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16)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4:18-20)

 

 

확신이 없었던 진짜 이유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소명자로 세우면서 모세가 갖고 있던 모든 의심과 불안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주었다. 그럼에도 모세는 진심으로 승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흐지부지 헤어졌다. 그가 장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형제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러 간다고 했다.(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찾아왔고 그 동안의 기도에 응답하여 애굽의 동족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한 목숨 바쳐서 충성하겠다는 감격어린 간증을 해야 정상 아닌가? 최소한 오늘 일어난 일과 하나님과 나눈 대화를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데 마치 남북이산가족 상봉하고 돌아올 것처럼 말했다.

 

나름 장인이 사위의 안전을 걱정할까 배려했을 수 있다. 미디언 제사장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실현하려 여호와가 임재 하셨다고 설명해야 못 알아먹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어디에 있던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을 확신하는 모습은 아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에 당신께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했다.(눅9:26)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외면하신다는 것이며 구원 밖에 두신다는 뜻이다. 바울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롬1:16)

 

지금 모세는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한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자랑한 것은 아니다. 모세 스스로 확신에 찬 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모세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모세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애굽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하나님은 ‘뜬금없이’, 정확히 말해선 ‘비로소’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모두 죽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19절) 모세는 현상수배 된 살인범인데 이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도 사형은커녕 체포도 안 된다.

 

모세는 지난 40년간 출애굽이라는 거창한 소명은 둘째 치고 오매불망 가족을 만나고 싶었고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 가족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체포되어 사형당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냈다. 모세가 네 번이나 하나님께 반문하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대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진짜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하나님께 다섯 번이나 따졌던 것이 사소한 문제였거나 단순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다. 그로선 아주 심각한 고민이었다. 하나님이 80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났지만 너무나 초라하게 가시덤불에서 음성으로만 들리니까 정말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그 하나님이 맞는지 확인했어야 했다.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바로의 왕자였던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히브리인의 구원자로 자격이 없다는 자괴감도 있었다. 애굽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 80년간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아 어눌한 말투에다 성격까지 급한 것은 큰 약점이었다. 하나도 보탬이 없는 사실이었고 그에겐 심각한 걱정꺼리였다.

 

하나님이 신기한 방식으로 나타났고 모세더러 두 번의 기적까지 직접 체험케 했지만 여전히 도깨비 방망이는 주지 않았다. 대신에 계속해서 말씀만으로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설령 돌아가 체포당하지 않고 바로를 만날 수 있다 해도 천하가 뒤집어질 큰 기적이 일어나도 들을까 말까 함을 알기에 모세로선 즉시 순복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혹시라도 모세를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도 말씀만의 약속인데 그가 온전히 믿었을까 의심할 필요는 없다. 고대 왕정국가에선 우리나라도 그랬듯이 왕 한 사람이 바뀜으로써 한 시대가 시작되고 끝난다. 연호가 새로 제정되고 새 시대가 시작된다. 새 왕은 민심을 얻으려고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 대표적으로 이전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린다.

 

지금 하나님이 모세를 찾던 자가 다 죽었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모세가 모를 리가 없다. 모세로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미디안에서 혼자 숨어있었다. 사람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는 양치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평생의 족쇄가 단번에 완전히 풀린 것이다.

 

성경이 20절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 말씀이 참으로 정미하고 은혜롭지 않는가?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따로 없었다. 그 자리에서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것도 아니다. 모세의 손때가 묻은 양을 치던 바로 그 막대기다. 금으로 도금하거나 거창한 장식을 달아준 것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모세의 지팡이지 하나님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귀 띰 한 마디로 이 거창한 소명을 하나님이 성취해주시겠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애굽의 외적인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모세가 떠났을 때보다 더 부강해졌을 것이다. 바로가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것도 여전할 것이다. 모세는 혈혈단신으로 세계 최강국과 대적해야 한다. 공소시효가 풀린 것이 유일한 변화지만 어차피 모세를 찾던 바로가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두고 상황이 바뀐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 모세가 체포를 당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따로 손을 써준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사회의 관습과 제도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른 당연한 결말이다. 유일하게 바뀐 것은 모세 본인에게다. 다섯 번의 질의응답과 두 번의 기적을 체험했어도 립 서비스처럼 공허하게 들렸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제는 살아 역사하는 능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모세가 당신을 믿는데 마지막 걸림돌이자 가장 강력하고 어쩌면 유일했던 불안을 하나님은 비로소 해소해주었다. 모세가 더 신령하거나 경건해진 것이 아니다. 모세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 하나가 바뀜으로써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탈바꿈한 것이다.

 

왜 진작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진작 모세의 가장 큰 고민을 해소시켜주지 않았는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모든 상황이 다 정리된 다음에 뒤늦게 등장하는 경찰처럼 하셨다. 그 전에 애굽의 상황 자체를 일찍이 바꿔버리면 모세가 40년 간 허송세월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러는 편이 훨씬 더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않는가? 최소한 모세를 만나자마자 첫마디로 이 말씀을 해주셔야 했든지 모세 또한 애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출3:10)을 받자마자 이 고민을 제기했어야 하지 않는가?

 

모세는 나일 강에서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살려주셨다. 덤으로 사는 제 2의 인생이었기에 하나님에게 항상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고 인식 감사했을 것이다. 이백만이 넘는 동족들은 애굽에서 학대를 받고 있는데 자기만 유일하게 그런 고생을 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런 판국에 죽기 싫어서 못 돌아가겠다고는 차마 하나님에게 말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되었다.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노인 모세가 아니다.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소명을 받자마자 내가 누구관대 갈 수 있겠느냐고(출3:11), 또 바로가 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느냐고(출4:1) 반문했다. 마지막에서는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고(출4:13) 세 번이나 자기 속내를 은근히 내비쳤다. 하나님도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 모세가 에둘러서 질문하니까 하나님도 짐짓 모른 척하고 에둘러서 대답한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바로 모세에게 알려줬더라면 가뜩이나 성격이 급한지라 그 자리에서 두 말도 안 하고 떠났을 것이다. 부모를 만나고 싶은 열망 하나만으로도 저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모세가 기껏 말이 어눌하다는 핑계 하나만 든 까닭은 무엇인가? 바꿔 말해 약점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이라는 뜻이다. 나머지는 자기 실력으로 뭐든 다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모세가 애굽의 학문을 배워서 말과 행사에 능하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모든 면에서 히브리인 중에는 모세가 최고였다.

 

애굽으로 돌아가도 체포가 안 된다고 처음부터 알게 되면 그의 자신감은 두 배로 커지고 교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을 것이다. 그럼 출애굽은 모세 개인의 업적이 되어버린다. 자기가 잘 나서 그 일을 성취한 줄 착각한다. 최소한도 자기 밖에 그 일을 감당할 자가 없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택했다는 자랑이 은연중에 나온다. 지금 모세는 마지막까지 거절했고 하나님이 코를 뀌듯이 끌고 갔다. 출애굽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그간의 다섯 번의 질의응답은 사실상 하나님이 그렇게 유도한 셈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품고 있던 모든 걱정 의심을 당신에게 마음을 열고 완전히 털어놓게 만드신 것이다. 그런 과정 중에 모세더러 자연스레 지난 80년의 인생을 뒤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모세 스스로도 출애굽이 하나님의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믿었다. 비록 한 번의 과격한 실수로 미디안으로 도망 왔지만 처음에는 어서 빨리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동족을 위한 뭔가 큰일을 하게 혹은 형제들의 고역을 줄이는 역할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나 하나님의 침묵은 마냥 길어졌다.

 

그의 울부짖는 소리가 커질수록 그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도 늘어났을 것이다. 차츰 기도의 횟수와 열정은 줄어들고 지금의 단계에선 그저 막연한 소망으로 붙잡고, 아니 잊지 않는 정도였을 뿐일 것이다. 육신적으로도 이미 80이 넘어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찰 판이 되었다. 하나님이 이젠 돌아가라 당신께서 함께 해줄 것이며 입술에 전할 말까지 심어주시겠다고 약속했어도 여전히 돌아가면 죽을 것이 빤하기에 차마 예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모세가 발견한 자신의 영적 실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대놓고 거절하면서도 그러는 자기 모습을 보고 틀림없이 자기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때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는가? 팔십 평생에 그토록 소망했던 일을 이젠 시작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자기 목숨을 걸어야만 하니까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자꾸만 뒤로 물러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내 대신 다른 이를 보내라”고 하나님께 거역하는 말이 예의 급한 성격대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는 자기 안의 두 사람의 모세가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 뜻에 적극 순종하려는 모세가 있었다. 그런데 주변 환경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염려가 자꾸 커져가면서 하나님께 거역하려는 모세가 순종하려는 모세를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다 삼켜버리는 것을 본 것이다.

 

지난 80년 간 그렇게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소망 전부가 산산조각이 났고 그 모든 것이 자기의 인간적 의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기 속에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하고 초라한 정확히 말하면 더럽고 추한 영적 실상을 본 것이다.

 

그가 다섯 번 하나님과 질의 응답하는 동안에 자신의 지정의는 최대한 발휘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 거약할 의사는 처음에는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여 하나님께 합리적 논리적으로 따졌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불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도 그래서 모세가 질문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알기 쉽게 적절한 답변을 해주셨지 않는가?

 

이것이 전부 아니 실체가 아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차원에서 모세가 지각할 수 있는 지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본인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심령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진짜 역사는 무엇이었는가? 모세가 지난 80 년간이나 연단을 받았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2%의 고집 교만 의로움을 하나님이 완전히 깨트리신 것이다. 모세를 낮추고 낮추어서 모세 쪽에서 자랑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는 제로의 상태로 만드셨다.

 

모세가 그동안 쌓아온 실력, 체험, 지혜까지 완전히 휴지로 만들어 그를 로봇처럼 조종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중에 애굽과 광야의 최고 전문가로 하나님은 그를 100% 활용하셨다. 그가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비로소 깨달은 것은 자신의 철두철미 무력함과 연약함이었다. 반면에 지난 80년도 그냥 허송세월 한 것이 아니었음도 깨달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큰 권능과 은혜로 인도하셨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모세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리에까지 그분이 이끄셨다. 그렇게 하신 것 자체도 그분의 은혜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당신이 이끄는 방식대로만 인생을 살게끔 바뀐 것이다.

 

이 단계에서 바울처럼 하나님을 자랑하지는 못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게는 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들어 사용해 달라고 그분께 의탁하는 순간 자기가 잡고 있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전환되었음을 알았고 또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 그 지팡이를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한 치 앞도 안 보여주시는 하나님

 

출애굽의 성경기록을 살피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모세는 바로가 완악해서 한두 번의 이적으로는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을 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열 번이나 버티고 홍해까지 추격할 줄은 몰랐다. 그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배역하여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고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는 바람에 가나안 땅에 들어 가보지도 못하고 죽을 줄은 하나님이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았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애굽의 장자들이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23절) 몇 번째의 재앙인지 말씀하지 않으셨다. 열 번의 재앙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다음 순서를 몰랐다. 그 때 그 때 일어나는 대로 모세로선 지시대로 따르기만 했다. 요컨대 하나님은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도 구약시대의 가장 큰 종인 모세가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중인데도 말이다.

 

본문에서 모세가 체포당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 하나님은 손도 까닥하지 않았다. 상황이 다 종료된 뒤에 뒤늦게 나타난 셈이다. 논쟁을 다 끝내고나서야 겨우 귀 띰 한마디만 건넸다. 하나님은 너무 짓궂으신 분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이 정확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그럼 이는 신앙생활 함에 너무나 불합리하게 작용하지 않는가? 우리가 왜 믿음을 가지는가? 누구나 인생길에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음은 인정한다. 거기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면 그대로 따름으로써 고난도 줄이고 시험과 유혹에 덜 빠져서 거룩하게 성공한 삶을 살려고 믿음을 가지지 않는가?

 

미리 답을 주지 않으면 최소한도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받으려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모두가 지금껏 경험했듯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기도해도 계속해서 묵묵부답이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도 찬양과 기도를 목청껏 해서 쥐어짜듯이 겨우 얻지만 일어서면 금방 사라지고 말지 않는가?

 

하나님은 대체 왜 이러시는가? 그러니까 우리더러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뻔한 대답으로는 신앙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여러분 솔직히 믿음을 키워서 고난을 잘 이겨낸 적이 있는가? 저부터도 그리 많지 않다.

 

하나님이 한 치 앞도 안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고 유일한 이유 때문이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니까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믿음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라고 그러는 것이다. 만약 한 치 앞을 보여주면 당장 저부터 목사로 헌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자기 개인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다. 이백만이 넘는 동족이 끊임없이 불평 원망 배역 타락하는 모습을 훤히 아는데 어떻게 그 일을 맡겠는가?

 

실제로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전부 광야에 죽지 않았는가?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께 배역하지 않은 신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을 거역하여 벌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출애굽의 대역사로 이룬 열매는 무엇인가? 모세, 아론, 미리암, 여호수아, 갈렙과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순전한 믿음의 극소수의 남은 자들의 구원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출애굽은 모세를 구원하려고 일으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

 

이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믿음을 가지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어지간한 믿음으로 쉽게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치 앞을 보이면 좋은 일이면 순종할 것이요 나쁜 일이면 도망 갈 것이다. 그것은 순종도 아니요 사실은 믿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계명과 소명에 순종한다고 해서 거창하게 다른 이웃, 공동체, 민족을 살린다고 여길 필요도 사실상 없다. 순종을 그렇게 도덕적 종교적으로 접근해선 여전히 인간의 의요 자랑이요 교만으로 흐를 수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할 판에는 팔십 년 평생의 소망마저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순종이란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웃을 위한 일도 아니다. 순종은 바로 순종하는 신자 본인을 위한 일이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받지 못한다. 그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3:14절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이미 배운 대로 하나님은 신자에게 “내다. 내라니까. 내가 너를 떠난 적이 없으니 너는 내 손만 잡고 같이 가자.”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 목숨이 걸리자 스승을 부인하고는 도망쳐버렸다. 모세는 그래도 코가 뀌듯이 어쨌든 하나님을 따라나서기는 했다. 그러자 그의 최고 걱정 고민거리를 하나님은 해소해주었다. 순종을 하자 은혜와 권능을 누리게 해주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망친 베드로를 당신께서 끝까지 찾아가셔서 기어이 당신의 종으로 세우셨다. 이 얼마나 큰 은혜요 권능인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묵묵히 동행하자는 것이다. 그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꿔주신다는 것이다. 앞길과 자신을 안 보여주시니까 당신께서 더더욱 다 책임져주시지 않겠는가?

 

모세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여 동행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 다시 믿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면 아직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순종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었고 만족 기쁨이라곤 없는 철두철미한 실패였음부터 생생하게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선 절망이요 죽음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 치 앞이 안 보여도 그분을 묵묵히 따를 수 있지 않는가?

 

그 많은 실패를 겪고도 하나님께 순종 동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불신자들이 생을 마감할 때에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야말로 허무했다는 말 한마디 하고는 죽는 길 말이다. 반면에 모세처럼 80살이 지나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 동행하면 반드시 모세의 마지막 영광스런 40년처럼 살게 해주신다.

 

5/2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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