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이 가장 잘 쓰는 수법

조회 수 625 추천 수 0 2017.06.12 03:49:32

사탄이 가장 잘 쓰는 수법

출애굽기 강해(19)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10-21)

 

불신자보다 못한 신자들

 

모세는 출애굽 소명을 수행하면서 바로가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히브리 동족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순복하지 않으리라 염려했다. 바로와의 첫 대면은 멸시만 받고 끝났다. 오늘의 본문은 동족에게서도 동일한 대우를 받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 헌신한다고 세상의 환호와 칭찬이 기다리지 않는다. 멸시와 핍박만 따른다. 신자의 잘못이 아니요 하나님의 권능의 부족도 아니다. 세상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길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환난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담대하라고 당부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길, 신자의 삶은 좁고 협착해 머리 둘 곳도 없다. 마음 놓고 쉴 틈도 없을 정도로 이런 저런 고난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삶이 고달프다는 것을 잘 알고 신자가 오히려 더 모르는 것 같다. 전도를 해보면 일단 세상에서 즐길 것 다 즐기고 나중에 늙으면 믿겠다는 사람이 꽤 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향락과 돈을 밝히는 생활을 중지하고 이전과 달리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며 경건히 살아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다.

 

반면에 신자는 “이렇게 오래 열심히 믿었는데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가? 형통하고 출세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고난은 없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떼를 쓴다. 죄송하지만 얼마나 오래 열심히 믿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루라도 정말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랐는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정말로 충성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그랬음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고난이 생겨야 그나마 하나님께 따질 수 있다. 예수님이 고난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고 전제하지 않았는가?

 

모세는 히브리 동족이 순순히 따르리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너무 심하다고 이성적 판단을 넘어 감정적 상처까지 받은 것 같다. “주여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기게 하느냐고 두 번이나 부르짖었다.(22절)

 

그는 진심으로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주신 소명에 헌신하는 중이었다. 동족이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까지는 괜찮다. 대놓고 원망하리라고는 나아가 저주까지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호와가 너희를 판단하기 원한다는(21절) 말은 하나님이 벌 주기 원한다는 뜻의 관용어법이다. 하나님께 저주의 신탁을 한 것이다.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반응

 

지금 모세가 잘못한 것 하나 없다. 모든 일은 바로의 강압적 반발로 벌어진 것이다. 그럼 모세와 아론과 모두가 다시 모여서 대책을 의논했어야 한다. 바로에게 어떻게 대책할 것인지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는지 가르쳐 달라고 합심해서 기도라도 했어야 한다.

 

만약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놓으려면 바로와 힘겨루기를 몇 번이나 했지만 실패한 후라야 한다. 그것도 모세더러 자기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라고 부탁한 후에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아들은 것 아니냐, 하나님께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지 않은 것 아니냐 따질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모세 너를 못 믿겠고 앞으로는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따지겠다고 해야 합당한 순서다. 그러지 않고 바로와의 첫 대면에 실패했다고 당장에 모세를 못 잡아먹어 난리다.

 

바로가 쉽게 허락하지 않고 뭔가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정도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비겁하게 배반한 베드로도 로마를 물리치는 일에 목숨 바치겠다고 칼을 들고 설치지 않았는가? 전혀 그런 시도도 하지 않고 엉뚱하게 모세에게 화풀이를 했다.

 

불행하게도 이런 행태가 출애굽 이후에도 내내 지속되다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당신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한 발자국도 디뎌보지 못하고 다 죽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환경에만 모든 신경을 쏟은 탓이다. 자기 육신의 편안함만이 최우선으로 해결할 과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생래적으로 죄에 물든 본성이다. 오직 자기만 높이려는 이기적 탐욕이다. 하나님도 그 욕심을 채우는데 힘을 보태주는 도우미(helper)로 간주한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순종하고 복을 주지 않으면 금방 하나님도 잊거나 거역하는 끈질긴 습성이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은 남아서 직접 원망하지 못하고 애꿎은 모세에게만 불평을 퍼부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대언하고 이적으로 보증하자 자기들 지도자로 옹립하고 여호와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이 엊그제인데 이렇게 표변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고생을 할 바에야 출애굽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이런 고생만 없다면 계속해서 노예로 살아도 좋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백성을 포함해 당장 저부터도 그 심성이 절대로 경건하지 않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선언한다.(렘17:9)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의 마음이 가장 사악하다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대로다.

 

우리가 인정하기는 너무 싫지만 엄연한 사실이요 진리다. 인정하기 싫다는 것은 거룩하게 살고 싶은 소망은 있고 그런대로 노력을 했지만 심심찮게 내 의지력이 무너지더라는 뜻이다. 그러니 많이 억울한 것이다. 인간이 갖는 이런 원초적 딜레마를 예수 십자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인간 외부여 여건을 풍족하고 안락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차적 책임이 아니다.

 

인간의 소원과 의지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속에 인간을 묶어서 노예로 부리고 있는 가공스런 사악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또 히브리인들이 지난 4백 년간 소망해왔던 일이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게 반응하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 그 배후에 당연히 사탄의 농간이 있다는 뜻이다.

 

비교적 평안했던 노예 살이

 

출애굽은 히브리 신인 여호와의 명령이고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벌 받는다는 모세의 통보는 바로에게 거짓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서 작당해서 있지도 않는 신의 계시라는 핑계를 댄다고 비난했다.(17절) 벽돌에 들어갈 짚을 스스로 조달하되 하루 작업 할당량은 줄이지 않았다.(18절) 노동량이 배로 늘어난 셈이다.

 

바로가 스스로 거짓말로 여겼다면 모세를 벌주어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고 대신에 히브리인들 노역만 늘린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한 기적적 출생을 했던 모세가 40년 만에 80 노인이 되어 도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가 볼 때는 그로 인해 히브리인들 사이에 출애굽의 헛된 소망이 불 붙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곧 이 땅에서 나갈 텐데 힘들게 일할 필요 있나 여기고 태업을 하려는 분위기를 아예 사전에 차단하려는 뜻이다. 앞으로 또 다시는 이런 헛소리에 넘어가지 말라. 절대로 도망칠 생각하지 말라. 특별 휴가를 요청할 꿈도 꾸지 말라. 바로는 세속의 왕으로써 적절한 통치 기술을 구사했고 그로선 당연하고 합당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히브리인들의 눈에 뻔히 읽히는 수법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과의 언약이자 자기들의 오랜 소망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 아닌가? 바로가 여호와를 무시하는 것과 맞먹을, 아니 더 심하게 무시한 것 아닌가? 사탄의 계략은 항상 교묘하고 끈질기고 음흉하다. 바로의 잔꾀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절대로 경시해선 안 된다.

 

바로는 평소에 즉, 이 조치 전까지는 히브리 노예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했다. 우선 바로 앞의 4:29에만 봐도 모세와 아론과 히브리 장로들이 아무 제한을 받지 않고 모였다. 집회는 물론 어쩌면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자유까지 허용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광야 사흘 길을 가서 예배드리겠다고 하니 발끈하고 쉬려고 핑계 댄다고 반발했던 것이다.

 

또 신명기 11:10에 애굽에서 곡식을 파종하고 채소밭에 물을 대었다는 기록이 있다. 노동이 가능할 만큼의 최소 식량만 애굽이 배급해주며 그저 학대만 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쇠사슬 차고 채찍을 맞는 모습만 상상해선 안 된다. 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상업적 거래도 허용한 것 같다. 바로로선 자기들 돈 한 푼 안들이고도 부려먹을 수 있으니 더더욱 열 번까지 완강하게 버틴 것이다. 히브리인들도 그래서 광야 방황 중에 애굽에서 채소는 물론 수박과 생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고 한탄한 것이다.(민11:5)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 얼마 동안은 고센 땅에 유대인 자치 공동체가 존속한 것은 분명하다. 구태여 그것을 허물 필요가 없다. 그런 공동체를 도망 못 가게 묶었으니 애굽의 군사력은 아주 강력했다. 요셉을 모르는 바로들도 강력한 군사력으로 통제하는 위에 당근도 적절히 공급했다. 히브리인은 사백년간 반란 도주는 꿈도 꾸지 못하고 했고 점차 그 생활에 타성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모세 한 사람 때문에 갑자기 이전과 비교가 안 되는 혹사를 당했다. 비록 노예 살이는 해도 그런대로 유지되던 질서와 평온함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모든 원망이 필연적으로 모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억울하기만 한 유대 기록원들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자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기록원을 때렸다.(14절) 기록원은 건설현장의 십장 같은 중간관리자로 그들을 통해 히브리인 전체를 통솔했다. 그런데 이름 그대로 직접 노동은 하지 않고 벽돌 숫자만 헤아렸는데 그들을 때렸다. 틀림없이 바로의 지시대로 따랐을 것이다.

 

기록원들로선 자기들을 세울 때에 대우를 잘 해줄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동안 동족들의 오해와 원망을 받아가며 바로에게 최대한 협조했다. 그러니까 곧바로 바로를 찾아가 “왜 우릴 때리느냐?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최선을 다해 할당량을 맞추도록 독려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숫자인 줄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실적으로 봐서 알지 않느냐?”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다.

 

바로는 즉각 너희가 게으르다고 야단쳤다. 바로는 벽돌 숫자에는 사실 관심이 없었고 거론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최대한의 자치권을 허용해주었다. 큰 불평 없이 우리 서로 잘 지내왔지 않느냐? 왜 갑자기 광야 사흘 길을 가려고 왕복하면 최소 일주일을 쉬겠다고 하느냐? 이 조치는 나로선 부득이 내린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요구한 모세의 거짓말 때문이다. 그에게 가서 따져라.”고 대꾸했다.

 

바로가 참 영악하지 않는가? 반란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아직 히브리 신은 인정도 하지 않았다. 모세는 코웃음 치며 문전박대했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작업 분위기가 해이해지는 것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언제든 쉽게 다잡을 수 있다.

 

오직 모세를 히브리 대중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것이다. “계속 모세 말을 들으면 모두 십장 직분을 빼앗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겠다. 모세의 말과 내 말 중에 누구 말을 들을래?”라고 다그친 것이다.

 

지난주의 경우처럼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돈과 하나님, 거짓과 진리, 로마 황제와 예수, 세상과 타협하는 것과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 둘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불신자는 계속 세상을 즐기고 예수는 나중에 믿겠다고 선택한 자다. 신자는 하나님을 몰랐던 때의 헛되고 헛된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선택한 자다.

 

믿은 후의 신자 일생도 이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계속해서 강요받는 삶이다. 예수 믿으면 더 힘든 것이 그전에 비해 현실적 고난이 많아서가 아니다. 고난은 믿음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닥친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거의 항상 내 본성에 무너지고 마니까 힘겨운 것이다. 바로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인데 작금 세상의 형통을 위해서만 믿음이 동원되고 있으니 하늘에서 하나님이 통탄할 노릇이다.

 

히브리 십장은 매 몇 대 맞고 또 바로의 엄포를 듣고는 하나님 대신에 돈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남들보다 겨우 조금만 안락한 삶을 포기하기 싫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고난은 죽기보다 싫으니 차라리 사탄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사탄의 진짜 노림수

 

사탄이 인간을 가장 손쉽게 다루는 수단은 돈이다. 그 뒤에 숨겨진 목적지는 인간끼리,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결국 하나님을 멀리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돈 출세 형통 무슨 수단이던 동원한다.

 

에덴동산에서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사랑을 했던 인류 최초의 부부마저 갈라놓은 바로 그 솜씨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탄의 최고 기술이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중심으로만 판단하므로 조금만 먹고 마시는 것에 불편 부족하게 만들면 출애굽 같은 크고 오랜 소망마저 전혀 망설임 없이 포기한다.

 

히브리 기록원들은 출애굽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전초병이 되어야 하고, 애굽과 직접 충돌하면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이 될 재목이다. 애굽인들도 그럴만한 사람을 골라 임명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육신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원수인 바로와 곧바로 한통속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까진 필연의 수순이다. 말씀드린 대로 노예근성이 이미 몸에 배였다. 아마 저라도 당시 그런 자리에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바로는 모세와 히브리 백성을 분리시키는 정치술수에 성공했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 바로의 지혜를 훨씬 능가한다. 사탄의 진짜 목표는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모세다.

 

모세까지 넘어트려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의 씨를 완전히 말리는 것이다.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것이다. 기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듯이 말이다. 그것도 호산나 호산나하며 열렬히 환영하던 동족을 며칠 만에 표변하도록 조종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도 그 동일한 수법을 모세에게 사용했다.

 

사탄의 영악한 지혜가 모세가 평소 성격이 급하고 말이 어눌해 때로 말보다 행동이 앞선다는 점과 애굽의 관원을 죽인 전과까지 모를 리도 없다. 그래서 히브리 동족이 원망하면 모세가 죽이지는 않아도 같이 맞서서 싸우게 만들려고 도모했다. 최소한 말이 어눌하니까 제대로 반박 설득 못하게 해서라도 지도자로서의 위신을 떨어트리려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모세를 매장시켜야 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운 종답게 동족과 직접 싸우지 않았다. 이후로도 지금처럼 모든 문제를 하나님에게 들고 나가 기도했다. 동족을 야단을 쳐도 하나님 뜻대로 했고 벌을 줄 때도 그분의 일과 말을 대신하는 역할만 맡았다.

 

모세의 가장 모세다운 모습은 히브리 공동체를 끝까지 지키려 노력한 것이다. 바로의 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오매불망 소원은 히브리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해보는 것이었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여 한 번이라도 여호와께 동족과 함께 마음껏 예배 찬송 드리는 것이었다.

 

사흘 길을 광야로 나가 여호와께 예배드리러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대언한 것이지만 그전에 모세의 진심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진심을 들어 사용했다. 또 그럼으로써 바로가 거짓말 한다고 착각하게 했고 나아가 그 배후의 사탄으로 사태를 이렇게 진척시키도록 가만 내버려 둔 것이다. 믿음의 종 모세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광대하고 완전한지 알 수 있겠는가? 끝까지 모세는 사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의 예표였던 것이다.

 

모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근거

 

모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지난 80년 간 연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방에 믿음의 동료는커녕 동족도 한 명 없이 처절하게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과 씨름했다. 출애굽의 소명에 불타올랐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아 창대하게 되는 꿈을 매일 꾸었다.

 

그 꿈을 나이 80이 되어가자 거의 포기할 뻔 했지만 떨기나무 불꽃에 임재하신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소명을 불어넣었다. 다섯 번의 질의응답과 최근의 할례 사건까지 하나님 그분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얼마나 오묘하고 광대하며 신실한지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의 중심에 여호와만 자리 잡았고 만사를 여호와 중심으로 판단 행동하게 된 것이다. 신실한 여호와의 종이 되어 그분의 지팡이를 놓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주의 종이다. 목사 선교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분의 왕 같은 백성일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 불려 나왔다. 세상과 사람 앞에 예수님의 전권 대사로 서야 한다. 신자가 행하면 하나님이 행한다. 신자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한다. 저와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일이다.

 

이 부분에 확신이 없는가? 주의 종으로 세우지 않았는데 왜 성령을 평생 내주토록 해주셨는가? 구원 직후에 바울의 고백처럼 더 좋은 이 땅처럼 고난과 슬픔과 상처와 억울함이 없는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면 더 좋지 않는가? 이 땅에 남겨두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하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부터 새롭고 거룩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라는 것이다. 성령을 내주케 한 것이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의 역할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그와 같이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거역함을 당하는 것이 아주 정상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들, 심지어 가까운 동료와 성도들로부터도 질시와 모함과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밖에서 오는 핍박은 그 수가 빤히 보인다. 정작 중요하고 아주 조심해야 할 부분은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서 우리 속에서 속삭이는 말이다. “하나님 일을 열심히 했고 내가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왜 나만 억울하게 손해 상처 핍박 받아야 하는가? 이러려고 하나님 일을 했던가?” 맞다. 잘못한 것은 그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기록원처럼 하나님은 두렵고 동족에게 원망을 퍼붓게 만들려는 사탄의 흉계임을 알아야 한다. 결코 주변 사람과 맞서 싸워선 안 된다. 마지막 한 순간에 자칫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 자기도 망하고 동료도 망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동체 전체가 폭삭 내려앉는다.

 

불신자도 예수 믿으면 당연히 고난이 따른다고 믿는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남들이 당하는 억울함, 상처, 고난을 대신 혹은 함께 짊어져주기 위해서다. “왜 나 만?”이라고 여기면 신자 됨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부름 받지 않았다. 신자가 바로 그 생각 하나만 하지 앉아도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다.

 

신자는 반드시 범사에 모세처럼 하나님 중심으로만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과만 상대해야 한다. 사람끼리 상대해서 상대는 물론 나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나님 그분께, 심지어 불평, 원망, 분노, 저주까지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라. 지금도 모세 때의 애굽과 하나 변함없는 세상에서 그 길 외에 출애굽 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6/1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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