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기도

조회 수 1300 추천 수 70 2007.07.30 11:47:14
기도 (對神관계) (산상수훈 연구 8, 1931년 9월, 32호)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어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이미 제 상급을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 쓸 것을 아시느니라.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정당한 관계에 있은 다음에라야 다른 모든 행위가 다 바른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행동이 바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위에 선하려거든 우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순결하고 정당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 문제는 모든 행위의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5절에 외식하는 자라 함은 지난 강의에서 자세히 밝힌 바와 같이 hypokrites 라는 단어이다.   마음에 없는 웃음도 잘 지으며, 슬프지 않을 때에 눈물 뿌려 울며, 의에 대한 감응력이 없으면서도 의인의 넋을 연출하는 등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으로부터 위선자란 의미로 통용되었다 한다.   우리 조선의 아름답고 귀중한 관혼상제 예절이 이를 잘 지키려는 결과로 도리어 허례허식으로 빠져감을 가끔 보는 것처럼 유대민족 대부분이 조선민족의 조상숭배보다도 더한 열성으로 예배하던 하나님께 대하여도 허위가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께 향하여 올려야 할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되고, 경문(經文)을 크게 하고, 옷단을 넓게 하게 되었다. (마태 23:5) 이것은 하나님 앞에 견딜 수 없는 가증한 일이었다.    

예수의 성격은 어린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 선 것처럼 조용하셨고 연기나는 아마(亞麻)도 끄지 않으셨다.   그러나 때로는 크게 웃거나 노하실 때도 있었다.   대개 위선을 대할 때였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위해 했던 소원처럼 (마태20:21) 저급한 소원은 차라리 죄 없다 하였거니와 하나님께 향한 기도를 사람 앞에 보이려는 심사만은 도저히 하나님께 통하지 않음을 알 것이다.   기도의 첫째 요건은 주변에 사람이 없이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여 심정의 진실대로 토로함에 있다.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는 종교생활에 가장 중요한 3대 선행이었다.   특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은 유태민족에게 각별히 중대한 일이었다.   시조 아브라함 이래로 유태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였다.   저들은 애굽에서 노예되어 평일에는 개와 말같은 고역에 복종하면서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여호와께 예배드리기를 잊지 않았고, 바벨론에 포로되었을 때에도 감방의 창문을 열어 제치고 기도하는 일은 중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예배와 기도에 정성을 다하였음은 물론이어니와 특히 회중이 회당에 모여서 기도하는 일은 특별한 효과가 있는 일이요, 따라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를 공연히 통과하는 자는 가자 큰 죄악을 범하는 자인 것처럼 인정하게 되었다.   또 경건한 랍비 중에는 천진하게도 '거리 어구에서' 기도 삼매경에 빠져서 임금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며, 독사가 해하는 것도 모르던 사실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후 예전과 같은 내적 신앙은 없으면서도 경건한 종교생활의 틀은 오래 남아서 외적 경건만을 치장하고, 회당 또는 거리에서 허위의 기도를 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위선자 무리를 향하여 "제 상급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다.

6절에 '골방에 들어가'라 함은 열왕기 하 4장 33절, 이사야 26장 20절에 '문을 닫고'라든가 '밀실에 들어가'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애절한 기도를 드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지껄이며 떠드는 장소보다는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홀로 마주 앉는 편이 더 자유롭게 진정으로 토로하기에 적합한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공중 기도를 금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 당신도 함께 하시겠다 하셨다.   다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때는 기도 본래의 의의를 망각하고서 여러가지 불순한 것이 섞일 위험이 많다.   하나님만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할 기도가 회중의 이목을 고려하여 억양과 곡조를 붙이거나 교묘한 말과 격렬한 구절을 나열함으로써 회중의 감동을 진작하려는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벌써 기도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기도의 가면을 쓴 일종의 연설이 되고 만다.    

또 "하나님이여 내가 감사하옵기는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토색하고 불의하고 음란하지 아니하고 또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이니이다.   나는 7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누가 18:11~12) 함은 감사의 가면을 쓴 자기 칭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지 못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공중 기도에는 특히 눈 앞의 사람을 개의치 말고 하나님 앞에 엄숙히 홀로 선 자로서 기도할 것이며 그러한 불순한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서는 골방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 한다.   이 '골방'이라 함은 글자 그대로 골방 뿐만이 아니라 동트기 전의 숲속, 강 기슭, 넓은 들, 산 속, 바닷가 모두 하나님과 교통하는 장소로서는 훌륭한 '골방'이 될 것이다.

7절에 "이방사람의 중언부언....."이라 함은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와 여러 군중이 모여 바울 일행에 대항하면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했다고 한다.   또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갈멜산에 모여 숫송아지를 잡아 놓고 바알 신에게 기도하기를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기를 아침부터 정오까지 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    그때에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말하길 '큰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이라 묵상하고 있는가.   혹 어디 갔는가.   혹 길을 가는가.   혹 잠이 들었는가.   그러면 깨워야 하겠다' 하니 이에 저들이 큰 소리로 부르다가 규례를 따라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상하여 몸에 피가 흐르는지라.   이에 정오가 지나고 저녁 소제를 드릴 때까지 그리할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 한다. (열왕기 상 18:26~29) 아데미 신이나 바알 신뿐만 아니라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에는 이 중언부언하여 두 시간이나 혹은 종일토록 반복하는 기도방식이 공통적으로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도가 나무아미타불 혹은 남무묘법연화경 등을 몇만 번을 창송하며, 카톨릭에서 주기도나 아베마리아를 부르기 위하여 염주를 사용하는 것이며, 기타 천리교, 천도교, 시천교 등에 역시 비슷한 방식이 있음은 다 잠든 신을 깨우려고 하는 공통한 심사에서 나온 것이다.   신도가 열성과 고통을 다하여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함으로써 신의 응락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기독교는 이 점에 있어서 다른 허다한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신은 '어디 갔거나, 길을 가거나, 잠자고 있는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하는 것처럼 중언부언으로 수시간 혹은 반나절이나 종일을 수고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많은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신다 하셨다. (이사야 1:15)

물론 기독자도 중대한 간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듣고 허락하실 때까지 같은 기도를 새로운 기운으로 반복할 때가 있다.   예수도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는 세 차례 반복하여 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한번 한번이 다 그 가슴에 피가 맺히고 생명이 뛰노는 말이었다.   형체만 떠도는 이교도의 중언부언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이었다.   기독자 중에도 혹은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온몸으로 뛰며, 이상한 소리로 절규하며,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듯이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여 결국에 하나님이 지쳐서 물러나는 확신을 갖고 기도의 선수로 자임하는 신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다 하나님을 저능아로 취급하려 함이며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모르는 소치이니 중언부언하는 이방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 쓸 것을 아시느니라" 한다.   8절의 전반부의 뜻은 명료하다.   '저희를 본받지 말라' 함은 위선자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즉 기도는 본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사람에게 들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회중이나 거리에서 기도할 필요는 없다.   진실한 영적 욕구이거든 기도의 장소가 못 될 곳이 없다.   그러나 공중 기도에는 기도의 본질을 소멸시키고 위선의 죄에 이끌리는 유혹이 많으니 될 수 있는 대로 골방 혹은 산이나 계곡에 들어가 오직 하나님하고만 교통하라.   이것이 참 기도니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계시사 그런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중언부언하지 말라.   네 열심으로 기도가 성취되는 줄로 알지 말라.   '기도의 능력'이란 것이 네가 가지고 있는 줄 망령되이 믿지 말라.   하나님은 우상과 같이 죽은 하나님이 아니요, 산 하나님이시요, 너희 아버지시다.

이상으로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지 말 것이며 또한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참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기도에 관한 제일 중요한 준비는 다 되었다.   이 위에 주기도문에서 좀 더 상세한 부분과 실제적 방면을 배우면 기독교의 기도생활을 시작함에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8절 하반에 이르러 우리는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점을 깨우친 줄 알았던 것이 갑자기 먹구름에 휩싸이는 것을 깨닫는다.   이 먹구름이란 "너희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 쓸 것을 아시느니라"는 구절이다.   근근히 기도의 방법을 깨우쳐서 기도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아주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 사무친다.   구하기 전에 알고 계시다면 기도하여 구하는 일은 헛된 일이 아닌가? 하물며 선한 것을 그 자녀에게 주시기를 아끼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냐? 구할 필요가 무엇인가? 또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이시니 그 자녀가 구하지 않을 때에도 선한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또한 때로는 간구할지라도 그 자녀에게 뱀은 주시지 않으심은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감사하는데 (고후 12:7~)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체험을 하지 않고 이론만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종류의 문제다.   우선 이것을 설명하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것을 충분히 의식한 다음에라야 된다.   권리와 의무의 관계가 아니요, 사랑의 관계다.   용무가 있을 때 만나는 처지가 아니요, 아침 저녁으로 보기 쉽고 나갈 때 아뢰고 들어올 때 만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관계다.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식은 그 아버지께 받아서 기뻐하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주어서 기뻐하는 관계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기도는 단지 얻으려는 희구가 아니다.   기도한 대로 응답이 있어도 좋고, 응답되지 않아도 감사뿐이다.

그렇게 교통하는 동안에 아들의 아버지께 대한 신뢰가 나타나니 아버지가 이를 즐겨하신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이것이었다. (요한 14:8~9, 10:30, 5:30, 6:38, 누가 6:12 등 참조) 기도가 그대로 응답이 없을지라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어 부자지간의 순수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진전하여 가면 기독자의 기도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누가 11:13) 기도하며 구하는 자에게 성령은 거부하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기도의 결과로 성령을 받았으면 실질적으로 모든 구한 것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기도는 "무엇이든지 빌고 구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 믿고" 한다. (마가 11:24) 감사한 일이다.    

기도 문제같은 것을 입체적 문제라고 하고 싶다.   평면에 서서는 영리할수록 깨닫지 못한다.   로마서 1~7장까지의 경험을 가지고 그 3장 8절을 음미한 후에 기도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납득됨에 도움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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