극배우끼리 만난다고 해서, 전자는 지성만의 후자는 감성만의 교류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만남이 서로 만나 인사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공통 관심사를 함께 이끌어가는 부분, 즉 의지로 무엇인가 실현하는 모습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도 다음에 만날 약속이라도 하면 그 자체로 벌써 의지가 작동된 것입니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만남도 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정의가 함께 동원되어져야 합니다. 은혜 수집광의 경우는 다른 부분은 도외시하고 오직 감성에만 집착했으므로 지성과 의지의 교류가 함께 따라야만 합니다. 예컨대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그 은사만 자랑하고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양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선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으로 은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깊이 연구하여 오직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전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분별할 줄 아는 지성과 또 그렇게 시행하는 의지가 동원되어져야만 합니다.
최초의 성탄절 후유증을 겪은 마리아와 목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에게도 물론 감성적인 충만이 가장 먼저 생겼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적 자극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이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신령한 초자연적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기도원에서 방언 받거나 암이 나은 정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독교 역사상 그런 감정적 충만을 맛본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에 대한 천사의 예언, 목자나 박사들의 전언, 또 이뤄진 모든 일들의 경과를 지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잘 분별하려 한 것입니다. 또 그 예언이 이뤄지기를 소망하면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이기도록 기도하며 기도한 대로 살려고 의지를 동원한 것입니다.
목자들도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천사들을 만나 천상의 찬양을 들었던 그 들판으로 나와 그런 감격을 다시 맛볼 수 없을까 목 빼들고 기다렸거나 구유에 누운 예수님께 매일 찾아와 문안드리지 않았습니다. 듣고 본 모든 것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다시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가 그 예언이 실현될 것을 소망하며 자기 삶을 더 충실히 살았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감성이 아주 풍부하거나, 지성이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의지력이 무척 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도 자기가 받은 은사와 재능에 따라 하며 또 그에 맞추어 쓰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전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의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되며 또 신자의 삶에 온전하게 그분의 인도와 간섭이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다른 말로 은혜 중독증뿐만 아니라 “말씀 중독증”도 문제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직 말씀 우선주의가 되어서 신앙생활에서 감정적 반응을 하거나 초자연적 체험을 하는 것을 부인 내지 경시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 신유 같은 은사들이 지금도 엄연히 실현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각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런 은사를 받도록 소망해야 합니다. 나아가 찬양 집회에서 박수치고 눈물지으며 춤까지 출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냉정하리만큼 지성적이라 그런 면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최소한 말씀을 볼 때에 그 속에 드러난 십자가 복음 앞에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기 영혼의 가난함과 비참함 때문에 정말로 뼈를 깎는 애통함에 파묻혀야 하며, 대신에 그분의 부활 앞에 자신도 새사람으로 거듭났음을 확신하여 자기 존재 전체로부터 기쁨이 솟구쳐 나와야 합니다. 말씀으로 인생이 뒤집어지고 삶이 완전히 바뀌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말씀만 교조적으로 우선하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닐뿐더러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어서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나아가 드물긴 하지만 하나님을 머리나 가슴이 아닌 몸으로만 믿는 신자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삶만을 최우선적으로 삼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지성과 감성을 통해서 만난 적은 없고 오직 의지로 실천만 하는 신앙입니다. 의지란 항상 외부를 접촉한 인간 내면이 감성적으로 반응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혹은 그 후에 지성이 사리 분별을 한 후에 작동하는 법입니다. 만약에 지성과 감성의 반응 없이 의지로 선을 실천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부분적으로나마 만난 적도 없다는 뜻입니다. 코끼리의 귀, 코, 다리, 몸통 중에 어느 곳도 만져본 적 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설명만 들은 셈입니다. 남의 집 봉창을 두드리는 것처럼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기독교, 아니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인간 내면의 감성, 지성, 의지의 모든 부분이 온전하고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정의 이면에서 지정의를 주관하는 영이 그 중 하나만 통제하지는 않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하나님도 자기 자녀들이 당신을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경배해주길 원하기 때문에 당신의 은혜를 인간의 뜻과 마음과 목숨에 동시에 함께 베풀어주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탄절 후유증처럼 겪는 은혜 중독증에서 치유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큰 기쁨과 신령한 체험을 자꾸 반복해서 경험하려 하지 말고 그 중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마리아처럼 마음에 지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말씀 중독증을 치유하려면 하나님과 감정적 교류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도덕만 실천하는 신자는 예수님을 만난 적조차 없으므로 오직 그분의 십자가 앞에 자기가 죽고 살아나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소원해 기독교 신앙을 정식으로 재출발해야 합니다.
온전한 신자란 하나님이 울 때에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신자가 울 때에 하나님이 곁에서 함께 울고 있고 웃을 때에 웃고 계심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의 뜻과 계획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나의 뜻과 계획에 그분의 뜻과 계획도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둘만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가는 길에 실제로 내가 가고 있어야 합니다. 또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 가고 있음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과 항상 전인격적인 즉 지정의 세 부분에서 쌍방 간의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화살표로 도식화 한다면 지정의 세 부분 X 하나님과 신자 두 방향 해서 반드시 여섯 개가 그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의 신자는 오직 두 가지 화살표만 그리며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울고 웃을 때에 하나님도 반드시 울고 웃어야 하고, 내 뜻과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대박 같은 축복이나 신령한 초자연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항상 그분과 모든 부분에서 동행하고 있으며 바로 그 자체가 너무나 큰 은혜임을 실감하는가 묻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은혜는 반드시 그분과의 동행하는 모습으로만 받고 실현되는지 말입니다. 요컨대 예수 믿은 후에는 그저 덤으로 사는 인생임을 철저하게 인식하기에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12/2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