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책
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전자책으로 편집하여 2015년 10월부터 누구든지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던 조치를 오늘(9/25/2024)부로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마지막 사역을 그동안 올렸던 많은 글을 신규로 올릴 글들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리 편집하여 책으로 남기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대금을 주고 구매하시는 분들과의 형평성을 맞추고 또한 저의 인터넷과 출판을 통한 기독교 문서 변증 사역의 활성화를 위해서 정기 헌금 회원에게만 계속해서 무료 다운의 혜택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동안에도 기도로 물질로 후원해 주신 회원님들께 나름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므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고 계속해서 주님 안에서의 따뜻한 관심과 후원을 보내주시길 소원합니다. 이 “운영자책” 사이트는 회원전용의 파일을 다운받는 페이지와 누구나 책별 서문과 차례를 확인할 수 있는 페이지로 나눠질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진짜 이유

조회 수 2751 추천 수 1 2015.11.05 17: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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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제가 아는 중국의 한 선교사님이 중국어로 번역하여서 스터디 그룹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 소식을 전해온 내용 중 일부입니다. 혹시 중국어 번역본이 필요하시다면 운영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 주십시오. (9/1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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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장장 5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첫 번역 자매가 5월에 번역을 끝냈으나 퇴고 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습니다.

저까지 총 4명의 자매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결실입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들이 있겠지만 읽는 분들이 목사님의 설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됩니다.

번역의 과정과 퇴고의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책을 읽으며 많은

깨달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이렇게 저희에게 말씀을 다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하나님과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지금 한  중국어 자매들 그룹에서  책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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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들어가면서 4

 

하나님의 특정한 뜻을 구하지 말라. 12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대한 오해

왜 소돔에 들어가 살지 않는가? 38

  신자가 하나님께 받은 복 대한 오해

비전을 크게 품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63

  신자가 품을 비전에 대한 오해

하나님께 주문을 외우지 말라. 88

  신자가 가질 믿음에 대한 오해

평안은 위장된 축복일 뿐이다. 110

  신자가 당할 시험에 대한 오해

큰 믿음으로 큰 용사가 된다는 것은? 130

  신자가 해야 할 큰일에 대한 오해

믿음 위에 자기 실력도 쌓아라. 152

  신자가 싸워야 할 전투에 대한 오해

필요한 것은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라. 174

  신자가 드리는 기도에 대한 오해

가슴 대신에 오히려 머리로 믿으라. 195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오해

당신이 이미 창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가? 219

  신자가 겪는 고난에 대한 오해

 

 

 

 

 

 

들어가면서

 

 

목사 입장에서 새벽기도에 뜻밖의 신자가 나타나면 꼭 반갑지만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하루를 시작하려기보다는 암이나 사업부도 같이 중대하고 위급한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더 높기에 염려가 앞섭니다.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전통입니다. 신자들이 무릎 꿇을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왕성해지기에 한국교회 부흥이 새벽기도에 힘입은바 큽니다. 그럼에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부작용 내지 폐해가 있습니다. 그 여파가 심각할 수 있는데도 거의 인식 못하는, 인식해도 겉으로 쉽게 문제 삼지 못하는 잠복성 고질병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야 기도하는 것은 전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백번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일 외에는 실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새벽기도가 신자들로 믿음을 그렇게만 적용시키게 만드는데 알게 모르게 일조해왔습니다. 새벽예배에 초대하면서 고난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다는 명목을 가장 앞세웠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할머니들이 새벽마다 장독대에 물 떠놓고 손 비비며 가족들의 안녕을 간구하는 식의 믿음으로 각인되어버린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부정적 이미지 중의 하나는 광신자적인 행태일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 통성으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빠른 박자의 찬송을 박수 치며 부르고, 교인끼리 몰려다니며 열성적으로 전도합니다. 교회 안에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소망하는 뜨거운 신앙이라는 긍정적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교회 밖에선 기독교 교인들만의 잔치로 밖에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열정적인 모습이 왜 나타납니까? 문제를 당장 해결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 밖의 위급한 환난에서 빨리 빠져나가려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절실하니까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 행사를 성공적으로 빨리 수행하려 해도 물불 가리지 않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우울증 같은 내면의 상처를 고치는 것도 뜨겁게 찬양해야만 조속한 효과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물론 당장에 겪고 있는 문제와 고통에서 구원해달라고 간구한 것일 뿐 따로 큰 욕심을 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겪는 일을 해결하는 데만 믿음을 동원하다 보면 평생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너무나 초라한 신앙 밖에 되지 않습니다. 문제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닥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인생에는 죄가 불변의 상수(常數)가 되었기에, 신자라고 결코 예외가 아님, 고난은 끊이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믿음으로 고난과만 싸우면 하나님 나라와 의는 언제 어떻게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

 

강단에서 주로 강조하는 내용도 무엇입니까? 믿음을 키우라, 성숙시켜라, 강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키가 자라는 아이처럼 믿음 자체가 실측(實測)이 가능한 객관적 실체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자기 믿음이 잘 자라고 있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수시로 점검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바꿔 말해 믿음이 특정 시점에 신자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 신뢰, 소망, 경외심 등의 크기와 동의어인 셈입니다. 자신의 신앙적 정서와 그것이 현실에 반영되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종(縱)으로 잘라 그 단편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불안하니까, 지금 성경을 안 보니까, 지금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지금 남을 용서하지 못하니까, 지금 봉사하지 않으니까, 믿음이 나쁘다고 간주합니다. 그와 동시에 믿음이 나빠졌기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믿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는 당연히 믿음이 좋다고 판단합니다. 믿음을 실측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급한 일을 해결해 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최대한 빨리, 많이 불러올 수 있는 실력이 바로 믿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를 열심히 해야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데 그렇게 안 되면 믿음이 안 좋은 것입니다. 또 순전하고도 굳건한 믿음으로 기도해야만 응답을 잘 받을 수 있다고 배웠기에 응답이 잘 안 되면 자기 믿음에 불순물이 생겼거나 약해졌다고만 생각합니다.

 

믿음을 결과적 외형적으로만 살피면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의 본질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믿는 믿음이 줄었다 늘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의심 내지 불신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 턱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전혀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단순히 의지하지 않습니까? 때로 서로 간의 감정에 기복은 있을지언정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관계는 절대 수정, 가감, 번복, 포기되지 않습니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믿음의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자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성령님이 신자에게 내주하시어 평생을 두고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가는 곳마다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이 무너뜨릴 수 없는 그분의 자녀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 그 관계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취소, 수정, 방해 받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믿음이 나빠졌다고 여기는 내용의 대부분이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자체가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로 둘 사이의 교류(fellowship)만 약해진 것입니다. 마치 부모 자식 관계는 절대 변함없지만 잠시 서로 교통하는 일에서 소원해질 수 있듯이 말입니다.

 

****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신자가 자신의 신앙 여정 가운데 순간적으로 찍히는 한 개의 발자국 믿음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발자국을 얼마나 선명하고도 깊숙하게 찍을 수 있을 지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전체 여정을 합쳐서 위에서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천국까지의 길 전체와 발자국들 모두 모은 그림은 전혀 그려내지 못합니다.

 

결국 한국 신자들의 세로로 가른 단편적 믿음은 세계 최고지만 가로로 연결한 일관된 믿음은 세계 최저일 수 있습니다. 종교적 행사를 “으샤!, 으샤!” 치르고, 정형화된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모여서 뜨겁게 찬양 기도하는 일은 아주 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키우고 싶었던 믿음의 실체는 오히려 아래위로 요동칩니다. 나중에는 교회에서 그런 행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교회 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실제 삶은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평생을 두고 주님과 함께 이름도 빛도 없이 걸어가야 하는 싸움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회용 인스턴트 믿음에만 집착합니다. 신자나 교회나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당장의 열심만 고취시키려 듭니다.

 

한마디로 믿음만능주의입니다. 현재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일 외에는 믿음을 동원하지 않으니까 필연적으로 믿음만능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도 오직 그런 관점으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 안에서는 어떤 환난과 핍박은 물론 세상 죄악까지 얼마든지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다는 순전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소원하는 무슨 일이든 믿음으로 밀어 붙이면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만능주의만 성행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

 

믿음 만능주의는 경건한 일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어떻게 하든 빨리 의롭게 바꾸려고 뜨거운 믿음으로 교회생활에 열심을 다하라고 권합니다. 비록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한 일이라고 해도 여전히 당장 변화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권면을 접한 신자로선 믿음의 세기와 열성을 높이면 그런 변화가 쉽게 달성될 것이라고 기대 내지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제 때에 원했던 정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아무래도 믿음이 약한가봐! 아직 믿음이 더 자라야 하는가봐!”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차츰 그런 실망이 누적되면서 습관적 형식적 나태한 신앙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동기가 아무리 선해도 믿음만능주의로 파생되는 대표적인 부작용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믿음만능주의는 하나님 대신에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일을 이뤄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믿음조차 소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는 수단이자 능력으로 오인합니다. 의도한 결과를,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열매라 해도, 이루지 못하면 무조건 믿음이 약하다고 치부하지 않습니까? 역으로 믿음만 좋았다면 쉽게 이룰 수 있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

 

성령의 중생(重生)과 죄 씻음의 역사로 이끄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고는 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구원 후 성화의 과정에도 성령의 인도와 간섭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만이 성도를 거룩하게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만능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과 섭리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비록 그것이 믿음을 키우는(?) 것이라고 해도,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작금 강단을 오염시키는 기복주의, 성공번영신학, 긍정신학 등의 일관된 흐름이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고통을 믿음을 동원해 해결해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의도는 분명 신자의 유익을 도모하기에 선한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믿음 그 자체를 고난을 해결해내는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뜨거운 믿음이 동원되어도 인간이 가진 믿음의 크기에 따라 문제가 해결되면 그 일을 해결한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입니다. 요컨대 믿음만능주의는 사실상 인본주의와 다름없습니다.

 

기독교 이단의 발현은 거의 모두 인본주의에 기인합니다. 믿음만능주의가 인본주의의 변형된 모습이라면 자연히 이단으로 흐를 소지가 생깁니다. 그런데도 인본적인 믿음만능주의가 수많은 강단에서 신자가 본받을 좋은 믿음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암처럼 아무 고통 없이 은연중에 번져 나가고 있으며 그 부작용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 밖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을 낳는 주범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성경적으로 올바른 자리로 되돌아오기 위해선 믿음만능주의는 척결 내지 수정되어져야 할 대상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지금껏 믿음만능주의로만 해석하다 보니 잘못 혹은 부족하게 가르쳐져 온 성경의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필자가 문서사역을 위해 운영하는 홈페이지“왜 오직 예수인가?”(www.whyjesusonly.com)의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에 올린 글들의 일부입니다. 틈틈이 써서 올리다보니 특정 주제에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일반적 오해를 다뤘습니다.

 

구약성경부터 다루다 보니 더 중요한 신약의 예는 이 책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아니 당연히, 신약의 사례들도 계속 살펴볼 것입니다. 신약에선 믿음만능주의의 또 다른 유형인 복음만능주의를 주로 언급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니까 그냥 예수를 아주 쉽게 믿는 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복음만능주의가 불러오는 폐해도 만만찮은데 겉으로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앞장세우니까 아무도 섣불리 딴죽을 걸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일관된 요지는 믿음이 결코 특정한 하나님의 일과 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종교적 실력처럼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너무나 부족한 이해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나고도 풍요로운 내용을 함의(含意)합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은혜와 권능 속에 이미 들어온 것입니다. 신앙을 단순히 눈앞의 일들을 해결해내는 능력으로 간주하면 그 외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입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 글들이 기존의 믿음에 대한 인식을 보완해서 진정한 신본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만능주의에서 오직 예수 십자가 중심주의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미국 LA 우거(寓居)에서

 

박진호

 

 


수정수

2018.05.01 03:04:56
*.231.11.157

감사합니다.

날마다순종

2019.02.28 16:14:57
*.14.99.253

감사합니다, 샬롬~

유수

2019.12.09 15:54:45
*.23.227.163

감사합니다.  올바른 신자가 되기 위하여 열심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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