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60-62 진짜로 오직 예수인가?

조회 수 318 추천 수 17 2011.03.25 05: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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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오직 예수인가?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22:60-62)

전도를 하다보면 자신이 죄인이라 구원이 필요하다고는 수긍해도 꼭 십자가 구원이어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왜 아무 선행도 하지 않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꽤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믿는데 예수님에 대해 잘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째서 그분이 하나님인지 그 근거를 남들에게 확실히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제가 지금 명색이 신학생들에게 너무 엉뚱하고 초보적인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까? 그럼 다시 물어볼까요? 전도 할 때에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제시합니까?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당당히 증거하십니까? 복음은 말로 전할 수밖에 없기에 교리를 전했다고 칩시다. 그럼 실제 삶에서라도 진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실감하면서 사십니까? 그래서 누가 봐도 여러분을 보면 예수가 하나님인 줄 알도록 살아가십니까?

흔히들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중풍병자 장님 등을 고치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도 살렸기에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 성경의 기록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기록과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도 그런 기적을 누리며 사는 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불신자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로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습니까? 또 요즘도 기독교 신앙 없이도 주술이나 기도로 비슷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가 있기에 크게 관심을 끌지도 못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진짜 증거를 따로 찾아야 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드러내어서 불신자로 십자가 구원 진리에 대한 믿음은 당장 생기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만은 수긍토록 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기에 행할 수 있었던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언제 어디서나 일치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때로 그럴 수 있어도 평생을 두고는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얼마나 자주 실토합니까?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하여 조변석개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니까 십리를 갔으며, 오른 뺨을 때리자 왼 뺨까지 대주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셨고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분이 최고 선한 행동을 했기에 최고 위인이거나 최고 좋은 믿음으로 기독교를 창시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인,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해도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했으며 사흘 굶어도 남의 집 담장 넘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며 자기는 그분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자기를 보라고까지 했습니다. 자신이 바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로서 죄인들의 죄를 당신께서 직접 사해주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성경필사자들이 야훼 하나님의 이름만 나와도 붓을 다시 빨았고, 평소는 아예 그 이름조차 부르지 못해 엘로임으로 고쳐 부를 정도였는데 예수님의 그런 선언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짓이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죽으려고 환장한 짓으로 상식적으로 미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C. S. 루이스가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미쳤거나 진짜로 하나님이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행적을 진지하게 따져보십시오. 역사상 어떤 위대하고 의로웠던 인간도 온전히 그래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 어려운 형편에도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나선 여러분이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할 것을 예언했고 정확히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하나님이라고 본다면 너무나 가난한 해석입니다.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그 자리, 그 순간, 그런 상황에서, 어떤 비범하고 위대한 인간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아무 말 없이 그윽이 베드로를 쳐다보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말이라도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당장 붙들어 함께 재판에 회부했을 것입니다. 제자의 안위를 염려한 스승으로선 너무나도 당연히 사람들이 전혀 눈치 못 채게 아무 말씀이 없으셔야 했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조그만 의로운 인간이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기사들이 간혹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는 말 한마디에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그 자리에 버려두고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 고운 모양, 흠모할 풍채가 전혀 없었을 것임에도 그랬습니다. 성전에서 환전상과 제물 파는 자들을 주님이 야단치며 쫓아 낼 때에도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돈 버는 생업을 그만두라고 하는데 장사치들이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성 밖 벼랑으로 떠밀어 죽이려 했어도 그 사이를 헤치고 나왔습니다. 완력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세가 저절로 품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세상 군왕과 랍비와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전신을 감싸기에 자기 생각과는 달리 몸이 먼저 따라가거나 반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그 쳐다보는 눈길이 우리처럼 “봐라 내가 뭐라고 했니?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한다고 분명히 경고했지? 그런데도 네가 지금 하는 꼴이 이게 뭐니?”라는 야단치는 뜻이, 혹은 “네가 나를 보호한다고 칼 들고 설쳐봐야 네 꼴이 겨우 그 모양이지 별 것 있어?” 식의 조롱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포함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눈으로도 수백 가지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영적인 존재인지라 아무 제스츄어, 표정 없이도 마음먹은 바가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까?          

물론 기본 양심이 있는 베드로로선 스승의 눈과 마주치지 않았어도 세 번 부인 후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자기 잘못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스승의 놀라운 예지 능력에도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잘못을 또 범했지? 나는 매번 성격이 너무 급해서 탈이야. 이번에도 스승을 목숨 걸고 보호하겠다고 큰 소리쳐놓고 이게 무슨 꼴이람!” 정도의 후회 내지 반성만 하고 치웠을 것입니다. 뛰쳐나가 속을 완전히 까뒤집는 통곡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눈길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야단, 힐난, 조소, 냉소, 방관, 포기, 정죄 등 그 어떤 부정적인 뉴앙스를 단 한치도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판단, 아니 재확인하는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인간의 말로는 도무지 표현 못하는 따스함, 온유함, 긍휼함, 용서와 관용은 물론이고 새로운 생명의 빛이 은은하고도 풍성하게 비춰 나왔을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전인격을 완전히 앞도하고도 남을 만한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무게로 자기 가슴 안으로 밀려 들어왔을 것입니다. 이런 큰 잘못을 범했어도 이전과 똑 같이, 아니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신비하게도 스스로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가슴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용솟음치듯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 자리에 더 머물렀다가는 당장 들킬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함께 하신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권능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로 하여금 통곡케 역사한 것입니다. 베드로 스스로의 양심적 결단으로 회개한 울음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쳐다봄은 진짜로 하나님만의 쳐다봄이었습니다. 조금 더 의로운 인간 스승이 조금 덜 의로운 인간 제자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정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그 권능 앞에 항복하거나 항거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생명 아니면 죽음 두 가지로만 나눠집니다. 그 중간 회색 지대는 절대 없습니다.  그분과는 세상에서 통하는 인간관계로는 만날 수도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전혀 다른, 아니 정반대 차원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영생이든지 영벌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에 현실적 유익을 얻거나, 자신의 이름을 높이거나, 자기 일에 큰 도움을 받아보려는 인간 쪽에서 헤아린 이해타산은 절대 먹히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 모든 인간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원천이자 능력일 뿐 아니라 목적이자 결과이자 열매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전해져 오는 새 생명의 향기를 맡고선 옛 자아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보다 더 정확하고도 완전하게 그의 실체를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사단에게, 정확히는 자신에게 자기가 의롭다고 속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몰라도 주님은 아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까지도 베드로가 스승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 생각이 예수님의 입장에선 얼마나 어리석고 순진하며 허망한 것입니까? 그분이 인간의 동정과 긍휼을 받을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없으면 당장 죽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그분에 의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이 만물의, 특별히 인간이 이 땅에 생존해야할 유일한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난 것입니다. 영으로서 그분의 영과 접속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그 시커멓던 영이 이제 그분의 빛이 비춰짐으로써 비로소 깨끗케 된 것입니다. 그가 스승을 배반한 것 뿐 아니라, 지난 모든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이미 그 따스한 눈길로 인해 전부 다 용서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심으로써 그를 용서해 주었지만, 실은 대제사장의 법정에서 사랑의 눈길로 이미 용서했다는 사실을 네가 기억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어리석은 베드로는 주님에게 세 번 다 친구 사이의 사랑인 필레오로 사랑한다는 답 밖에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 두 아들은 제가 교회 나가고 변화된 것만 보아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구주임이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예수 전에는 포악했고 예수 후에는 착하고 거룩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몰라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할 수 있는 양 큰소리치다가 유일한 절대적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항복했고 지금도 그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제 인생을 뒤돌아 볼 때에 진짜 아찔함을 느낍니다.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가 추정해본 제 인생의 가장 큰 가능성은 알콜 중독자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반대로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예수 믿은 것이라고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제가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건져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추하디 추한 죄악의 시궁창에서 아무 의미 없이 즉, 죽지 못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흉악한 죄인도 말씀 한마디로, 아니 지금처럼 말없이 쳐다만 보아도 겉과 속을 완전히 뒤집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므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하녀의 닦달에도 겁이나 스승을 부인했던 천하의 비겁자로부터,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조차 스승을 모욕하는 것이므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위대한 사도로, 주님은 그 눈길 하나로 바꾸셨지 않습니까? 당신의 짧은 생애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말씀만 이천년 후에 읽기만 해도 성령이 역사하면 그 인간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기에 그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최고 밑바닥의 죄인을 하늘의 낙원으로 당장 지금이라도 함께 데려 가실 수 있기에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이 자리에 나와서 신학 공부하는 것이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가장 확실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엎질러진 물처럼 인간 세상의 치료, 도덕, 철학, 종교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이 무참히 산산조각난 인생도 그분은 세상이 감당 못하는 참 생명으로 활기차게 채우셔서 넉넉히 승리하게 만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 들어온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실패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로 한 자리에 나태하게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주권적으로 강권적으로, 필요하다면 환난을 주어서라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한 걸음이라도 이끄시기에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 일의 출발은 바로 그분이 당신만의 권세로 우리로 하여금 속과 겉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통곡을 하게 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또 그 전에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따스하게 쳐다봐 주십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만나지 않으면 이런 통곡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간섭으로 자기 속의 더럽고 더러운 실체를 진짜 발견해야만 자기 전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회개가 가능합니다. 역으로 예수님을 실제 일대일로 만나면 이런 통곡을 할 수밖에 없고 또 그 인생이 이전과는 정반대로 달라집니다. 스스로 속고 있음을 깨닫고 속기 전의 모습 그대로 완전히 벌거벗고서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분이 가신 좁고 협착한 길을 머리 둘 곳이 없어도 기꺼이 따르게 됩니다. 그분을 닮고 싶으며, 그분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집니다. 또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을 우리 속에 채워주시고 세상 사람들 앞에 절로 드러나도록 해주십니다.

물론 여러분 대부분이 이미 예수님의 이런 눈길과 마주쳐서 그분이 시키는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속과 겉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생일대의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젠 의롭다고 자신해선 결코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조금만 어려워도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무엇입니까?"라는 불평과 의심밖에 못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선 베드로를 바라봤던 바로 그 눈길로 우리를 그윽이 쳐다보시지 않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라고 말입니다.

"오직 예수!"가 종교적 수사나 구호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베드로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존재, 삶, 인생 전부를 진짜로 그분에게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처럼 위대한 사도는 될 수 없어도 최소한 날마다 속을 뒤집는 통곡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당신의 영광된 보좌로 한 걸음씩 이끄실 것이며 그 때에 비로소 주위 사람들에게 교리로 전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인 줄 믿게 될 것입니다.

3/1/2011

바로 앞의 # 195  "매일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 과 함께
한 신학생 모임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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