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애굽기 강해 (15)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4:13-17)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의 소명자로 세우는 과정을 살피는 중이다. 모세가 다섯 번째로 하나님 말씀에 토를 달자 드디어 하나님이 화를 내셨다.(14절) 우리가 봐도 모세가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렇지만 솔직히 저만 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얼마나 빨리 순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다섯 번만에라도 순종하면 아주 잘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입장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속으로 의심과 불만을 잔뜩 품은 채 입술로만 “예, 예” 하며 하나님의 뜻도 정확히 모르는 신자와, 모세처럼 꼬치꼬치 따져서 의심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신자 둘 중에 어느 신자를 더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대표인 다윗이 지은 시편에는 하나님께 따지다 못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는 시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결코 믿음과 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 당신을 제대로 알게 되면 믿음이 생기고 저절로 기꺼이 순종할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도 당신을 의심하고 불평을 쏟아놓는데도 모세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 인내의 한계
우선 하나님이 인자와 긍휼이 아무리 무궁해도 그 인내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이며 하나님의 친 자녀라면 당연히 징계도 받아야 한다.(히12:8) 자녀를 야단치지 못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까지 성경은 선언한다.(잠13:24) 남의 집 아들은 갱 짓을 해도 야단칠 수 없지만 자기 아들은 성적만 조금 떨어져도 야단칠 수 있고 또 쳐야 한다.
하나님도 남의 집 아들 격인 불신자들은 그 마음의 정욕과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둔다고 말한다.(롬1:24,28)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했거나 미워한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당신을 멀리하면 필연적으로 갈급함과 허망함만 늘어남을 깨달으라는 뜻이다. 죄악과 세상이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파괴적 결과를 체험했다면 제발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사랑이다.
하나님께 인내의 한계가 있다고 해서 숫자적으로 따져선 안 된다.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주라고 했다.(마18:22)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용서해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인간더러 예수님처럼 용서해주라는 것도, 하나님이 인간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은 인간을 절대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을 시행하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에겐 경우가 다르다.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이 결정하시기에 우리는 짐작할 수도 없다. 흔히들 자꾸 이러다 하나님 벌 받지라고 하면서 내심 불안해한다.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럴 때는 즉시 죄를 회개하고 지금 하나님과 멀어진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고쳐야 한다.
하나님 인내의 한계를 숫자 개념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은 한 번만 잘못해도 아주 크게 징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한 번 만에 징계한다는 것은 잘못한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문제라는 것이다.
모세도 지금 다섯 번이나 하나님께 딴 소리해서 화를 내신 것이 아니다. 이전 네 번의 질문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하나님도 각각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선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고 했다.(13절) 무슨 뜻인가? “다른 사람을 보내 달라. 저는 못 가겠다.” 모세의 최대약점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었다. 네 입과 함께 있어 바로와 대적할 말을 가르쳐주겠다고(12절) 했는데도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하나님이 나일 강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서 바로의 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출애굽을 실현시킬 최적임자로 하나님이 양성 훈련했다. 모세 본인도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다. 그러니까 애굽 관원을 살인까지 했다.
비록 80년간의 긴 침묵 끝에 뒤늦게나마 나타나셨지만 애굽에서 노예로 핍박당하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계획을 모세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거절하면 하나님의 80년간의, 아니 아브라함 때부터 400년이 넘는 계획이 무산된다. 모세의 동족과 형제들은 또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순종의 의미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맥락으로 접근하면 너무나 부족하다. 신자가 나쁜 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비교적 잘 지킨다. 반면에 선을 행하는 일에는 주저한다.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일일이 당장 벌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일도 하지 않고 선한 일도 하지 않으니까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진다. 믿음의 승리 기쁨 활력이 없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은 나이가 이미 80이 넘었기에 그냥 미디안에서 양을 치다 편안히 죽겠다는 의미다. 혼자만 살겠다는 뜻이다. 그런 소망이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세의 경우 지난 80년의 인생을 아무 의미 없이 헛되고 헛되게 산 결과가 된다. 죄송하지만 짐승처럼 생존과 번식에만 급급한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상실한 마음에 버려두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백성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지금껏 부어주신 당신의 오묘하고 풍성하고 완벽한 생명의 역사가 깡그리 무시되었다. 하나님이 단지 침묵했을 뿐인데 완전히 부재한 것으로 치부했다. 지난 80년은 물론 앞으로 인생도 전부 모세 자기가 주관하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당신과의 만남을 이쯤에서 끝냅시다. 저를 떠나주십시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한 번 거역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인생 전부가 부인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훨씬 다른 차원이다. 신자들더러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야곱처럼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으나 형 에서의 분노가 걱정되었다. 형의 나에 대한 미움의 마음을 녹여서 방해를 막아주어 반드시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런 확신을 주지 않으면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고 붙들고 늘어졌다.
그래서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이름인 이스라엘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야곱 개인의 이름이었다.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었기에 대명사로 전용된 것이다. 또 열두 지파의 선조이기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기독교 신앙의 선조이기도 하다.
야곱이 그렇게 씨름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답게 행동하고 나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경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낸 것 자체가 과연 야곱이 20여년의 연단을 통해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했는지 시험하려는 뜻이었다.
반면에 모세는 크게 고생은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을 야곱의 네 배인 80년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도 야곱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이 나와 싸워 이기라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의미였다. 아무리 모세가 자존감이 떨어졌고 결점과 연약하긴 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믿음으로 싸워볼 시도조차 하지 않으니 하나님은 화가 난 것이다.
대변자 아론
하나님은 화를 내셨지만 또 다시 아론을 대변자로 붙여주신다. 아직은 레위 지파를 제사장으로 구별한 율법을 받기 전인데 레위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아론이 히브리 동족의 신망을 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히브리말에 서툰 모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의 왕자로 자랐다는 떳떳하지 못한 과거로 인해 동족들이 가질 이질감 거리감을 해소시키는데도 적합하다.
또 지난 40년간에 많이 바뀌었을 애굽 사정에 대해서 모세에게 가르칠 수 있다. 모세가 형에게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16절)은 히브리어의 관용적인 강조 표현법이다. 아론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역사해서 동생의 말에 100% 순종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모세의 약점은 제 삼자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께서 다 인도해주시겠다고 구체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했다.(14-16절) 아이들이 어떤 일에 겁을 먹고 하지 않으려 하거나 잘못을 범하면 부모가 야단을 치지만 세밀하게 다시 다 챙겨주는 것처럼, 80먹은 노인을 하나님은 그렇게 아이처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모든 대책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가 하나 남았다. 지금 하나님은 야곱의 경우처럼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할 바를 모세에게 다 베풀었다. 그런데도 성경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모세가 진심으로 순복하여 헌신하겠다는 고백을 했다는 언급이 없다. 성경이 다섯 번의 질의응답을 비교적 간략하게 묘사했지만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주고받은 내면의 의미는 대단했을 것인데도 그 결말이 너무 흐지부지하다.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는(17절)당부만 남기고 하나님은 조용히 떠났다. 말 빨이 좋은 아론의 말도 바로가 듣지 않거든 내가 기적을 일으켜서 바로를 항복하게 해줄 테니 안심하고 떠나라는 것이다. 끝까지 하나님은 세심히 배려했는데도 모세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주에 계속 살펴보겠지만 18절 이후에 모세가 이 단계에선 흔쾌히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하는 내용이 몇 번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이 화를 내니까 두렵기도 하고 정말 더 이상 할 말도 없어져 쥐 죽은 듯이 침묵했던 것이다. 요컨대 모세는 코가 뀌어서 일터로 끌려 나가는 소의 형국이다.
모세는 애굽으로 가지 않았다간 미디안에서도 편안히 죽지 못하겠다는 인식이 들었을 것이. 그렇다면 서두에 하나님이 믿음과 순종을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는 제 설명이 틀린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김빠지게 헤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큰 은혜요 권능인지 모른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로 엄청난 분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코가 뀐 목사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경우를 말씀드리겠다. 저는 40살 즈음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인생의 극적전환을 겪으며 목사가 되었다. 그 과정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뭔가 초자연적 간섭이 있었는가, 죽을병에서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나았는가, 평소 교회 일에 열심히 헌신하다가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을 했는가, 등등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저의 대답은 한 결 같이 질문자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런 극적 체험이나 열성적 헌신이 없었다. 알다시피 암에서 20 년가량 생존하고 있지만 목사가 된지 몇 년 후에 발병했다. 한마디로 제가 목사가 된 연유는 본문의 모세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코가 뀌었기 때문이다.
제 나름대로 최고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며 성공이 틀림없다고 판단하며 자신했던 계획들이 다 무산되었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이리 가면 막히고 저리 가도 막히다 쫄딱 망했다. 미국의 작은 도시에 가서 조용히 아이들 교육이나 시키고 평범하게 먹고 사는데 지장만 없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국 도착하자 오히려 제 수족을 더 묶어버렸다. 오자마자 출석하던 교회가 풍비박산이 나고 남아있던 몇 가정의 성경공부는 물론 예배까지 평신도였던 제가 떠맡아야 했다. 그 후 유학생 교회를 하게 된 것도 자발적으로 그들이 모였고 떠밀리다시피 담임을 맡게 되었다.
목사가 되리라고는 미국 오기 전이나 후나 계획은커녕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음에도 하나님이 당신의 방식으로 몰아갔다. 목사가 아니고는 다른 길은 하나도 없었다. 코가 뀌었다는 표현이 너무나 적합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은 제가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고의로 거역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미국 올 때에 목사가 될 꿈은 꾸지 않았지만 성경을 더 깊이 공부하고 청년들과 나눴으면 하는 막연한 소망은 품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실현할지 계획은 짜지 못했다. 내 주변의 현실상황이 때문에 즉, 미국에 정착해서 당장 먹고 살 일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코가 뀌어 이끌리는 중에도 그분의 인도하심은 여전히 100%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분의 뜻을 몰라 어리석기만 했고 의심과 불만이 생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분이 이끌어서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하나님께 코가 뀌었지만 스스로는 출애굽의 소망을 평생 간직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건과 되어져가는 형편이 막막해서 어쩔 수 없다보니 어느 듯 80살 노인이 된 것이다. 다섯 번이나 주저했어도 모세였기에 출애굽이 가능했다. 모세의 심령에 애끓는 동족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본문에서도 끝까지 대책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제가 목사가 된 후에 어폐가 있지만 목사라는 직업이 저에게 가장 적합함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너무나 헛된 인생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다. 제게 목사가 가장 적합하다고 해서 제 믿음이 뜨거웠거나 소명감에 불탄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미 목사가 될 만한 소양과 재능을 저에게 심어 주셨고 미국 이민 오기 전의 40년 간 하나님이 일일이 저를 세밀하게 간섭하고 훈련시켜왔던 것이다.
모세가 지금 이 자리에 이르도록 80 평생을 사는 동안 가장 큰 특징이 하나 있다. 무엇인지 짐작해보라. 모세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했기에 그 결과에 영향을 받는 것도 자기 책임이므로 억울하다고 핑계될 수 없는 일을 그는 딱 한 번밖에 못해봤다는 것이다. 애굽 관원을 살해한 일이다.
그는 80년을 일관되게 일상 의식주를 빼고는 자기 생각과 감정과는 무관하게 완전한 타의에 의해 살았다. 애굽 관원을 죽인 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하나님의 원대하고 완벽한 주권과 섭리 아래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하나님에 의해 코가 끌려 애굽으로 돌아가는 형국이다. 모세만은 자기 인생이 비뚤어진 것이 하나님 탓이라고 얼마든지 대들어도 될 만하다. 그가 여러 번 주저한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만하다. 나아가 그의 인생 전체가 너무나 불쌍하지 않는가?
그에 비하면 저는 40년을 완전히 제 멋대로 살았다. 솔직하게 말해 정말 문자적으로도 돌아온 탕자였다. 젊었을 때에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겠으며 무슨 돈이 있어서 사업을 했겠는가? 다 아버지 돈이었고 집으로 치면 두세 채 날려 먹었다.
저 같이 그런 돌아온 탕자도 하나님은 코를 뀌어 목사로 세웠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하나님이신지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게 코가 뀌인 것이 저에게 오히려 최고의 유익이었다. 기독교 신자라면 해선 안 될 말이지만 다시 태어나도 저는 꼭 목사를 할 것이다.
신자가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모세의 개인적 사정은 불쌍하고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출애굽 소명도 너무 말이 어눌했고 또 개인적으로 창피 당하기 싫어서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인지라 계속 고사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그 일을 맡지 않음으로써 다음에 일어날 결과는 무엇인가? 이백 만이 넘는 죄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해서 애굽의 학대 아래 신음해야 한다. 구약 최고의 하나님의 역사는 중지 혹은 지체될 것이다. 이 땅에 최초로 세우려 했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무산 되거나 요원해질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도덕적 의나 종교적 경건의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라. 또 예수 믿는 일이 기도해서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가 결코 아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내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서 나의 개인적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계속 주저하고 있다. 그럼 나를 통해 이루려는 하나님의 큰 역사는 필연적으로 무산 된다. 반면에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하고 순종하면 그로 인해 맺혀질 하나님의 열매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크다.
모세처럼 하나님은 80세가 되어도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 죽기 직전에도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분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난다. 나면서 소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았다. 또 죽기 직전에 쓰임 받은 십자가상의 강도가 있지 않는가? 그는 스스로의 의로 절대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지 못한다. 성령의 역사로 그 심령이 깨끗케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은 후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도 있다. 바로 나사로다. 성경에는 나사로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 언급이 없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아야 한다. 신자가 세상 앞에 하나님께 받은 소명대로 살지 못하면 세상은 반드시 망하고 만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저는 목사임에도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는 13절의 수준에 머물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딱 하나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
목사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살았던 선배로서 드리는 말씀이다. 이러다 하나님께 쥐어터지지 염려하는 차원은 넘어섰다는 것이다. 터지기 전에 내게 맡긴 소명에 충성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동안 너무 많이 그분께 터져봤기 때문이다. 그럼 나 같은 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크게 역사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 하나는 너무나 확실한 진리다.
5/14/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