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마5-7장)의 일부로서 ‘티와 들보’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교훈을 ‘무조건적인 비판 금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할 공동체이며, 인간은 목회자든 평신도든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비판은 덕을 세우기보다 분리와 다툼을 유발하기 쉽다는 현실 등을 고려할 때, 가능하다면 비판은 삼가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그러나 문제는, 우리 생각과 달리 성경은 무조건적인 비판금지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잘못에 대해서는 엄하게 지적하고 꾸중할 것을 교훈하고 계시는 곳이 많습니다.

   ⊙ 따라서 오늘은 그 동안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던 ‘비판’에 대해 성경의 조명을 받아가며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본문 해석에 대한 미비점

   ⊙ 흔히들 본문을 설교의 주제로 잡거나 증거 구절로 인용할 때, 다른 사람의 언행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합니다. 평신도들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해석을  ‘모든 것, 심지어는 잘못된 일일지라도 눈을 감고 묵인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과 이해는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을 해석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먼저,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성도들이 일차적 수신인입니다. 따라서 본문도 일단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교회 내에서의 무분별한 비판을 경계하시는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비판이란 자기의 의(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내 기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비판의 출발점은 자신의 정욕(욕망)입니다. 시기와 질투에서 출발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판의 결국은 싸움입니다(약4:1).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는 인내하고 용납하며 하나 되기 위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습니다. 이 정도의 이해라면 굳이 이러한 묵상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깊은 진리를 숨겨두고 계십니다. 이 더 깊은 진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본문  및 다른 부분을 좀더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렵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정죄권에 관련된 교훈도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정죄란 최종 확정 판결을 의미합니다. 이 권한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것으로서, 인간은 그 누구도 이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세상에서의 최종확정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아울러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받고 의인이 됩니다. 성도는 직분에 관계없이 누구든 ‘너는 안 돼’라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죄의 선행조건이 바로 ‘비판’입니다. 이 경우 비판은 조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본문에서도 무조건적인 비판금지가 아님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5절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십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먼저 자신의 들보를 빼고, 후에 다른 사람의 티를 빼라’는 것입니다. 티를 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비판할 수 있다는 뜻). 물론, 들보가 없는 자는 없기에, 남의 티를 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만, 비판 자체가 원천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받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습니다.  

   ⊙ 그런데 문제는, 6절에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왜 이 말씀이 이 부분에 끼여 있을까요? 문맥상 6절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즉, 1-5절은 ‘비판’에 대하여, 7절 이후는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뒤 어느 곳과도 연계되기 어려운 말씀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개와 돼지’는 ‘이방인과 불신자’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인 복음’을 상징한다고 받아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복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주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눠주지 말라고 하시면 성육신하신 목적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과 지각을 사용하여 슬기롭게 받아야 합니다. 6절 말씀은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을 불인정하는 자들의 행동은 성도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찢어 상하게 함). 핍박은 비판과 정죄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1-5절과 연계한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1-5절의 비판자제 명령은 일차적으로 자기(성도)의 의로써 세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를 어기고 세상을 비판한다면 그 결과는 어찌될까요? 바로 1절에 답이 있습니다. 즉,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세상과 극한 대결뿐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핵심은 ‘자기 의로써 세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의 일차적 교훈은 ‘교회 밖을 향한 비판의 금지’에 있다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깊이 읽어야 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이든 세례 요한이든 예수님이든, 무수하게 많은 꾸지람(질책=비판)을 하셨는데, 놀라운 것은 그 어느 분이든 결코 교회 밖(세상)을 향해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엄청난 질책들(때로는 저주에 가까운 지적들=독사의 자식들아)이 모두 교회(이스라엘)를 향한 것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교회 밖을 향한 비판의 금지’는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 이러한 해석은 지금까지 교회가 가르쳐온 것과 상충되기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즉, 우리(교회)는 늘 세상을 향해 정죄에 가까운 비판(때로는 최종심판)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하면 할수록(세상 비판) 그 반응은 우리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비판(지적)에 의해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오직 교회가 세상을 품고 감싸줄 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구요? 빛과 소금의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은 자신을 희생해야만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희생은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이들의 희생의 덕은 주변(세상)이 봅니다. 결국, 이러한 해석은 교회의 역할이, 지금까지 교육받아 왔던 것과는 달리, 세상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포용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추상같은 비판이 아니라 선한 행동에 의한 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교회의 모범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성도들도 목회자의 모범이 없으면 변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일차적 교훈이 도출될 수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 이제 그렇다면, ‘자기 자신과 교회 내의 비판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묵상의 제목을 잡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향한 비판은 성도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들보를 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교회 내에서의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사항(무지에 의한 것이든 욕심으로 인한 의도적인 것이든)은 결단코 묵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배치되는 명백히 틀린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과오를 범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으며, 잘못임이 확인되었을 때는, 침묵하기보다 지적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입니다(치리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성경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성도에게 있어서 비판은 완전 금지된 선악과와 같은 것인가?

   ⊙ 본문과 아주 유사한 구절은 아무래도 롬2:1-8절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남을 판단하는 자에 대한 질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이 구절만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 바울은 1장에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는’ 현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 사례로서, 먼저 동성애를 지적하고(1:26-27), 이어서 21가지의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1:29-31).

      ○ 그러면서 32절 하반절에서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2:1절의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일반론적인 대명사가 아니라 1::32절의 ‘옳다’고 판정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지시 대명사로 보아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악한 사람이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2:1-8절은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까지를 금하면서 오직 묵인과 침묵을 강조한 말씀이 아닙니다.

      ○ 결국 이 구절은 무조건적인 묵인과 침묵이 하나님의 본 뜻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도는 선한 지혜를 사용하여 잘 살펴야 함을 간접적으로 교훈하는 말씀으로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 본문과 유사한 또 다른 곳은 약4:11-12입니다. 여기서도 비방과 판단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제한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절은 최소한 4장 전체를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 먼저, 1절에서 싸움의 원인은 정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욕이란 세상적인 것(마귀적인 것을 의미합니다)을 지칭합니다(4절).

      ○ 그리고 7절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과 마귀를 구별하려면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알 수가 없겠지요? 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이십니다(12절). 그렇다면, 지혜에 비추어 진리와 거짓을 구분해야만 합니다. 이는 판단권의 문제가 아니라 슬기의 문제입니다.    

      ○ 또 16절에서는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것이요 마귀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정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4:11-12절 말씀의 전반적인 의미는, 세상적인 정욕을 위한 싸움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무조건적인 비판(구분 내지 판단) 금지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슬기롭게 진리와 허위를 잘 분간하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뜻입니다(고전6:1-5절을 별도로 묵상해 보시면 좋습니다).

   ⊙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신 일이 있습니다(마21:12, 막11:15, 요2:14). 이때 예수님께서는 매우 화를 내시며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대상은 성전에서 제사에 도움을 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즉, 매매하는 자들/돈 바꾸는 자들/비둘기파는 자들입니다.

      ○ 우리는 쉽게 성전에서는 매매나 환전을 해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신14:25-26절에 보면 예루살렘과 너무 멀리 떨어져서 제물을 가지고 갈 수 없는 경우에는 대신 돈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에서 제물을 사도록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통용 화폐인 로마 또는 헬라 돈을 이스라엘 화폐로 바꾸는 것도 타당성이 있습니다(우상의 그림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들 화폐는 성전에 바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매매나 환전은 용납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문제는, 이들이 비록 타당한 일을 하고는 있으나, 적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이들 상인들은 제사장들과 짜고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심한 경우 15배의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청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뜻은 이들의 물질/세속/종교주의적 현상을 청소한 것입니다.

      ○ 당연히 질책 받아야 할 나쁜 현상입니다. 어찌 보면, 현상 자체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꾸지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속 마음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예수님도 비판을 하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용에 관한 지적입니다.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비판 자체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내용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허위를 조장하여 남을 비판하는 것은 엄격히 금해야 합니다만, 진리를 왜곡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문제는 절대로 그냥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때는 과감히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의무가 되기도 합니다.

   ⊙ 복음서에는 또 예수님께서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민망할 정도로 비판하는 것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마23:33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극단적인 비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경우도 많았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이러한 언행은 ‘비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무조건적인 비판금지를 명령하고 있다고 지레 짐작하는 것은 큰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 구약을 예로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죄를 범한 후,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 나단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시편51편이 바로 이 사건을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만약 여기서 나단의 비판이 없었다면 다윗이 스스로 잘못을 알고 회개하였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쳐는 주셨겠지요. 하지만 나단의 비판을 너무 무가치하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옳은 비판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예입니다.

      ○ 한편 솔로몬은 반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은총을 받아 가장 지혜롭고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에게는 옳은 비판자가 없었습니다. 천 명에 이르는 왕비들을 거느리며 늙어서 이방신을 섬기는 과오를 범할 때, 아무도 이를 비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찢어지는 원인제공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더욱 분명한 예입니다. 늙은 신하들의 옳은 비판은 묵살하고 젊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라가 나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요. 참 비판의 중요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 구약 역사에 기록된 모든 지도자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옳은 비판에 귀 기울인 자들은 성공하였고 무시한 자들은 실패하였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비판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이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예, 무조건적인 비판금지가 옳은 것이 아니라, 진실한 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진실한 비판과 허위의 비판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전제조건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비판은 성도들이 머리 속에서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금지된 선악과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며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비판에 관한 올바른 자세

   ⊙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정욕에 의한 성도 간의 비판은 엄하게 금지하고 계시지만, 진리와 거짓 사이의 슬기로운 판단까지를 금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잘 구분하여 속지 않도록 권면하고 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마5:37입니다(이와 동일한 내용이 약5:12절에도 있습니다).

      ○ 마5:33-37절은 ‘맹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보통 이것이 전부인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이 구절에는 오늘 묵상 주제인 ‘비판’과 연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 맹세란 자기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의 확신으로는 참과 거짓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확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것이라 확신되어도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맹세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참 중요한 말씀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바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yes be yes, no no)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는 아니 됩니다. 수용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기준은 성경입니다. 여하튼 무슨 말이든 해야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 바로 이때, 자신의 확신이 아닌 성경 말씀을 기준하여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결국 무엇입니까? 예, 무조건적인 비판금지가 아니라 분명한 의사표명(분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지요.

   ⊙ 앞에서 본문의 일차적 교훈은 ‘교회 밖을 향한 비판의 금지’에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절대적 비판금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의 이차적 교훈도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이 무조건 비판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 내의 무수한 비판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내에서 침묵만 해서는 아니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회자의 견해에 대해서까지 비판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적용할 때는 신앙을 걸고 비판해야 합니다. 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개인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말씀으로 위장할 때도 이를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상고하건데, 참 지도자는 비판에 겸손했으며(다윗과 아합 비교), 참 비판자가 없는 지도자는 불행했습니다(다윗과 솔로몬 비교). 그러므로 본문에 숨겨져 있는 이차적 교훈은 ‘교회 안에서의 올바른 비판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비판의 기준은 결코 인간(목회자 포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의여야 합니다(하나님의 의란 자기부정에 이은 성령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레19:17의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공동번역)는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만약 이웃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지적하지 않은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무조건적인 비판금지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 일반적으로 비판은 자신은 정당화하면서 타인을 정죄하는 기능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인격자’라고 부릅니다. 성경 역시 타인에게는 관용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자신을 비판하거나 나아가 교회 내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성도 및 교회의 성찰)은 오히려 타당한 일이며 이는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나가기.

   ⊙ 그렇습니다. 성경은 무조건적인 비판금지만 강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비판은 교회를 교회답게,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필요조건입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를 암시하듯, 절대적인 비판 금지는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의 실족을 방조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현재 한국교회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건전한 비판의식의 결여에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 말은 절대적으로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맹신이 한국교회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까지 악화시켰다고 봅니다(목회자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오해한 것입니다. 목회자도 실수할 수 있음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 묵상처럼 성경은 오히려 건전한 비판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합당한 비판은 교회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성도의 거룩한 임무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는 어디까지나 사랑 안에서입니다(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비판과 격려는 곧 사랑입니다).  

   ⊙ 비판 금지는 그냥 ‘좋은 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목회자나 성도에 대한 비판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생각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잘못에 대해서는 엄히(가혹하리만큼) 경계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갈2:14절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 총괄적인 결론을 요약하겠습니다. 앞에서 ‘교회 밖’과 ‘교회 안’으로 구분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는 조금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성경의 실제적 의미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즉, ‘자기 자신 밖으로의 비판은 엄격히 금지되고 자기 자신 안으로의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다른 말로는 ‘성찰 또는 반성’이라 합니다. 개인에게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질입니다. 이 묵상은 이러한 생각의 범위를 조금 넓혀 교회 차원까지 확대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교회 내로의 성찰에 실패했고 그로 말미암아 현재의 수많은 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을 ‘교회 밖의 세상’까지로 확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 침묵으로 인내해야 할 경우라면 침묵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으로 경계해야 할 경우라면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교회를 교회답게 가꾸어나가는 옳은 행동입니다. 그 판단 기준은 성경말씀이며 이를 잘 해석하는 뱀과 같은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 좀더 깊이 묵상해 보시기를 권고해 드립니다. 샬롬. ♥

김형주

2006.06.15 06:02:46
*.173.42.18

정순태 형제님,
성경 말씀에 근거한 형제님의 묵상에 늘 감사하고 또 은혜받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형제님의 성경 지식과 믿은에 부러운 마음이 한없이 듭니다.
비판에 관한 형제님의 말씀, 지식적으로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헌데 반대로 제가 지금 비판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선뜻 나서기가 형제님의 글을 읽기전보다 더 어려운 마음이 듭니다. 오히려 형제님의 글을 일기 전에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나서고 싶다는 그런 심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저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저의 생각이 세상적인 것이라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공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비판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형제님의 성경말씀에 근거한 더 많은 묵상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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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공평하신하나님 3부 김문수 2006-06-14 1089
» [묵상나눔과 제언] 비판은 무조건 금지되어야 하는가?(본문 마7:1-6) [1] 정순태 2006-06-10 1176
283 공평하신 하나님2부 [1] 김문수 2006-06-07 1684
282 [묵상나눔과 제언] 예배당 건축헌금의 문제 [2] 정순태 2006-06-06 1517
281 공평하신하나님 1부 뒷이야기 [2] 김문수 2006-06-05 1102
280 공평하신 하나님 1부 김문수 2006-06-03 1166
279 목사님. 히4:3 에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준 2006-06-01 1697
278 [re] 목사님. 히4:3 에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2] 운영자 2006-06-02 1482
277 [묵상나눔] 종교성의 허와 실 [3] 정순태 2006-05-27 1554
276 주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1] 박승규 2006-05-20 1232
275 목사님 삼위일체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이대웅 2006-05-18 1308
274 목사님께 산마루 2006-05-12 1677
273 [re] 목사님께 운영자 2006-05-12 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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