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6:37,38 후히 주어야 할 이유

조회 수 1129 추천 수 23 2010.10.12 0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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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히 주어야 할 이유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7,38)


작금 기독교의 믿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에 비해서 너무 협소하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내용을 단 두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니 두 문장도 아니라 두 표어일 뿐입니다. “예수 천당, 믿음 만능”이 그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 가고 또 이제 믿고 구원 얻었으니 무엇이든 간구하여 얻으라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두 표어의 내용 자체가 틀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에 따라 나타나는 구체적 신앙 양상에 오류가 발견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 믿고 구하는 일에 방해 되지 않게 도덕적 성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분명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효과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구하는 일의 방해만 제거하려는 즉, ‘믿음 만능’에 초점이 가있습니다. 선행마저 현실적 형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버릴 소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히브리서 11:6을 문자적으로만 붙드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 의미를 11장 전체 문맥에 비추어 더 깊이 따져야 함에도(이는 지금 다룰 주제가 아님) 그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너무나 ABC 같은 내용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으면 상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아예 신앙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불신앙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이 실재(實在)함과 그분이 세상사를 주관한다는 정도로, 물론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실제 개입하고 개인적으로 돌보신다는 면에서 다른 종교와 큰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그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38절의 전반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하고 치웁니다. 주는 것보다는 주면 넘치도록 돌아온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관심의 초점은 자신의 형통에 가있습니다. 최소한 주고 나도 그로 인한 부족분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니 안심하고 주겠다는 동기로라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가 더 받을 의도로 오역합니다.  

예수님의 “주라”는 계명이 단순히 구제를 잘하면 보상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 잘못, 상태, 위치, 신분 등에 좌우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전체 문맥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는(35절) 계명이 그 단적 예입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36절) 명하신 것입니다.

본문도 줄 때에 헤아리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주든 그 몇 배로 돌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줄 때부터 전혀 헤아리지 않고 즉, 되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담아서 주었기 때문에 그 심중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대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헤아려서 주면 하나님도 그에 맞추어 대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면 하나님이 몇 배로 갚아주시리라 기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을 헤아려서 주는 일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의 일관된 원리는 하나님은 신자가 행하는 모든 일의 중심을 보시고 그에 맞추어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비판치 않으면, 정죄하지 않으면, 용서하면, 나도 하나님의 비판을 받지 않고, 정죄함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내가 남에게 주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몇 배로 돌아온다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내가 행한 만큼만 돌아옵니다.  

거기다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을 그 동기와 열정이 강해지는 순서대로 말씀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 명령(Don't)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주는 것은 적극적 명령(Do)입니다. 또 앞의 셋은 생각과 말에 주로 영향을 미치는 소극적 계명이라면, ‘주라’는 것은 자기 것을 희생하며 적극적 행동으로 나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라”는 말씀은 자기를 선대하지 않는 이웃을, 특별히 원수까지 사랑하고 선대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 초점이 되돌려 받는 것 즉, 신자 자신의 형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구제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그 부족분을 보상해주고 신자 자신의 인격과 믿음을 성숙시켜 준다는 원리와도 큰 연관이 없습니다. 절대 헤아리면서 사랑하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헤아리지 말고 후히 주어야 하는 사랑의 본질을 말한 것이지 구제하는 방식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를 사랑하고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그렇게 하느니라.”(32, 33절을 필자가 합침)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가 범하는 신앙상의 오류에도 똑 같이 적용됨을 보십시오. “너희가 주면 후히 되돌려 받을 줄 알고 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그렇게 할 수 있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만 믿고 나아가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불신자들도 그렇게 하느니라.”

나아가 예수님은 지금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을 구분해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의 계명이므로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고, 하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원수까지 사랑할만한 실력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얼마나 고귀한 줄 깨달아 그것을 신앙의 궁극적 목표로는 삼아야합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의 몫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아래 둔 사항입니다. 인간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위임된 사항입니다. 인간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 통치하시되 인간을 통해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비판, 정죄, 헤아림은 인간이 행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해석과 비교 평가와 판단까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객관타당하지 않고 주관적 편견에 치우친 분석으로 남을 비판, 정죄, 헤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비록 정확한 판단에 바탕을 두었다 쳐도 그것으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절대 영향을 받지 말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비판, 정죄, 헤아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인간은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을 벌주고 원수 갚는 것 같은 통쾌한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인간더러는 힘들고 손해 보는 일만 시킨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그 믿음이 성숙한 자라도 단 한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야만할 불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너무나 연약하고 무능하기에 당신의 자비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한 자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후히 줄 때에, 특별히 성숙한 신자가 연약한 신자와 주위 모든 불쌍한 불신자들과 그럴 때에, 하나님의 자비도 그들 사이에 누르고 넘치도록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일과 주는 것도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 있지만 인간, 그중에서도 신자들이 하도록 맡겨놓으신 것입니다. 혹시 비판과 정죄와 헤아림 같은 부정적인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용서하고 베푸는 선한 일은 인간에게 맡겨놓으셨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까? 신자에게만 주신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자 축복입니까?

10/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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