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3 4:1-9 쉽고도 간결한 기독교 신앙

조회 수 102 추천 수 0 2017.04.08 13:52:53

쉽고도 간결한 기독교 신앙

출애굽기 강해 (13)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출4:1-9)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 소명을 주시면서 당신의 이름을 최초로 유일하게 계시해주셨다. 또 사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도 재확인해주었다. 나아가 애굽에서 큰 이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시고 애굽의 금은보화도 갖고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모세는 다시 그들이, 본문에선 애굽사람과 바로를 말함,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여호와가 네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반발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네 말을 안 믿을 것이므로 당신께서 강한 손으로 쳐서 듣게 만들어 주겠다고 이미 확약을 한 상태다.(출3:19,20)

 

그렇다면 애굽 사람이 안 믿을 것이라는 염려는 핑계일 뿐 사실은 모세 본인이 애굽으로 돌아가길 주저하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로 하나님께 반문한 것이다. 그가 겁이 너무 많은 것인가? 믿음이 너무 없는 것인가?

 

모세 나름의 사정

 

지금 모세를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다.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모세는 지난 80년의 인생 동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직접 체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일은 신생아 때인지라 아예 기억도 없고 남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애굽은 세계 최강 군사력을 가졌고 이름과 형상이 거창한 신들이 많아 결코 녹녹치 않은 나라임을 모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지금 자기 눈앞에 임재하신 여호와는 이름도 형상도 없다. 초라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모습으로 임한 가운데 그 음성만 들린다. 그러니 과연 어떤 강력한 능력을 소지했는지? 애굽을 강한 손으로 친다고 했는데 과연 가능할지 궁금하고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모세에 대해 살펴볼 사항이 또 하나 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생모의 젖을 먹고 자라긴 했지만 이 또한 그의 자의식이 생성되기 전이었다. 바로의 공주에게 양자로 입양되었지만 아무래도 그 사랑이 친부모와는 비교할 수 없다.

 

당시 바로는 후궁이 아주 많아서 왕자 손자 등 직계 자식들이 엄청 많았다. 그런 와중에 왕족으로써 마땅한 관직을 얻어 행세깨나 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겪어야 하고 온갖 시기와 모함을 극복해야 한다. 모세에겐 히브리 노예의 자식이라는 출생의 한계가 항상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모든 이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괄시와 차별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부모의 사랑은커녕 사람들의 인정도 받지 못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정당하다고 변호나 주장을 해도 양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자기편을 안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더더욱 인정받으려 노력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 성격만 과격하고 급해졌을 것이다.

 

남들의 비난이 잦아지자 가뜩이나 정체성에 혼란이 있는 터라 자존감이 완전히 떨어졌을 것이다. 남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고 모함만 하니 다른 이가 무슨 말을 하던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을 것이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출3:10) 하나님에게 말한 것이 단순히 핑계가 아니고 사실이었다. 속에 할 말은 많은데 성격이 급해 더듬었든지 아니면 아무리 말해도 안 믿어주니 아예 말을 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을 것이다.

애굽 관원이 히브리인을 학대할 때에 아무리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도 곧바로 살인한 것이 좀 이상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모세는 바로의 왕자의 신분이다. 말단 하급 관원을 야단치거나 징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적용해도 틀림없이 채찍으로 히브리인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었을 테니까 그 채찍을 빼앗아 관원을 때려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곧바로 살인한 것은 지난 40년간 혼자서 속으로 삼켜야했던 눈물, 분노, 억울함 등이 순간적으로 폭발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말하자면 모세는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많아서 열등감이 많았고 분노조절장애 증상마저 있은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누구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상당한 개연성은 있다.

 

군말 않으시는 하나님

 

모세의 그간의 어려웠던 사정과 현재의 미심쩍은 심정을 모를 리 없는 하나님은 군말 없이 그의 눈앞에 두 가지 이적을 펼쳐보였다. 첫째는 지팡이를 던지라고 해서 던지니 뱀이 되고 다시 뱀을 집으니 지팡이로 변했다. 바로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그대로 실현 보이라고 지시했다. 둘째는 모세더러 손을 품에 넣고 꺼내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문둥병이 걸렸고, 다시 품에 넣었다 꺼내니 하얗게 깨끗해졌다.

 

첫째 이적을 보고도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으면 둘째 이적을 해보이라고 했다. 둘째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거든 나일 강의 물을 떠다 땅에 부으면 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이번에는 말씀만으로 약속하셨다. 분명히 하나님은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를 설득시키기보다 지금 모세에게 당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첫째 기적에서 하나님이 모세더러 꼬리부터 잡으라고 명령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모세가 뱀을 피했다고 말한다.(3절) 맹독을 가진 코브라 같은 종류의 뱀이라는 뜻이다. 알다시피 뱀은 이빨에서 독이 나오기에 반드시 입을 벌리지 못하게 머리를 꽉 눌러서 머리부터 잡아야만 한다. 꼬리를 잡으면 순식간에 머리를 돌려서 손을 물어버린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지난 사십 년간 광야 전문가로 지낸 모세가 뱀의 종류가 무엇인지, 그 잡는 법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순순히 그대로 따랐다. 자기 목숨까지 걸며 믿음으로 순종한 것이라고 간단히 해석하고 치울 계제가 결코 아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강한 손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꼬리부터 잡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그가 잠간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그래도 뱀이 자기를 안 물거나, 물려도 죽지 않아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자기 기대대로 되지 않고 죽으면 지금 자기 앞에 임재 한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다. 떨기나무 불꽃과 지금 나누는 대화 모두가 한갓 영적인 환상일 수 있다. 또 지난 80년 간 아무 의미 없이 헛된 인생을 살았으니 차라리 이쯤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체념했을 수도 있다.

 

다시 4절을 자세히 보라. 성경은 참으로 정미한 기록이다. 뱀이 “모세의 손에서” 지팡이로 변했다고 한다. 뱀을 잡자마자 지팡이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막상 나중에 바로를 대면하고 이 기적을 베풀 때에 애굽의 술사도 동일하게 지팡이를 뱀으로 변신시켰다.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그런 매직을 익히 보아왔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는 정도로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또 구태여 성경이 “모세의 손에서”라는 말을 덧붙일 이유도 없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한참 잡고 있는 동안에 뱀이 빠져나가려고 요동을 치면서도 이상하게 모세의 손을 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굽 술사들이 행하는 것과 아예 차원이 달랐다. 모세로선 하나님만의 권능이라고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었다.

 

위트까지 있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둘째로 손을 품에 넣었다 빼보라고 했다. 하나님은 너무 완벽하고 예리하시다. 이런 기록을 보면 너무 멋지고 위트까지 갖고 계신 것 같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마술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포맷이 무엇인가? 손을 품에 넣어서 그 속에 숨겨둔 비둘기나 토끼를 마치 방금 만들어낸 것처럼 눈속임을 한다.

 

인간사회에 통용되는 문화나 예술은 고대의 궁정에서부터 출발되었다. 먹고 사는 여유가 있어야 예술을 즐길 것 아닌가? 애굽 주술사들이 그런 마술을 부리는 것을 모세도 자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품속에 미리 감춘 것이라곤 하나도 없음을 본인이 너무 잘 안다. 그런데 그 손이 문둥병이 걸렸다가 또 금방 깨끗이 나았다.

 

거기다 하나님이 이 두 기적을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말씀대로만 따랐더니 그대로 되었다. 모세가 기적을 즉, 애굽 술사들이 결코 행할 수 없는 능력을 실현했다. 무슨 뜻인가? 애굽의 술사들에게 더 이상 주눅 들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들이 신탁하며 의지하는 이름과 형상이 거창한 애굽의 우상신들도 당연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신들은 어떤 실체도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나는 그런 신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신이다. 바로 ‘내다’. 내가 강한 손으로 쳐서 출애굽시키겠다는 약속을 이제 믿을 수 있겠느냐?”

 

지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너무나 알기 쉽게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설명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리에까지 당신께서 내려오셨다.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호소했다. 모세더러 잘 분석 판단해보라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당신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모세가 가장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셨다. 그 후 약 1500년 흐른 뒤 모세에게 임하신 바로 그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는 당신의 사랑을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방식으로 계시해주셨다.

 

세 기적의 의미

 

첫째 기적은 모세가 갖고 있던 무생물인 지팡이가 생물인 뱀으로 변화되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이자 인간 외부의 모든 환경, 자원, 물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임을 드러내셨다.

 

둘째는 모세의 손에 기적이 일어났다. 인간 자체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통제하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적으로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자 인간의 내면을 다스리는 분임을 증명해보였다.

 

셋째는 약속만 하셨다. 나일 강은 애굽이 강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젖줄이자 애굽 백성들의 식량의 공급처이다. 그것이 피로 바뀌면 생명의 원천을 폐쇄하는 것이다. 당신께서 한 개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고 역사의 주인공 되심을 선언한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당연히 애굽의 바로는 물론 지금 인생을 마감하려는 쇠약한 80 노인 모세도 포함하여, 당신께 의존하지 않고는 성장은커녕 생성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만이 유일하게 외부의 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어떤 영향도 일절 받지 않으며 스스로 영원히 자존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였듯이, 야훼 즉 ‘내다’라고 모세에게 가르쳐준 그 이름의 의미를 다시 그에게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애굽의 바로는 결코 살아 있는 신이 아니며 그 또한 너무나 연약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거창하고 때로는 기적적인 능력도 발휘하는 우상 신들은 사람 눈을 속이는 거짓이요 허상이라는 것이다. 애굽과 바로는 참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려는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짜일수록 더 장엄하고 신비하고 경건한 모양을 갖춘다. 하나님은 애굽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고 출애굽이 과연 가능할지 부담을 갖는 모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신다. 그런 의심을 갖는 것도 합리적 판단에 따른 것임도 아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권능과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사탄의 거짓에 속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나아가 지난 40년 간 바로의 궁정에서 받았던 모든 모멸감, 차별 대우, 억울함마저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주목한 결과일 뿐임을 알라는 것이다. 네 속에 지금도 쓴 뿌리로 남아 있는 열등감, 의심, 성급함, 우울증, 분노 등도 사실은 모두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끼리 다투다보니 필연적으로 파생한 폐해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 잘못된 결과는 여전히 남아서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그 출발이 거짓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훼방하는 거짓과 허상일 뿐으로 그런 것들에 속아 넘어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것이다.

 

모세의 지난 80평생이 본인에겐 실패로 여겨질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 이 단계의 모세로선 아직은 하나님의 권능을 확실하게 안 믿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애굽으로 돌아가 당신께서 베푸시는 이적을 보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아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너와 히브리 동족들이 애굽으로부터 사탄이 추적이 불가능한 사흘 길을 떨어지게 해줄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다. 너의 모든 의심 두려움 상처 등을 네 스스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나에게 모든 맡겨라. 내가 누구인지 이 두 기적으로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 내다. 내라니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모든 인간의 태생적 한계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인 모세, 베드로, 바울, 다윗, 노아, 아브라함 등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가? 인격이 고상하고 믿음이 강건했는가? 아니다. 치사하고 비겁했고 연약하고 상처와 분노가 많았다. 우리는 평생 가도 지을 생각도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중한 죄도 지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이 맡기는 소명에 대한 지시와 명령을 듣고도 본문의 모세처럼 때로 반발 의심 불평 주저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둔 채 당신께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때로는 강권적으로 때로는 넘치는 사랑으로 당신께 완전히 항복시켜서 기어이 당신께서 이끄셨다. 또 그들이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한 걸음씩 따라갈 때마다 그들은 조금씩 더 거룩해졌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당신께서 기어이 실현시켰다.

 

멀리 믿음의 위인들을 돌아볼 것도 없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불신자는 물론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되는 신자들의 인생길 모두가 광야 같이 험난하다. 예수 잘 믿었다고 해서 앞으로 고난이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점점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성자라고 칭송을 받는 자도 가족만이 아는 결정적으로 아주 냉혹하고 비겁한 측면이 하나씩 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호사스럽게 살기에 문제 하나 없으리라 여겨지는 재벌회장도 남에게 말 못하는 자기만의 고민이 있다. 모든 이들이 다른 사람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이 알까봐 두렵고 부끄러운 치부와 과거의 상처나 실패 한두 개씩은 다 갖고 있다.

 

설령 정말로 인격적으로 순전하고 현실의 문제도 없으며 부부간의 금슬도 아주 좋은 사람도 결정적 문제는 있다. 바로 자식이 속을 썩이는 것이다. 핸디캡 자녀를 평생 보살펴야 할 경우마저 있다. 다른 고민과 문제는 가끔 닥치기에 해결하거나 잠시 견디기만 하면 되지만 핸디캡 자녀는 죽을 때까지 큰 짐으로 안고 가야만 한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런 인생을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정반대로 기쁨과 의미가 넘치는 충만한 인생을 계획했다. 모두가 아름답고 분홍 카펫 같은 인생만 꿈꿨다. 또 어려운 일이 안 생기도록 만약 생기더라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된다.

 

불현듯 우리에게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지? 내가 지금 여기서 도대체 왜 이러고 있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지 않는가? 고뇌와 갈등을 해소하려 들면 들수록 더욱 늪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도 많다.

 

우리가 날마다 겪는 고뇌와 갈등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기 짝이 없고 때로는 치사한 인간들끼리 모여 사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방식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모세도 애굽의 군사력과 궁정의 화려함과 우상 신들의 깜짝 쇼로 펼치는 능력에 시선을 빼앗겨 자기 내면의 상처와 두려움과 분노 하나 해결하지 못했지 않는가?

 

지금 하나님은 모세더러 네 외부의 모든 문제를 당신께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어느 누구에게도 네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모든 한숨, 눈물, 상처마저 내 앞에 모두 쏟아 부으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도 나를 버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의외로 단순하고 쉽다. 경건하고 고상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드시 진지하고 심각해야 하고 나아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비장함을 하나님은 구태여 요구하지 않는다.

 

다윗이 시편 27:10에서 어떻게 고백했는지 아는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모세는 부모 사랑을 못 받은 것에, 그것도 당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과했다. 그런데 다윗은 부모로부터 상처까지 받았다고 한다. 성경에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큰 버림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상처를 하나님께 토설함으로써 그분이 완전히 치유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감히 그분들과 비교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반대로 부모님의 사랑을 세상에서 최고로 많이 받은 자다. 어느 부모라도 안 그런 자 없지만 정말로 제 부모님은 자랑할 만하다.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저희 어머님은 언어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제가 기억하기는 딱 한 번 버스 정류장에서 남들 앞에서 담배 꼬나물고 폼 잡고(?) 있었다는 이유로 크게 혼난 적 말고는 말이다.

 

그런 세상에 거의 없는 엄청난 부모의 사랑을 받고도 저는 지난 세월 동안에 너무나 많은 고난과 상처와 실패를 겪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도무지 부끄러워서 설교할 자격도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감히 서게 된 것은 세상 최고의 부모도 제 실패 허물 죄악을 해결해 줄 수 없지만 부모님의 사랑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 앞에 제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이 참 사랑을 증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영접해주신다는 다윗의 고백이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단순하고 쉽다는 이유는 지금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주 단순하고 쉽게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계시해 주셨다는 의미다. 그를 일대일로 만나서 그에게 가장 적합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그를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셨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들을 단순하고 쉽게 다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도 단순하고 쉬어야 한다.

 

그분에겐 복잡한 계교, 모략, 농간 등은 일절 없다. 신자를 향해 어떤 부정적인 의도도 없다. 오직 사랑 하나뿐이다. 우리의 유익만을 위해 행하신다. 신자를 속이려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 사랑이 너무나 오묘하고 신비해 마치 숨겨놓은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나만 믿고 따르라.” 그분의 뜻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잘 모르겠거든 단순히 그냥 잠잠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미리 알 수 있는 자는 사실 아무도 없다.

 

인간사회에서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런데도 다윗은 부모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다고 고백한다. 거짓이나 과장이 아님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부모가 된 후에 우리 자식에게 매일 상처 주면서 사랑을 베푸는 일에 실패하고 있지 않는가? 또 그 실패를 회개하고 고치려 하지만 여전히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다시 말해, 부모의 사랑마저 온전히 믿을 수 없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해법은 하나뿐이지 않는가? 그 답은 너무 쉽고 자명하지 않는가? 오직 하나님께 모든 내 짐과 상처 등을 맡기고 그분만 의지하는 것뿐이지 않는가? “주님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의 긍휼이 저와 제 주변에 가득 채워주십시오. 그 길만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4/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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