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2:16-21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조회 수 1185 추천 수 32 2009.09.19 15: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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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산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많은 신자들이 탐심을 평균 수준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라고 단순히 해석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명품 근처에는 가지도 말아야 하고 벤즈 같은 수입차를 타선 안 되며 북한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를 생각해서 기름진 음식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균 수준이란 시대와 장소와 문화에 따라 다 다릅니다. 독일에선 벤즈가 보통 수준이며 미국에선 수영장 딸린 집도 중산층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사는 곳을 기준해서 평균이면 된다는 말은 더 타당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로 치면 갑부에 속하지만 미국에선 중산층도 안 되니까 괜찮고, 미국의 거지보다 조금 나은데 아프리카에선 사치에 속하니까 안 된다고 하면 인간 사회에선 몰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불공정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또 한 지역의 경제적 수준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중간수준도 자꾸 상승합니다. 이십년 전에는 25평이 넘는 아파트가 사치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35평도 중간축에 못 끼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신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이 자꾸 바뀌는 셈 아닙니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또 진리가 아닌 것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아가 주관적인 중간 수준이 더 문제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 평균치는 무시하고 자기 주위보다 쳐지면 아직 중산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중간에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남보다 훨씬 더 가져야만 겨우 직성이 풀리는 데는 신자라고 크게 예외는 아닙니다. 중간 수준이 통계학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는 현실 상황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간의 감정 앞에는 아무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신자마저 중간수준을 따져서 그것을 넘지 않겠다는 생각은 성경이 (사실은 목사가) 허용해주는 최대한도까지는 갖추고 살겠다는 심보로 절제를 가장한 욕심일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은 탐심을 수치적 평균치로 따지는 차원과는 훨씬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재물에 관한 주관적 인식의 전환이라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현대인들이 돈을 모으는 것보다 인생을 즐기는 웰빙을 추구한다고 해서 탐심에서 자유스러워졌다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형더러 율법대로 재산을 분배하도록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한 자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면서 부연 설명으로 든 비유입니다. 그 말은 탐심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직접 풀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탐심의 성경적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장래 소용 분까지 쌓아둘 정도였으므로 소유가 중간수준보다 많다는 탐심의 근본적인 의미는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쌓아둘 곳이 없어서 곡간을 더 크게” 지을 정도였으므로 최고 갑부에 해당하며 그 정도 되는 사람에게는 수치적인 중간수준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도 탐심을 수치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중간수준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초과했는데도 끝까지 만족 못하는 욕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즉 수치적인 양과는 상관없이 어떤 일에도 진정한 만족과 감사를 못하는 것이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만족과 감사가 없이 중간수준 정도만 지키겠다는 어떤 시도도 오히려 끝없는 욕심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마치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처럼 중간수준이란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에 아무리 해도 달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런 헛된 욕심이 왜 끝없이 생기는지 따져 보아야 탐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부자의 심중의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주어로서 내가 생각하여 내가 시행했습니다. 내 곡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 등 전부 내 것일 뿐입니다. 그는 오직 자기 생각과 노력으로만 소유를 불리고 장래에 대비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라고 하면서 자기 영혼에 안식을 구하는 일도 자기 생각으로만 시행했습니다. 내 재물이 내 육신뿐만 아니라 내 영혼의 안전까지 보장해준다고 믿은 것입니다. 즉 소유를 많이 쌓으면 안식이 더 많아진다고 판단했기에 계속해서 쌓을 수밖에 없으며 또 아무리 쌓아도 여전히 더 큰 안식을 위해선 부족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자기 영혼을 도로 찾아갈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불신자는 소유를 키워 안락한 노후를 대비하는 것도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의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한 것이 뿐입니다. 죽음의 주관자이자 영생을 주시는 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 어떻게 죽음을 바르게 준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부자가 곡간을 넓히게 된 발단을 예수님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자의 경작 노력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토질이 양호한 밭을 주었고 또 모든 자연 조건을 적절히 조절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보여야 할 반응은 당연히 그분에 대한 감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곡식 쌓아둘 곳”만 걱정했습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어가면 크게 늘린 곡간과 쌓여 있는 곡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영혼이 안식을 보장 받을 길이라고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부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진정한 영혼의 안식은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해 완전히 헛되고 헛된 인생만 살은 것뿐입니다. 탐심의 허무한 결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탐심이란 소유의 수치적 과다와 상관없이 소유가 자신의 영육간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믿는 생각을 말합니다. 신자는 그 반대의 생각 즉 하나님만이 나의 영육간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믿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중간수준의 소유에 맞추어 살겠다는 생각을 왜 합니까? 하나님 대신에 중간 크기의 곡간이 자기 영육간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영육간의 안전이 중간 수준만 되어도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자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업신여기는 셈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체면은 어느 정도 만족시켜 줄지 몰라도 여전히 영혼의 안식 심지어 자존심마저 채워주지 못하기에 신자 또한 스스로 중간 수준을 높이고 싶어 안달하게 만들 뿐입니다. 요컨대 곡간의 크기를 자기가 정하겠다는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신자의 그것은 하나님만이 정하십니다. 밭의 소출이 풍작이 되느냐 흉작이 되느냐는 오직 그분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자기가 곡간 크기를 정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신자가 아무리 중간수준 이하로 살아도 여전히 탐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탐심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했습니다. 소유가 사람이 자기 안전과 위로를 보장 받으려는 대표적인 수단이긴 해도 그 외에도  지식, 명예, 권력, 자존심, 건강, 미모, 가문, 자식사랑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덕적 선행, 종교적 성실, 성경적 지식과 믿음까지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성도들과 믿지 않는 이웃에게는 아주 인색하게 굴면서 가시적 조직체인 교회에는 재물을 풍부하게 기부하는 자는 큰 탐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교회 내의 명예와 사람의 칭찬에서 보상을 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헌금을 지역사회나 다른 하나님의 일에는 쓰지 않고 움켜쥐고 있거나 건물에만 투자한다면 동일한 탐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산을 독차지하겠다는 형뿐만 아니라 소송을 해서라도 자기 몫을 찾겠다고 덤비는 동생도 탐심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동기간의 우의보다 재물을 더 중시했다는 단순한 뜻을 넘어서 법률적 정당성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믿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뜻이 사랑과 공의의 동시 실현이라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동생이 양보하고 형의 회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이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전혀 없었는데, 바로 이것이 탐심의 정확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간섭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다른 어떤 것에서라도 안전과 위로와 만족을 찾으려는 것은 다 탐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엄숙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가장 먼저 내 안전과 위로와 만족을 내가 내 곡간에 쌓아둔 내 것으로 보장 받으려는 어리석은 생각부터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 이 부자와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며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내 곡간을 헐어 헐벗고 굶주린 자들로 가져가게 하리라. 내 영혼의 안식은 먹고 마실 것이 풍부한 데서 결코 오지 않기에 오직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해 영생토록 마르지 않은 샘솟는 그분의 생수를 마시리라. 당장 오늘 그분이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나는 그 분 안에서 영원히 쉬며 즐거워하리라.”  
        
1/18/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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