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
출애굽기 강해 (3)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출1:15-22)
잘못된 설교?
지난주에 요셉을 모르는 바로가 이스라엘에게 노역을 증강한 것이 실제적인 위험에 봉착했다기보다 만에 하나 반란에 대비해 사전에 봉쇄하려 으름장을 놓은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바로의 진짜 속내는 공짜로 활용할 수 있는 양질의 노동력을 계속 확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와 상반되는 내용이다. 고역으로 인구를 감소시키려했던 일차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골적으로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죽이라고 산파에게 분명히 명령했다. 그럼 지난주의 제 설교가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라. 출애굽은 본문의 때에서 80년의 세월이 경과된 후다. 계속해서 출생하는 남아 아이를 다 죽였다고 치면 어떻게 되는가? 남자는 80세 이상의 노인들과 부녀자들만 남게 된다. 애굽의 역사는 중단되어야 하고 가나안 정복전쟁에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참가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출애굽기 이후의 성경 기록이 전부 고쳐져야 한다.
따라서 본문처럼 남아를 죽이는 정책은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일시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해석해야만 한다. 애굽의 입장에선 이스라엘이 반역할 꿈만 꾸지 않게 하는 것이 첫째 과제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규모로 묶어놓으면 된다. 그래서 수시로 공포 억압정치를 시행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 일방적으로 강압만 하면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한다고 죽기 살기 식으로 악에 받혀 덤비면 더 골치 아프다.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가며 적절히 구사해야 한다. 광야에서 방황할 동안에 이스라엘이 애굽을 그리워했던 것을 단순히 믿음이 부족했다는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할 수 없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때때로 잘 대우해준 적이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경배한 까닭은 애굽의 우상 신전 축제에 그들을 참여시켜 온갖 쾌락을 맛보게 해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마저 가능케 한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창성할수록 양질의 노동력을 더 확보할 수 있어 유익이다. 애굽도 함께 번성을 누릴 수 있다. 나아가 로마 제국과 지금의 북한에서 보듯이 노예 생활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타성에 젖고 무기력해져 반란할 꿈도 꾸지 못한다. 애굽은 지금 이스라엘을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중이다.
결국 본문이 말하는 바는 유아를 죽일 만큼 악독한 바로가 통치할 때에 마침 모세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모세가 출생할 때에 하필 그런 바로가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아 살해를 허용하신(?) 하나님
그럼 정작 살펴야 할 내용은 그렇게 허용 내지 묵인하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이다. 위대한 영웅이 출현하려면 반드시 주위 사람들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가? 예수님 탄생 때에 아무 죄도 없는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도 함께 억울하게 죽었듯이 말이다.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절대로 악을 주도적으로 선도적으로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초 인간 아담에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쉽게 선을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100% 부여했다. 참 생명을 주관하시는 당신을 외면 거역하여 사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충분한 조치를 해주셨다. 아담의 타락은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예수님 탄생 때에 영아가 함께 살해된 것도 포악하고 잔인한 헤롯 대왕의 정치적 탐욕 때문이었다. 정적이 될 소지가 있다고 자기 친아들과 아내까지 죽인 그였다. 유대인들은 당시 가뜩이나 메시아가 와서 기존의 로마 통치체계에서 구출해주길 소망하고 있던 판국이었다. 로마를 등에 업고 왕이 된 헤롯으로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니까 유대인도 아닌 이두메 출신인지라 눈도 깜박 않고 아이들을 몰살했던 것이다.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선 완전 무지한 헤롯은 자기의 우둔함, 교만함, 탐욕스러움, 완악함에 따라 아이를 죽인 것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몰라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에 돈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것뿐이다.
본문에서 “요셉을 모르는 바로”라는 표현이 단순히 시대가 경과해서 왕조가 바뀌었다는 뜻만이 아니다. 요셉의 공로를 철저히 무시하는 탐욕적이고 근시안적인 바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의 전이나 후의 바로들은 요셉의 공로도 기억하고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강인함을 알기에 융통성 있게 당근 정책도 적절히 활용했으나 이 바로는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철권정치만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 두 명의 기지에 의해 그 정책은 시행도 못해보고 완전히 무산되었다. 히브리 여성들은 강건해서 출산을 도와주러 가기 전에 스스로 출산을 했다고 핑계를 대었다. 당시는 위생환경이 열악하고 분만에 관한 지식도 발달하지 않아 사산(死産)하는 경우가 잦았다. 고의로 살해하라고 명령한 바로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너무나 비열하고 치사한 조치였다.
첫째 정책이 실패하자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버리라고 명했다. 이는 더 말도 안 되는 잔인한 명령이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가 악어 같은 짐승에 물어뜯기는 것을 허용하겠는가? 차라리 부모 손으로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친부모더러 친아들을 죽이라는 명령과 다를 바 없었다. 돈과 권력과 자존심에 눈이 멀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게 타락하는지, 또 얼마나 어리석게 바뀌는지 보여주는 여실한 증거다.
모세의 출생과 사탄
특별히 모세 출생 시에 이런 일이 일어난 배후에 사탄이 있음에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아담에게 타락의 원인을 제공한 사탄은 하나님께 어떤 벌을 받았는가?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이 와서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 사탄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 예고한 여인의 아들이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에 집중되었다.
때가 차서 예수님이 탄생하자 사탄은 헤롯을 시켜 훼방했지만 실패했다. 광야로 쫓아가 세 번이나 시험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실제로 공사역을 시작하자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귀신 들린 자가 제일 먼저 알아봤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동원해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쳤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 헤롯당, 로마 당국 즉, 당시로는 지성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최고 엘리트들로 합작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이끌었다.
인간 중에 최고로 똑똑하고 경건한 자들이, 평소에는 서로서로 앙숙이었는데도, 인류 역사상 최고로 선했고 잘못이라고 하나도 범하지 않은 예수를 말도 안 되는 억울한 누명을 덮어씌워서 십자가에 죽였다. 그들의 자유의지는 어떤 조종이나 강압 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작동되었지만 정말 짐승보다 못한 죄악을 저질렀다. 이일은 이성적으로 이해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된다. 배후에 인간의 지정의는 물론 영혼까지 통제 조종이 가능한 엄청난 영적 세력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지금 이스라엘의 아이를 다 죽이면 당장에 애굽에 손해가 되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바로가 지시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참 하나님 창조주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주역인 모세가 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탄은 감지한 것이다. 사탄은 요셉을 모르는 우둔하고 포악한 바로를 조종해서 치사하고 사악하게 훼방을 놓게 한 것이다.
첨단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의 신자들, 특별히 지성적인 신자들은 사탄이라면 두드러기 돋는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 반응 자체가 사실은 사탄의 첫째 흉계에 넘어간 반증임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실제로 신자들에게 가장 잘 먹힌다.
사탄은 분명히 실재(實在)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구원과 심판을 종결지을 때까지 세상 권세를 갖고 인간을 조종 농락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는 일과는 별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사탄의 왕국에 속했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그분이 옮겨주신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심판과 정죄는 없다.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그분의 의로운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 이미 영생을 소유한 것을 확신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우둔함
저는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점쟁이나 무당은 미신으로 치부하고 직접 점을 치러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신문의 오늘의 운세나 토정비결이나 손금 관상 등은 심심찮게 보았다. 겉으론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로는 그 점괘에 따라 안도하기도 하고 염려하기도 하고 예방도 했다.
귀신의 존재도 있다고 여겼다. 때로 공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귀신을 인정하고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는 물질계가 전부가 아니고 영적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은 사후의 영원한 운명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는 점도 시인했다는 뜻이다. 그럼 사탄을 통제 제압하는 우주 만물의 주재(主宰) 되시는 하나님도 반드시 실존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부인했고 특별히 예수는 끝까지 싫어했다. 논리적으로 전혀 앞뒤가 안 맞고 뒤죽박죽이 된 행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힘든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제발 도와달라고 간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잘나서이거나 우연이겠거니 여기고 치웠다. 언제 그렇게 간구했는지 까마득 잊었고 그렇게 간구했다는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뿐 아니라 얼마나 엄청난 잘못인지 몰랐다. 잠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가 해결된 것을 두고 우연의 일치이거나 내가 잘난 탓이라고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내 쪽에서 내 입장에 바탕을 둔 생각일 뿐이다. 만약에 정말로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해준 하나님이 실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입장에선 틀림없이 제가 제일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 가능성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가 잘 아는 분 중에 바로 그런 염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분이 있다. 진리 탐구, 구원, 자아 발견, 어떻게 부르든 인생의 정답을 얻으려고 온갖 종교를 섭렵했고 교회도 다녔다. 죄송하지만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몰고 가전 중에 불현 듯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되지? 성경말씀이 절대적 진리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자기는 성경 기록대로 가장 먼저 지옥심판에 떨어질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있는지, 성경이 진리인지 탐구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그전까지는 수면제였던 성경이 너무나 술술 읽어지고 읽는 대로 이해가 되었다. 절대 진리임이 깨달아졌고 마침내 예수님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했다. 그의 지성과 이성적 레벨은 변함이 없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그의 심령을 터치하여 새로운 영을 부어주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지금은 저와 신학적 토론을 자주 하는 정도까지 되었다.
사탄은 자신의 실존여부마저 철저히 숨기는 거짓의 아비이다. 예수님 출생 때의 헤롯이나, 본문의 바로나 아이들을 죽이는 일을 두고 그들은 유다왕국이나 애굽의 유익을 위한 최선의 조치라고 확신했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타의 졸개 역할에 충실했다.
바로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요셉을 모르는 바로를 정죄 책망하려는 목적만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랐던 두 비천한 여인의 엄청난 승리의 이야기다. 왕으로 취임하자마자 야심차게 내건 정책이 두 여인의 임기웅변 식의 지략으로, 이것도 하나님이 심어준 생각임, 인해 아예 시행도 못하고 폐기 처분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힘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패배했다. 사탄은 세상에서 최고 권력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하나님께 대적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최고로 연약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두 여인으로 맞서게 해서 승리했다.
지금 바로와 애굽에 최고 큰 골치거리는 혹시라도 이스라엘이 반란할 가능성이었다. 나름 예방을 할 수 있는 최고의 비책을 꾸며내었으나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었다. 하나님이 사탄을 다루는 모습과 원리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사탄은 자기 역량의 100%를 총동원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새끼손가락 한 번 까닥한 정도로 손쉽게 승리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은 왜 하필 포악한 바로가 유아를 살해할 때에 모세가 출생하도록 허용하였는가?”이다. 이제 그 해답을 여러분도 조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태를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을 뿐이다. 출애굽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세울 계획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그럼 사탄이 폭군 바로를 통해 유아 살해 정책으로 그 계획을 무산 시키려 정면 도전한다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인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어쩜 사탄도 모세의 출생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강압정책으로 기승을 부려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약화 실종되는 것처럼 보여 주려 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실망에 빠트리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약해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며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심 실망한 이스라엘의 잘못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선 바로가 이스라엘이 반역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실제 역사가 진행되는 양상은 사탄이 죽기 살기로 사람으로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려고 발버둥친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착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마저 위장하여 없는 것처럼 숨는 것이 사탄이다.
그 발버둥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모세가 나일 강에 버려졌지만 또 다시 모세의 어린 누이 한 연약한 여성의 기지로 생존했다. 바로의 공주에 의해 양육되면서 대적의 심장부인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로 40년간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나아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소양 교육까지 받았다.
문제는 우리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악도 절대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눈에는 악인이 계속 형통하고 사회의 온갖 불의 부조리가 사악하게 판치는 것 같아도 손 놓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간 생각과 다른 완벽한 공의는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당신께서 바로 세우시고 세상 악인을 징벌하신다. 그 시기가 오래 지연되는 것 같고 징벌의 방식이 약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일 뿐이다.
특별히 당신의 백성과 그 공동체를 향해 세우신 계획을 훼방하는 세력은 더 철저히 응징하신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가로 막는 존재는 그분의 저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성실히 수행하는 신자가 그분의 긍휼에서 벗어나는 법도 없다. 신자 개인의 경우 억울한 일을 그분이 반드시 바로 잡아 주신다. 눈물을 많이 뿌리며 제단에 기도를 바칠수록 기쁨이 충만한 화관의 열매를 더 풍성히 거두게 해주신다.
우리가 믿는, 정확히 말해 모든 사람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한 분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하고 완전하며 오묘하고 풍성한 분인지 모른다. 저의 이런 설명도 너무나 부족하다. 제대로 그분을 설명하려 시도하는 자체가 교만이자 만용일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신자와 그 공동체가 진심으로 그분을 따르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해도 하늘에서 천사장 미카엘이 사탄을 무참히 패배시켜주는 그런 권능 속에 살고 있다. 본문 기사나 헤롯의 영아 살해 사건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엄청난 영적 승리를 거두었고 또 그분께서 당신의 공의를 바로 세운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좋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이차적 과제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자기 가슴에 광대하게 품느냐의 문제다. 자기 계획을 크게 세우라는 뜻이 아니다. 사탄의 머리를 부수는 권세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곧바로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에 흔들림 없는 확신을 항상 갖고 있느냐의 문제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크심을 더 크게 알아야 한다. 기도로 그 크심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기쁨과 평강으로 가슴 가득 먹먹해져야 한다.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한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세우신 영광스런 계획에 저를 마음껏 사용해달라고 나의 전부를 의탁할 수 있어야 한다. 히브리 두 비천하고 연약한 산파들이야말로 너무나 광대하신 하나님을 자기들 가슴에 광대하게 품었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바다.
1/22/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