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세계가 흘러가는 방향은?

출애굽기강해(2)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출1:8-14)

 

 

야곱의 필생의 소원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은 요셉이 총리였을 때는 우대를 받았다. 언제부터 종살이가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본문은 모세의 출생을 앞둔 시기이므로 이주 후 약 350년이 경과했는데 숫자적으로 창대해졌다. 전쟁이 나면 대적과 합해 싸우고 탈출할까 애굽이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다.(10절)

 

그래서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우선 노역의 책임량을 대폭 늘려서 체력을 저하시켜 출산율을 떨어트리려 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해졌다.(12절) 첫째 방안이 실패하자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했다. 오늘의 본문은 첫 번째 노동을 강화한 이야기다.

 

어쨌든 애굽의 당시 군사력은 엄청났다. 인구도 당연히 이스라엘보다 더 많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다. 유대인들이 거주한 고센 지역은 애굽 국경의 변두리로 시나이 반도 쪽이었기 때문이다.

 

애굽은 알다시피 비옥한 나일강변에서 밀 농사를 주로 하는 농경국가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목축이 주업이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애굽으로 이주한 자기 일족이 변두리 고센 땅에서 목축하며 자급자족하며 거주하겠다고 요청했다. 요셉의 공로에 감사한데다 애굽은 목축을 비천한 직업이라고 멸시하던 차라 흔쾌히 허락했다.

 

요셉이 그렇게 요청한 배경에는 아버지 야곱의 입김이 작용되었다. 애굽에 섞여서 살면 우상숭배에 물들까 염려한 것이다. 또 언제든지 여건이 성숙되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쉽게 하려는 것이다. 야곱이 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4백년 후에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인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최대한 빨리 돌아갈 소망을 놓지 않았는데 야곱 그만의 이유도 있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얻는 바람에 형 에서의 미움을 사서 하란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다. 도중의 벧엘에서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그 위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을 하셨다.

 

네가 누운 땅을 네 소유로 주고, 자손이 온 땅에 티끌 같이 편만해지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네 후손에게서 복을 받고, 네가 어디를 가든 당신께서 함께 할 것이라며 아브라함의 언약에 더 구체적으로 동참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덧붙이셨다. 너로 이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때의 약속은 피신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무사 귀환함으로써 이뤄졌다. 그 약속이 너무 생생해서 야곱은 애굽에서도 자기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소망을 놓지 않았다. 늙어 병들어 애굽에서 죽게 되자 꼭 할아버지 아브라함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고 그대로 실현되었다.

 

요셉 당시 이스라엘은 겨우 70여명밖에 안 되었다. 목축을 비천하게 여기고 있던 터라 멀리 떨어진 고센에서 살겠다니 내심 크게 환영했다. 이런 사태가 되리라고는 당시로선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혹시 외적이 침입하면 같이 동맹을 맺어 그동안 온갖 고생 핍박 받은 것에 앙갚음할까 염려되었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그만큼 창성했고 지리적인 위치나 그동안에 일관되게 학대한 사정들로 인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걱정인 것 같다.

 

대적의 침입이 두려운(?) 애굽

 

그러나 애굽의 사정을 조금 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시 애굽에 필적할 만한 나라가 인근에 없었다. 대적의 침입을 크게 걱정 안 해도 되었다. 고센에서 가까운 유대인들의 고향 땅 팔레스타인은 애굽의 왕조들이 계속해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미 식민지로 삼아 조공을 받고 있었다. 옛날 한국이 중국을 미워해도 대적할 생각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유일하게 아브라함이 불려나왔던 고대 바벨론 제국만 애굽과 맞먹을 만했다. 그러나 애굽까지 침공해 오려면 중간에 아라비아 사막, 시나이 반도, 홍해 등의 지리적 장애가 만만찮았다. 바벨론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으로 인해 땅은 비옥했고 고대에는 기후가 훨씬 좋아서 크게 번창했다. 구태여 멀리 애굽과 패권을 다투는 모험을 할 필요성은 아직 없었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강함을 알고는 정식으로는 싸우지 않았던 것과 같다. 아프리카 대륙의 애굽의 서쪽 남쪽 지역은 지금까지도 그렇듯이 원시 부족국가들뿐이라 애굽과 상대할 것은 아예 상대가 안 되었다.

 

다른 가능성은 유대인들 자력으로 반란해서 도주하는 것인데 이 또한 거의 불가능했다. 고대에 노예에게 무기를 절대 지급해 주지 않는다. 농사와 건축공사 연장 중에 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철 연장도 있지만 아침에 일터에 나갈 때 나눠주고 저녁에 다 회수한다. 설령 그 연장마저 탈취했어도 칼과 창과 전차 같은 정식 무기에 대항할 수 없다. 군사훈련 한 번 받지 못한 떼거지와 다름없는 유대인들이 전쟁 경험도 많은 애굽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 파는 어리석은 짓인 줄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능성은 한국 전쟁 때에 중공군이 구사한 인해전술이다. 애굽의 경비대만으로는 중과부적일 수 있다. 틀림없이 본문처럼 염려되는 상황이라면 벌써 군대를 증파했을 것이다. 결국 고역을 강화시킨 것은 아예 반란의 꿈도 꾸지 말라고 겁을 주어서 기를 죽이려는 심보였다.

 

나중에 모세로부터 열 가지 재앙을 당했을 때 계속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은 것이 언뜻 이해가 안 된다. 그로 인한 경제적 인적 손해가 국가를 휘청거리게 만들만큼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거나, 그랬어도 재빨리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애굽이 얼마나 초강대국이었는지 반증하는 것이다.

 

결국 본문의 조치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대비해서 사전에 예방하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본문의 시기에 모세가 태어나서 80년이란 세월이 더 흐른 후에 출애굽이 이뤄진다. 그동안에 염려했던 사태는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지 않는가?

 

너무나 아쉬운 공짜 노동력

 

사실상 이 염려는 엄살이었다. 그럼 바로가 정말로 염려한 내용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인건비 한 푼 안 주고 공짜로 사용하는 노동력 때문이다. 체력이 강건한 최고 양질의 노동력이 없어지는 것이 염려스러운 것이다.

 

바로가 열 번의 재앙에도 끝까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거역한 원인이 무엇인가? 우선 완전히 부패하고 사악해진 심령 때문이다. 또 세계 최강국의 왕으로써 살아 있는 신으로까지 숭배 받고 있었기에 너무나 완악하고 교만한 고집과 자존심 때문이었다. 더 결정적으로는 땅 집고 헤엄 칠 수 있는 보물 같은 노동력을 포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자기 장남까지 죽자 다음 차례는 틀림없이 바로 자신이 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풀어준 것이다.

 

간단하게 이렇게 가정해보라.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있는 미국회사들더러 본토로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육십만 명의 건장한 노동력이다. 현재 미국에서도 만 명의 종업원을 두면 대기업이다. 그런 대기업 60개가 거꾸로 해외로 나가겠다면 트럼프가 가만히 있겠는가? 선거공약이 완전히 무산되고 그야말로 탄핵감이다.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는 간단하다. 아주 강력하고 명료하게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은 어떤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워도 결국은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돈의 영향력에 그 일생이 좌우되는 돈의 노예다. 자칭 타칭 신이라는 바로도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첫째로 꼽히는 피라미드를 건설했어도 실제로는 돈 한 푼에 쩔쩔매는 너무나 치사하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돈이 주인인 인간은 비록 겉으로 화력하고 장엄하고 풍요로운 문명을 발달시켜도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탄식한 것처럼 그들이 해 아래에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며 헛될 뿐이다. “해 아래에서”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부재한 상태에선 해 만큼 큰 존재는 없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가치가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리 큰일을 해도 허망하다는 것이다.

 

본문 10절을 다시 보라. 바로가 내건 대외적 명분은 대적과 연합하여 반역을 도모할 것을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진짜로 염려하는 내용이 마지막 말에 담겨 있다. “이 땅에서 나갈까?” 무슨 뜻인가? 어떡하든 애굽 땅에 붙들어 놓겠다는 것이다. 당장에 그들을 죽이거나 말살하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오직 돈 때문에 한 민족 전체를 3백년 넘게 멸시 학대한 위에다 더 심한 학대를 추가하겠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선포한 것이다.

 

노아홍수에서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일이 고대의 우상숭배 국가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빈번했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만을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일도 아니다.

 

최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은 한국 같은 빈민 소국을 노예처럼 학대하지 않았는가? 그 불쌍한 백성들의 엄청난 양의 땀, 눈물, 한숨, 심지어 피를 바탕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런 문명을 이뤘다. 그들이 누구인가? 자칭 크리스천들이었다.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이라고 어느 누구도 거역 반박하지 못하는 명분을 앞세웠다.

 

오늘날 세계 최고 선진국인 미국의 크리스천들도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한다는 성경적 명분 한두 개만 앞세우고 사실은 잘 먹고 잘 살게 해준다는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었다. 과연 우리가 애굽의 바로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오해는 마셔야 한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 그중에는 순수한 크리스천들도 분명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영적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저는 한국 TV 연예프로 중에 비정상회담을 자주 시청하는 편이다. 여러 나라 청년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접할 수 있다. 그들이 또 서로 다른 의견을 인정하고 타협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번 주의 주제는 새해 첫 방송이라 “2017년 세계는 어떻게 흘러 갈 것인가?”였다. 서양문화사를 전공하고 아주 박식해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조승연 작가가 한마디로 정의한 것이 인상 깊었다. 좌와 우의 이념 대립은 벌써 끝난 대신에 지금은 열린 세상에서 닫힌 세상으로 전환하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트럼프가 당선된 후로 미국에선 대중주의(populism), 국가주의(nationalism), 보호주의(protectionism)의 세 가지 큰 흐름이 조성되었다. 아시아에서도 필리핀 일본 중국 등에 보수 강경파 지도자가 국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EU 여러 나라에서 대선이 치러지는데 현재 보수 강경파가 다 득세하고 있다.

 

그래서 한 패널리스트가 백 년 전 즉,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는 속으로 본문의 3,500년 전 모세 시대, 아니 그전의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 노아 홍수 시대로 돌아간 것이라고 여겼다. 정확히 말해 그 때로부터 단 한 걸음도 진보된 것이 아니다. 동일하고도 일관되게 돈을 숭배하는데 단 조금 더 그럴싸하게 인권, 자유, 평등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것뿐이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분이 부재하는 인생의 결론은 돈이다. 인간 사회 모든 문제의 궁극적 근본적 원인은 돈 때문이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며 신자도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 성경 디모데전서 6:10은 돈을 사랑하는 것 즉, 돈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선언한다.

 

저는 조승연 작가에 비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아주 빈약하다. 그럼에도 인류의 종말까지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다. 과학문명에만 의존하여 인간끼리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한 가지 흐름이 있다. 반면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분의 남은 자들이 이웃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주려고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는 또 다른 흐름, 인간 사회에는 오직 이 두 가지 흐름 뿐이다.

 

전자는 겉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너무나 편리하고 화려해질 것이지만 속으로는 썩고 또 썩어서 무엇을 해도 평강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이전에 스스로 헛되고 헛되게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후자는 비록 극소수만 남고 겉으로는 세상의 온갖 멸시와 손해와 핍박을 받겠지만 이 땅에서부터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인생이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학대를 이겨낸 비결?

 

이스라엘이 그 심한 학대를 받아도 더 창성해진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붙들어 주셨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만병통치식의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정답은 이제 그만 내세워야 한다. 구체적으로 본문의 역사적 현장에서 이스라엘이 체득한 비결이자 진리를 찾아내어야 한다. 굶고 매를 맞아도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은혜로 밤새 새 살이 돋았고 안 먹어도 영양을 공급 받아 새 힘이 솟았다고 단순한 해석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못할 분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이뤄진다.

 

이스라엘이 그 큰 고역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근거는  간단하게 하나다. 그들은 구조적으로 돈에 대한 염려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예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세상의 정치 경제와 완전히 격리된 채 살고 있다. 또 다시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에 전념했다고 성급하게 짐작하지 말라. 그들에게 성전, 성막, 성경, 율법 하나 없었다. 이스라엘이 예배드리러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한 바로가 일상적 예배를 허락했을 리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고역을 마치고 돌아오면 지쳐 떨어져 누워 자기 바빴다. 어쩜 기도할 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소지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아브라함의 언약, 야곱이 포기하지 않았던 그 꿈이다. 언젠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견디어 내자고 영화 빠삐용에서처럼 바퀴벌레나 쥐를 잡아먹고 악착같이 힘을 내며 버틴 것이다.

 

바꿔 말해 애굽의 치사하고 사악한 목적에 따라 학대 받은 것이 그들에게 오히려 창성해지는 요인이 된 것이다. 자나 깨나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고 그 지루한 노역을 이겨냈다. 지금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중에 사대 만에 귀향한다는 기한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해보라.

 

어떤 상황이 되는가? 어차피 자기 당대에 돌아갈 수 없다. 열일곱 번째 세대 직전까지는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냥 노예로 지새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사전에 알았다. 그런데도 소망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살아서 우리 후손이라도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해야지 이를 악물고 버틴 것이다.

 

고난이 삶이었다. 고난 자체가 삶과 인생의 아니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고난과 함께 살았다. 차츰 고난이 주는 불편과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키우며 고난 자체가 주는 유익을 누리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게 되었다.

 

육신의 창성이 영혼의 창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혼의 창성함이 없이는 절대로 육신이 창성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그 중심에 주님에 대한 소망을 아무리 희미해져도 놓지 않았기에 절망에 빠지지 않았고 괴로워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매일 매일 서로 위로하며 새 힘을 얻었다.

 

부자가 되는 비결

 

본문은 요셉을 모르는 바로를 정죄할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본문을 비롯한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 세상은, 심지어 신자라도 잠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기면 돈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다. 돈도 그런 세상과 사람을 따라 간다.

 

실감나게 말하면 돈독이 오르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부드럽게 말해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을 모은다는 것이다. 돈을 사랑한다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다른 이를 노예로 삼을 정도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당연히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되었다는 첫째 의미는 돈의 노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손해 멸시 핍박을 기꺼이 감내할 만큼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바뀐 것이다. 현실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 부자가 되려고 인생의 목적을 바꾼 것이다.

 

올해도 세상에는 온갖 형태의 바로들이 설치겠지만 신자는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즉, 고난이 닥칠수록 오히려 영혼이 창성할 수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해준다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끝까지 붙들었지만, 신약의 새 이스라엘인 우리는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이미 소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 된 축복이 비록 그것 하나뿐이라 해도 그 은혜가 너무 귀해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불쌍한 이웃에게 닫힌 삶을 살고 있다면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신자라면 잠시 하나님과 등지고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불쌍한 이웃에게 열린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럴 때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오묘하고 풍성하게 임한다. 언제까지 430년이 지난 후손에게까지 말이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바다.

 

1/1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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