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칭의는 지금과 달랐다.
창세기강해 (74)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창15:1-7)
지나치게 강조되는 칭의 교리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이 그의 의로 여겼다고 말한다. 그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던 일과 마찬가지로 이는 율법을 수여받기 훨씬 전 약 500년 전의 일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그분의 선물이지 인간이 율법을 준행한 공로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바가 있겠지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고 반문했다. 그 성경은 바로 오늘의 본문을 지칭하는데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저의 의로 여겼다고 본문내용을 재확인하고 있다.(롬4:2,3) 한마디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의 길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계기였고 또 그 개혁으로 얻은 가장 큰 열매다.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만드는 교리로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런데 최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야기되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당신의 죄를 사해주신 그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도한다. 자칫 교리 자체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양 간주한다.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너무 교리적으로 접근 적용함으로써 실제적인 삶의 변화는 따르지 않는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신앙이 되었는데 목회자들이라고 크게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롭다고 선언한 이유와 그가 믿은 구체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흔히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대변되는 칭의 교리와는 다른 차원으로 성경은 접근 적용하고 있다.
이 일들이 있은 후에...
대부분의 한글성경이 1절을 “이 후에”라고 시작한다. 단순히 시간이 경과된 후라는 뜻으로 마치 13장과 12장이 독립된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게 한다. 원문은 영어성경에서 보듯이 “이 일들이 있은 후”로 앞의 사건과 연결된 내용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수도 없이 강조했지만 성경 원문에는 장과 절의 구분이 없기에 앞뒤의 문맥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이 일들이 무슨 일인가? 최초의 세계대전에서 아브라함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조카 롯을 구출했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소돔 왕의 탈취물을 가지라는 제안을 거절한 일들이다. 그런 일들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 첫마디는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시날 왕을 비롯한 아브라함에게 패배한 4개국에게 그는 원수가 되었다. 아무리 당시에 씨족 혹은 부족국가로 나라 크기가 작았어도 집에서 사병을 키우는 아브라함보다는 군사력이 훨씬 강하다. 만약 다시 4개국이 연합하여 원수를 갚으려 든다면 그로선 게임이 안 된다.
아브라함으로선 내심 그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금 가장 적절한 때에 염려 불안으로 떨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 당신이 방패라고 선언하신다. 자기들 부하의 충성도나 실력이 상당하기도 했지만, 승산이 희박했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 승리를 이미 체험한 지라 방패가 되어준다는 약속은 쉽게 믿고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의 “내가 네의 상급”이라는 약속이다. 상급은 문자 그대로 보상(reward)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무엇을 내게 주시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그가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과 Give and take 식으로 Deal 하겠다는 뜻이었기에 바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복을 달라는 요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소돔 왕이 제안한 재물을 거절했을 리 없지 않는가?
그가 2절 후반부에서 뭐라고 했는가? 나는 무자(無子)하니 내 상속자는 내 집에서 기른 엘리에셀이면 된다고 했다. 당시 중근동에는 자식이 없으면 재산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노년을 부양하고 장례를 책임져 줄 양자를 입양하는 관습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유력자였다. 애굽에서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바로로부터 큰 재물을 받았다. 집에 기른 사병들은 우르를 떠나오면서 중도에 잠시 체류했던 하란에서 그의 인품과 믿음을 존경해 따라 나선 자들이다. 요즘도 직원 400명을 먹여 살리는 회사 사장은 큰 부자인데 당시는 거의 재벌급이라 할 수 있다. 아홉 나라의 쟁투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재물 명예 권세에서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고 다 갖춘 셈이었다.
유일하게 결핍된 것은 노후에 자기를 부양하고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었다. 무자한 것이 평생의 한이었지만 자기는 늙었고 아내는 폐경인지라 아들을 보는 것은 포기했다. 엘리에셀이 나중에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 인품이나 믿음이 상당했다.(창24장) 아마 본문의 때에 아브라함은 그를 벌써 집사장으로 세웠고 나중에 더 늙으면 양자 삼을 작정이었던 것 같다.
자기에게 아들이 없다는 말은 모든 것 다 가져도 아들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 다 없어져도 아들 하나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주어도 아들을 안 주시면 사실은 아무 것도 안 준 것과 같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받을 상급은 오직 아들인데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상이라고 하니까, 당신이 나를 노후에 어떻게 부양할 것이며 직접 장례를 치룰 수 없지 않느냐는 불만이 솔직히 그 내심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었던 까닭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심령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는 없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된다고 약속했다. 친 아들이 생길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 약속이 과연 믿을만한 약속인가? 아닌가? 여러분 생각에는 어떠한가? 체외수정이나 시험관 아기 등 첨단 의술이 발달된 21세기에도 여자의 태가 없이는 임신은 100% 불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에게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선뜻 믿었으니 도리어 이상한 것 아닌가? 그것도 한 순간의 주저와 의심도 없었다. 완전히 순전하게 그 약속을 믿었다. 만약 그 믿음에 조금이라도 불순물이 개입되어 있었다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줄 리도 없다.
이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요즘 전도하면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그 분 외에 구원의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라고 복음을 전할 때에 과연 일말의 의심 하나 없이 믿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교회와 목사에게서 의롭다 칭함을 받아도 하나님도 과연 그러실까 진지하게 따져봐야 하는 것 아닌가?
슈퍼맨의 귀환이라는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엔진에 불이 붙어 바다로 침몰하기 직전에 어디선가 슈퍼맨이 나타나 그 엄청난 속도와 무게를 지닌 비행기를 수면 위 몇 미터 상공에서 더 큰 힘으로 붙들어서 야구장 필드에 안전하게 착륙시킨다. 그 비행기 안에 탔던 승객들에게 슈퍼맨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너희 방패요 상급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면 당연히 곧바로 순전히 믿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슈퍼맨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에게서 그런 구원의 체험을 여러 번 받았다. 본문에서 “이 일들이 있은 후”라고 시작하는데 바로 그런 구원의 체험이 있은 후라는 말이다. 세계대전에서 겨우 4 백여 명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애굽에서 바로의 후궁이 된 아내가 풀려나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에게 거짓말이 탄로 났는데도 그 자리에서 처형되지 않고 도리어 큰 재물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인간세상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아브라함의 노력, 능력, 공적이 눈곱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전에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 나올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했다. 당시 상황으로선 죽음을 각오하라는 뜻이었다. 오늘날도 해외 오지에 선교사로 헌신하면 순교는 가능성이 아니라 거의 필연에 가깝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마자 장막도 치지 못하게 멸시를 받아 산꼭대기에 겨우 거처를 마련했다. 또 그런 핍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밀려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단을 쌓고 경배했다. 그의 매일의 삶은 죽음 앞에 놓였던 것이다. “오늘도 죽음에서 건져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일도 어떤 핍박이 기다리더라도 주님만이 방패가 되어서 지켜줄 줄 믿습니다.” 감사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교리보다 체험이 우선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나왔을 때부터 본문의 사건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아는가? 약 10년이 지났다. 그 전에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분명히 있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기 전임에도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갈 바 모르지만 하나님을 소망하며 순종했다. 세상 앞에 믿는 자로 서서 온갖 수모를 감수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 승리를 체험했다. 그런 와중에도 수시로 하나님을 의심 갈등하며 씨름했었다.
하나님과 믿음 안에서 교제 동행했던 10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그리 쉽게 순전하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본문의 때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이미 심중에 그를 의롭다고 여긴 것이다. 본문에선 직접적으로 말로 확인해준 것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후에 의롭다 여겨졌다. 십일조는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하며 내 삶의 주인이 돈과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정확히 따지자면 십일조를 바칠 정도의 믿음이 된 후에야 비로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의 중요성을 깎아내릴 의도는 추호도 없다. 삶의 체험적 믿음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롭다고 여긴다는 음성을,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듣고서 구원의 확신이 먼저 생겨야 한다. 그 후에 칭의 교리를 통해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아니냐는 것이다. 칭의 교리를 믿는 것과 정말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다.
거기다 본문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믿은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인간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바울이 동일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재확인 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것이 바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이지 않는가? 그는 그래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백세 된 자기 몸이 죽었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하나님의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는데 바로 그런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칭해주었다고 선언했다.(롬4:17-19)
실제로 성인이 되어서 주일학교 경험이 전혀 없는 말하자면 이전에 신앙체험이 없는 자가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10중 9이상이 고난 중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온다고 한다. 바로 제가 그랬다. 예수님만이 당신의 죄를 사할 수 있으니 그분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진리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전도하는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고개만 끄덕여 주는 정도였다. 물론 정말로 죄의 문제와 심각하게 씨름하는 의로운 자가 열 명 중 한명은 있을 것이다. 저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너무나 완악했을 뿐이다.
사방이 막힌 절망에서부터...
아시는 대로 저는 사방이 다 막혀버려 출구가 전혀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하늘로 향한 열린 창을 향해 두 손을 벌여보려고 교회에 출석했다. 정말로 간절히 빌면 현실적 경제적 절망에서 건져 줄 것 같은 기대를 갖고 말이다. 막연히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정도의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도 없이는 기도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로 기도를 했더니 하나씩 하나씩 꼬였던 실타래가 풀려나갔다. 대책이 없어서 아예 손을 놓고 있는 문제들이 완벽하게 단번에 쉽게 해결되었기에 하나님만이 하신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대박 같은 은혜를 받지는 못했어도 지금까지 일용할 양식에 크게 부족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차츰 하나님이 꼭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방패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실제로 경제적 파산은 하나님 없이도 성실이 노력하면 재기가 가능하다. 질병은 의료 기술이 발달해 암도 정복되고 있다. 기도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일은 선교지 외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것도 효력이 있는 세속적 합리적 방안이 많다.
정작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는데 교회를 다닌 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면 생판 남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행한 적이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볼 마음을 먹은 적도 전혀 없다.
택시를 타면 운전사 옆에서 잠시 마음으로 사고 나지 않고 손님을 많이 태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물론 불신자 시절에도 기분이 좋을 때는 “운전 조심하시고 돈 많이 버세요.”라는 말은 가끔 했다. 운전할 때 졸지 말고 손님이 많이 타는 운이 따르길 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기사 본인의 노력의 문제 위에 행운이 보태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아주 힘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내 고통과 슬픔으로 다가왔다.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던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기도하려는 소원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또 기도하는 중에 제 가슴이 짠하고 안타깝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일부를 내 속에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도 계획 결단하여 행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하나님만의 일
나아가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했고 정말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목사로서 여러분을 독려하려는 과장이나 저의 의를 자랑하는 말로는 듣지 말아주시기 바란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행한 나의 공로라면 자랑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에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때까지 저는 내 인생을 이 꼴로 실패케 만든 주범 몇몇을 손꼽고 있었다. 내 실력이 모자랐거나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원인을 그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들 보란 듯이 내가 더 출세 형통하여 철저하게 응징해주리라 칼만 갈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그들에 대한 미움의 색깔과 강도가 옅어져 갔고 어느 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이 더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르침에 동의하고 그렇게 하려고 결단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지금까지의 체험으로 알고 있지 않는가?
제가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마음이 생긴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하나님이 내 속에 일으켰기 때문이다. 매주일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과 가르치신 진리의 말씀, 특별히 내 죄 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가 살아났다는 원색적 복음이 제 심령에 완전히 꽂히는 일이 발생했다. 특정한 시간이나 사건이나 말씀을 지적할 수는 없다.
너무나 완악하고 치사하고 교만한 제 내면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견고한 진이 엄청나게 단단하게 벽을 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성령의 간섭으로 역사하면서 그 맨 밑바닥에 있는 벽돌부터 한 장 한 장 빼주셨다. 어느 순간 그 진은 와르르 무너졌고 하나님 저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고백을 했다.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제 볼을 적시고 있는 제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고 크게 놀랬다.
저로선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 높은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 자는 절대로 최고로 낮은 위치로 자발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리 없었다. 제 내면의 근본적 변화는 인간 밖에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긍휼과 자비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시인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것은 분명히 제가 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제 내면을 철저히 깨트린 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 동행하며 누릴 수 있는 은혜와 자유와 평강은 너무 귀했다. 이전과 달리 최소한 어떤 큰 고난에도 요동치 않게 되었다. 세상 재벌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그들 심령에 예수 십자가가 새겨져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헛된 인생임을 알게 되었다.
원수 같은 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니 너무 불쌍해졌다. 내게 분명히 잘못은 많이 범했다. 그러나 이 땅이 전부인 줄 믿고 세상에서 출세와 형통만을 목적으로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부딪힌 결과임도 깨달았다. 저 또한 그런 믿음으로 살았으니 거꾸로 내가 그들에게 원수로 비췰 수도 있겠다고 여겨졌다.
결국 모든 인생의 유일한 해답은 예수뿐임을 확신했다. 그러고 나니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도 정확이 이해될 수 있었다. 나아가 그 교리를 가르치는 이런 영광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만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저에게 상처와 손해를 입힌 원수 같은 자들을 위해 제가 눈물로 기도하는 사이에 예수님이 그들을 변화시켜 주었다. 그 동안 아무런 상호교통이 없었는데도 그들이 먼저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친밀한 관계가 생성되었다. 여전히 관계가 나아지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도 그 동안 제가 당했던 상처와 억울함 등을 하나님이 깨끗이 다 씻어서 원상 복귀시켜 주는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아브라함도 예수를 믿었다.
놀랍게도 본문의 아브라함도 단순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주는 전지전능한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인 것은 물론 본문에선 특별히 그분이 자기의 보상인 것을 믿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가 됨을 믿은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모든 인생의 유일한 정답임을 믿은 것이다.
아들이 없다는 것은 당시에는, 심지어 지금도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고대에 하나님의 벌이란 바로 그분의 구원 밖에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당신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쓰는 일에는 기꺼이 충성했지만 과연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선 일말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전에 우상숭배를 했고 애굽에선 아내를 팔아먹은 큰 죄를 범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 안 주시면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이라는 항변은 사실 하나님이 나를 구원 밖으로 밀어낸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는 약속은 구원 안에 있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확답인 셈이다. 하나님 당신이 보상이라고 했다.
실제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상으로 주셨지 않는가?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여 우리의 썩어질 옛 사람은 함께 죽었다. 또 그분의 부활과 연합하여 우리에게 의와 거룩으로 덧입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아브라함도 예수 십자가 구원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인간이 최대한 노력해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은 딱 하나다. 인류문명이 아무리 최고조로 발달해도 자연 재앙을 포함한 창조의 섭리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자기 죄를 스스로 씻는 일이다. 바로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십년에 걸친 믿음의 갈등과 체험을 겪은 뒤에야 확신하게 되었다. 뒤늦게야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본문을 접하는 모든 신자는 백세에 아들을 주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당연히 믿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어떤 문제와 상처와 고난이 닥쳐도 나의 방패임을 믿는 것은 물론이며 그분이 바로 내 인생에 최고로 중요한 아니 유일한 보상임을 확신하는가? 쉽게 말해 불신자 시절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던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오니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을 나도 모르게 저절로 한 적이 있는가? 그것도 교리적 믿음이 아니라 체험적 고백으로 말이다.
11/27/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