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모세.
출애굽기 강해 (9)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1-5)
하나님의 돌연한 임재
모세가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물었으나 나이 팔십이 되도록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러다 드디어 모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와 장소에 하나님 쪽에서 먼저 모세를 찾아오셨다.
그 때가 언제인가?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칠” 때이다.(1절) 외적으로는 남자의 위신이 서지 않게 데릴사위가 되어서 처갓집에 얹혀 살 때다. 내적으로는 소명의식과 여호와 신앙은 물론 생의 의욕마저 거의 소진되었을 때다. 인생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자존심과 스스로 내세울만한 모든 것이 다 산산조각이 난 후다.
또 하나님이 임재한 장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산 호렙 산으로 나중에 모세가 율법을 전수받은 시내 산이다. 현재 시나이 반도 남단의 “모세의 산”이라고 불리는 ‘에벨무사’라고 학자들이 인정하는데 높이가 해발 2,291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다. 그 높은 산에 양치기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스위스의 알프스 높은 산들 중턱에 목축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듯이, 호렙 산의 골짜기에는 양을 치기에 적합한 목초지가 있다고 한다.
모세는 지난 40 년간 양떼를 몰고 그 골짜기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일과를 지루하게 반복했던 것이다. 어느 날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떨기나무는 시내 광야에 흔한 가시덤불로 다 자라야 1 미터가 채 안 되는 초라하고 불 품 없는 나무다.
그 잎 표면에는 기름성분의 작은 입자들이 붙어 있어서 고온 건조할 때에 자연발화가 되기도 하고, 또 강한 햇빛이 그 기름 입자에 반사되면 마치 불에 타는 듯이 보일 때도 있다고 한다. 지금 모세는 40년간에 광야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 상황을 분간 못할 리는 없다.
불이 붙으면 금방 타서 사그라져야 함에도 계속 활활 불이 붙고 있는 것이 이상해서 모세가 나무 가까이 갔다. 그러자 그곳에 임재 해있던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야, 모세야 두 번 연달아 불렀다.
하나님이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임재 한 까닭은 우선 아주 간단하다. 모세의 관심을 끌어서 당신이 계신 쪽으로 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를 불러서 당신과 대면한 곳이 어디인가? 풀과 물이 풍부한 골짜기가 아니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산 밑자락의 아직 메마른 땅이자 광야였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골짜기 목초지는 모세에겐 직장이요, 이곳은 출퇴근하는 길목인 셈이다. 그럼 그가 “오늘도 이 지겹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짜증을 내면서 “하나님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는 원망을 잔뜩 품고 아침마다 지나다니던 곳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에 그곳에 계셨다. 또 저녁에는 “오늘 하루도 그저 헛되게 시간만 흘러갔네. 하나님의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은 대체 무엇이야?”라고 투덜거리며 내려가는 모세의 뒷모습을 하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는 뜻이다.
가시덤불에 임재하신 하나님
모세의 둘째 시기 40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엄격히 말해 광야전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광야를 방황할 때에 하나님이 직접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그는 도피 은둔 중이라 광야의 이곳저곳을 탐색할 처지가 안 된다. 조용히 숨어서 양치는 일에 전념해야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기에게 맡겨준 양 떼를 어떻게 하면 잘 목양할 수 있을지 참 목자의 심정과 태도를 품게 할 목적이었다.
남을 향한 긍휼한 마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인간은 그만큼 선하지 않다. 우선 자기부터 수많은 연단으로 깨어져야 한다. 모세 같은 세상 최고의 실력자라도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 인생을 꾸려가기 절대 녹녹치 않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의 잘못이나 실패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 입장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또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그에 대한 동정심도 생기는 법이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그런 훈련을 철저하게 시키는 중이다.
가시덤불은 양이 따먹을 수 없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무다. 또 양이 가시에 찔릴 수 있으니 아예 멀리 떨어져 지나쳤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 아주 평범하고 초라한 모습을 임재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저런 곳과 시간에 계실 리가 없다고 인간이 섣불리 판단하는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임재 해있다는 것이다.
한국 서울 강남의 큰 교회에 홈리스 거지나 커밍아웃 한 동성애자가 출석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십중팔구는 말쑥한 정장으로 차려 입은 새신자 담당 장로가 따로 그들을 불러내어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니 당신들이 올 곳이 못된다고 타일러서 돌려보내지 않겠는가?
그럼 과연 예수님은 화려하고 장엄한 교회당 안에 한껏 빼입은 신사숙녀들과 함께 있겠는가?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거지와 스스로 죄책감을 못 이겨 구원의 길을 찾으러 나온 동성애자와 함께 교회 밖에 계시겠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이지 않는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에게 분홍빛 카펫이 깔리고 사람들이 그 양쪽에 도열하여 박수를 쳐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약속한 적이 없다. 좁고 머리 둘 곳도 없는 가시밭길을 걸을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격려했다.
신자가 담대할 수 있는 까닭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사탄이 번개같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그 일에 충성하고 있는 한에는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신다. 실제로 주님은 제자 70명에게 미리 그 일을 훈련시켜서 그 권능을 체험케 했다.(눅10장)
성벽을 막아서야 했던 모세
에스겔서 22:30,31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이 땅에 성이 무너져 내리는 데를 막아서서 당신의 심판을 지연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해 진노의 불로 멸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성이 무너져 내려 즉, 죄로 타락한 것 때문에 심판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참 신자가 없어서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심각한 말씀이지 않는가? 신자가 이웃의 성이 무너진 곳을 막지 않고 자기 성 무너진 곳만 챙기면 세상은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도 종교왕국과 건물성전의 화려함 풍성함과 그 종교지도자들 및 그들의 추종자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당신의 백성이 쓰러져 있는 곳과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진 곳, 세상에서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만 교제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천국 복음을 전했다. 또 그 일을 당신을 따르는 신자더러 하라고 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 즉 신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당신의 권세가 함께 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모세로 미디안 땅에서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가 되게 하여 양 떼를 치게 한 것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어서 하나님이 시킨 일이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곳에 그를 보낸 것이다.
그럼 모세는 미디안 족속에게, 최소한 자기 가족들에게라도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헛된 신이라고 가르치고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전했어야 한다. 만약에 그랬다면 감히 장담컨대 하나님의 침묵의 기간이 훨씬 단축되었을 것이다. 본문 1절을 다시 보라. 미디안 제사장의 양을 치고 있을 때라고 했다. 모세가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암시이다.
신자가 자기가 현재 처한 장소와 여건과 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발견하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80평생이 흘러가도록 하나님의 큰일은 전혀 해보지도 못한다. 자기 성을 막느라 발버둥 치다가 그마저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불려가게 된다. 그럼 그야말로 불에 타고 남는 것이라곤 너무나 부끄러운 구원하나, 심판 받지 않은 것 하나 뿐이다.
떨기나무가 불이 붙어도 타지 않는 것은 자연 법칙에 정반대되는 초자연적 현상이다. 거기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정확히 먼저 두 번 불렀다. 모세로는 분명히 하나님이 임재 하셨고 그분이 자기를 부르고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겸손히 대답했다.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가?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 세상에 임재 하셨다. ‘천사’라고 명기하지 않고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되어 있으면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사기 13장에 삼손의 출생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아이를 갖지 못한 삼손의 아비 마노아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하나님의 일을 할 종이 될 것이니 나실인으로 구별해서 키우라고 계시했다. 마노아가 그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길 기묘자(奇妙者)라고 했다.(삿13:18) 하나님의 경이 비밀 (wonder, secret)이라는 뜻이다.
이사야서 9:6에 장차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평강의 왕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즉, 메시아로 아기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말하고 있다.
삼손의 아비에게 예수님이 임하셨다면 구약시대 최고 선지자요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상인 모세에겐 더욱 그래야 한다. 단 천사처럼 인간의 모습을 한 것이 아니라 음성만으로 임재 했다. 그럼에도 지금 분명히 예수님이 모세를 만나 주고 있는 것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바로 떨기나무 전체에 불은 붙었으나 잎과 줄기 어느 곳 하나 타서 사그라지지 않았고, 검게 그을리지도 않고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본체와 인간이 직접 대면하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바로 불에 타서 소멸된다. 하나님의 당신의 위엄을 세우거나 당신의 본체를 보여주기 싫다는 뜻은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100% 완전한 진선미 그 자체이시다. 아무리 티끌 같이 적은 추하고 악한 것이라도 또 단 일초라도 그분은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할 자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모세는 살인자였다. 애굽의 왕자로 40년, 미디안 제사장의 맏사위로 40년을 보냈다. 알게 모르게 우상수배의 죄를 범했을 것이고 이방족속의 여인과 결혼했다. 율법으로는 세 번의 처형을 당해 마땅한 죄인이다. 예수님도 모세더러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5절) 혹시라도 모세가 진짜로 불이 붙고 있는지 손을 대보려 하다간 그 자라에서 즉사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떨기나무에 불 붙어도 타지 않는 까닭?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모세가 지은 죄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 같이 그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지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무가 검게 그을리지 않았다. 진홍 같이 붉은 죄를 모세가 치고 있는 양의 털처럼 희게 해주시는 중이다. 예수님이 지금 모세의 죄 값을 감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중이다.
또 나무 자체는 전혀 타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대면했으나 자기 지은 윤리적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모세 본인은 그대로 살려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던 그 영광에 모세를 초대하여 연합시키는 중이다.
모세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 공로 하나 없었다. 바로 곁에 항상 동행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도 못한 그였다. 그저 하나님을 의심하여 불평하기 바빴다. 미디안 족속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전할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세상에 없는 사랑과 구원을 베풀었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정확히 말해 모세가 나일 강에 던져질 때, 아니 그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영생은 보장되었고 하나님의 종으로 세울 것이 작정되었다. 지금 예수님과 일대일 인격적 대면을 통해 모세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지난 80년간 허송세월 했다고 체념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지금 새로운 생명을 부어주시고 있다. 또 출애굽의 큰일을 맡김으로써 마지막 40년을 인생의 황금기로 바꾸어주었다. 새로 받은 생명 위에 더 풍성하게 생명을 채워주신 것이다.
모세 일생 120년은 그래서 세 시기로 나눠선 안 된다. 떨기나무에서 예수님을 대면하기 전과 후 둘로만 나눠야 한다. 첫 시기 80년에 비해 둘째 시기 40년은 그 길이로는 반밖에 안 되지만 그 의미와 가치의 풍성함은 앞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
그전에는 먹고 마실 것의 걱정은 없었다. 위험한 고비 두 번도 가뿐히 넘었다. 그럼에도 모세는 인생을 계수할 지혜조차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무료하게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동족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해보려는 하나님의 소명이나 언약백성이라는 의식마저 실종되어 갔다. 그저 수고와 슬픔으로만 지샌 인생을 서서히 마감할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로 달라졌다.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뜻을 지닌다. 모세는 그전에도 여호와를 알고 믿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중에 180도로 달라졌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세상만사를 통치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전부가 결코 아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자기 삶을, 자기 성의 무너진 데를 고쳐 달라고 의탁하는 정도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모세처럼 예수님과 일대일 인격적 대면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 받은 것도 아니요, 엄격히 말해 믿음이 시작된 것도 아니다. 물론 이미 부활 승천하여 천국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예수님 본체를 만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다.
밤중에 예수님께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실체를 대면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럼 실질적으로는 그가 예수님을 대면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실체를 대면하지 못하지만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또 내 자신의 체험으로 실현하게 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것이 된다. 또 그래야 구원 안에 들어온 것이요 믿음도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본문의 모세가 대면한 것도 예수님의 본체가 아니라 떨기나무 불꽃이었다. 대신에 예수님의 음성은 들었다. 떨기나무가 불이 붙었으나 나무 자체가 타지 않는 이유 즉, 그 은혜를 깨달으므로써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물론 모세에게 지난 40년간 하나님과 씨름하며 품었던 원망과 불평을 완전히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단계의 그에겐 지난 생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회개는 분명히 거쳤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세상 사람들 앞에 자랑하던 내 실력, 신분, 체력, 지성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거기다 그 모든 것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인도가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함도 절감했을 것이다.
그 외에 그가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따로 있었다. 자기 딴에는 동족을 위한답시고 애굽 관원을 죽인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임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비단 옷 입은 애굽 왕자로 박쥐같은 위치에서 동족의 편을 든 것이 거꾸로 동족에게 더 큰 상처요 모욕감을 준 것이라는 점도 뒤늦게나마 깨달았을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의로운 일을 해준 모세를 거꾸로 살인자로 고발한 히브리인을 두고 처음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분노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그마저 지나고 보니 자기가 그 보다 더 큰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 속에 추하고 더러운 자기 자랑이요 교만뿐이었으나 겉으로는 의인인척 왕자의 신분과 인간적 의로 교묘하게 위장했음도 깨달았다.
살인자라고 자기를 고발한 것이 세상의 윤리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의 영적 차원에선 정반대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기를 고발해줌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과 더 깊은 씨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게 되는, 최소한 그분의 긍휼에 초대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었으며 그전에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붙여준 그분의 종임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모세는 그 동안 하늘을 향해 부끄러운 점 하나 없다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던 것이 겨우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게 세우려는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된다고 자랑하는 너무나 헛되고 헛된 몸부림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예수님과 떨기나무 앞에서 대면하자 도무지 고개도 들 수 없는 너무나 부끄러운 자신의 실체를 보았던 것이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뒤집어진다.
예수님은 지금 “모세야, 모세야”라고 이름을 정확하게 두 번이나 불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라곤 정말로 없다.
그 부르는 음성에는 세상 어떤 권세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을 것이다. 또 세상 어떤 사랑이 많은 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 생전 처음 듣고 느끼는 권위와 사랑이었을 것이다. 생전 처음 겪는 것이자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면 바로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사랑이다.
모세는 지금 성령의 간섭으로 내가 너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셈이다. 지금 나무가 불타고 있는 것은 주님이 내가 너를 대신해 죽는다는 말씀이었다. 나무 자체는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은 너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나오라는 주님의 초대의 음성이었다.
신자들은 그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은 다 다르고 육하원칙으로 묘사할 수는 없어도 반드시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과 일대일로 인격적인 대면을 하는 체험의 과정은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만남의 내용과 의미는 모두 똑 같다. 절대 다를 수가 없다.
먼저 구원의 확신부터 심어준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 의심치 않게 된다. 또 그 전의 인생과 180도 다르게 완전히 뒤집어진다. 단순히 도덕적 회개에 그치지 않는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진다. 주변 사람 가족 목사도 모르지만 본인만은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안다.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식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는데 어떻게 본인이 모르겠는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면 그 인생은 반드시 바뀐다. 주님이 정말로 살아 있는데, 그분이 나를 태초부터 택하셨고, 그분이 나를 알고, 그분이 나를 먼저 찾아와서,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분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었는데 어떻게 안 바뀔 수 있는가? 어떻게 그 자리에 나태하게 가만히 이전과 동일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만난 과정은 몰라도 그분을 믿기 전과 후의 자신의 변화를 자신의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비록 수시로 넘어지긴 해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노력은 하고 있어야 한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에 대해선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하든 부족하여 불편하든 그것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나 걱정이 더 이상 아니다. 내 성벽이 무너진 곳만 막아보려고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는 시도는 타종교도 가르치고 심지어 불신자도 노력한다. 아침마다 물 떠 놓고 천지신명에게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기도드린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에 더 가슴이 아프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 성벽 무너진 곳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래도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는가? 지금 현재 내가 서있는 자리와 여건에서 모든 억울함, 손해, 핍박은 내 것으로 삼고 모든 기쁨과 행복과 만족은 상대에게 돌리는 것으로 인생의 목표가 바뀐 것이 믿음이다.
지금 내가 처한 자리 여건에서 아주 사소한 일상의 일에서부터 주님께 받은 사랑을 주변에 나눠주어야 한다. 신자만 손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정말로 순전하게 그런 작은 나눔을 하나라도 실천하면 오히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참 기쁨, 참 행복, 참 만족을 누릴 수 있다. 떨기나무에 불로 임재 하신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3/5/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