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검을 가진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라신다. 검, 검이라 하면 말씀이 먼저 떠오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예리한지를 우리는 모두 안다. 그 말씀의 검을 가지고 그럼 누구를 잘라야할까? 마귀일까? 이웃일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해 의분을 터트린 베드로의 모습은 오히려 용맹스러워 박수라도 짝짝짝 쳐 주고 싶은 심정이다. 스승을 지켜드리고 싶은 충정을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그는 검을 뽑아 말고를 향해 찔렀다. 다행히 피한 말고는 귀만 잘려나갔다. 그는 얼나마 놀랐을까? 느닷없이 들이미는 칼에 귀가 잘려나갔으니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줏어서 다시 붙여주셨다. 어쩌면 흙이나 먼지가 묻은 것을 후훅 불며 털어서 붙여 주셨을 것 같다. 그 인자하심은 죽음 앞에서, 검과 몽치를 든 자들 앞에서 여지없이 사랑이심을 보여주신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은 늘 그렇게 가슴 뭉클이며 우리의 강퍅한 심장에 들어오신다. 그리고는 베드로를 책망하신다. 검을 가진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간 나는 말씀에 비추어 옳곧아야함을 이웃들에게 어지간히도 들이밀면서 살아왔다. 스스로는 참 잘 하고 있다고 착각을 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아침마다 자신의 못남과 자신의 연약함에 한숨쉬고 아파하였지만 그렇다고 이웃들의 잘못을 그냥 보아줄 수는 없었던 듯 싶다. 때문에 지역의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나의 칼을 세우는 방향이 되었었다. 그들의 돈사랑이, 그들의 자기 배만 채우는 목회방향이 늘 내 입에선 "너나 잘하세요" 하는 신음이 새어나오지 않는 날이 없도록 했다. 어쩌면 나의 현실의 고통보다 더 가슴 저린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의 현실의 문제로 기도하기 보단 목회자들의 돈 사랑 앞에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였고 그들을 향해 분노하였다.
뒤돌아 보니 나의 연약함과 못남에 한숨만 쉬었을 뿐이였지 주신 검으로 나의 어떠함을 잘라내는 일은 행하지 못햇음을 발견한다. 그 검으로 말씀에 비추니 모든 목회자들의 잘못되었음만 커다랗게 눈에 띄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스스로 받고 있었던 것이였다. 검은 갈고 닦아서 나를 향해 겨누어야함을 배운다.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모습으로 눈이 범죄하면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손을 잘라 버리는 그 일을 끊임없이 행해야함을 배워간다. 그 좁은문은 얼마나 좁디 좁은지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는 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시고 도무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문을 당신의 온 몸으로 박차고 부수고 들어가 주셨기에 자그마한 어린 양들은 예수님의 뒤를 졸졸졸 그저 따라가면 된다. 이제 선물로 주신 검은 수시로 나의 죄악의 꾸러미들을 들여다 보며 한숨만 쉬기 보다는 여지없이 잘라내는 일을 쉼없이 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뒤뚱거릴지라도 졸졸졸 그렇게 따라가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