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맡길 것은 문제와 고난이 아니다.

출애굽기 강해 (2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7:8-13)

 

 

출애굽에 목숨을 건 모세

 

동족에게 버림받은 모세가 하나님에게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당신의 백성과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억하라고 응답하셨다. 모세가 그대로 동족에게 대언했지만 아무도 수긍은커녕 이해도 못했다.

 

모세도 80년간이나 침묵하시는 하나님에게 많은 의심과 불평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초자연적인 대면을 했고 이적도 실현했고 직접 계시를 받았다. 그럼으로써 그 때까지 품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의심과 불만이 해소되었다.

 

비록 80년이 걸리더라도, 아니 80년이 지냈는데도 반드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함으로써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깨닫고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첫 대면에서 다섯 번이나 하나님께 꼬치꼬치 따지던 모습과는 달리 7장 이후로는, 그 전에 할례 사건 이후로는 하나님께 묵묵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은 요한이 세상의 모든 책으로도 기록할 수 없다고 말한 대로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그러나 기적의 의미는 제쳐두고 외적 스케일만 보면 출애굽이 신구약을 통 털어 하나님의 전능성이 가장 크게 발휘된 사건이다.

 

하나님은 그런 큰일을 팔십이 넘은 믿음의 노인 단 한 명으로 이루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전능성만 믿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걸고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것이다. 오늘 본문의 모세와 바로가 두 번째로 대면하는 사건에도 하나님의 그런 신실하신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바로는 자기가 노역의 양을 늘려 히브리인들이 고통을 겪게 되자 모세가 동족의 미움을 샀다는 그간의 사정을 다 들었을 것이다. 또 감히 자기 앞에 헛소리 했다간 사형 당한다는 것도 바로의 궁정에서 자란 모세가 잘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도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모세가 목숨을 걸 정도로 이 일을 심각히 여긴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이번에는 멸시하지 않고 이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고대에는 어떤 신에게 받은 계시를 전할 때에는 그에 걸맞은 이적을 실현해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관례였다. 처음 모세를 만났을 때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히브리 신의 실존조차 인정하지 않고서 콧방귀도 안 뀌었던 바로다. 이번에는 조금 양보하여 정말로 너희에게 신이 있다면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지 증명해보이라는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애굽의 요술사

 

아론이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모세의 지팡이를 땅에 던지자 뱀으로 변했다. 그런데 애굽의 요술사들도 동일한 이적을 일으켰다.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마술사들의 가장 흔히 쓰는 수법대로 지팡이를 던지는 척하며 소매 깃에 숨긴 뱀을 던질 수 있다. 또 인도에 가면 지금도 코브라를 피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한다.

 

당시 애굽에선 뱀에게 최면을 걸어 뻣뻣해지면 지팡이처럼 들고 있다가 땅에 던지면서 최면을 풀어 꿈틀꿈틀 움직이게 해서 마치 뱀으로 변화된 것처럼 속였다고 한다. 본문 11절은 요술로 그와 같이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거짓 사술을 사용한 것이다.

 

아론을 통해 역사한 하나님의 능력은 차원이 전혀 달랐다. 인간 요술사가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수준이다. 다시 12절을 자세히 보라.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이고 애굽 술사들의 것은 여러 개다. 아론의 뱀 한 마리가 몇 마리가 되었던 그 뱀들을 다 잡아먹었다.

 

뱀끼리 싸울 때에 가장 기괴한 장면은 뭔지 아는가? 서로 상대의 꼬리부터 삼켜나가다가 둘 다 죽는 경우다. 아론의 뱀이 다른 뱀과 싸울 때에 나머지 뱀들이 아론의 뱀의 꼬리를 물지 않았다. 아론의 뱀의 강력한 파워에 주눅이 들이 근처에 얼씬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12절에 분명히 “삼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알다시피 뱀은 먹이를 이빨로 물어뜯지 않고 통째로 삼킨 후에 소화하느라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 아론의 뱀이 다른 뱀 한 마리를 삼켜 소화시킬 동안 다른 뱀들이 꼼작도 않았거나 삼키자마자 소화시켜서 그 전부를 눈 깜짝할 사이에 삼켜버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애굽 술사의 뱀들은 전투능력과 의지 자체가 없었다. 뱀의 문제가 아니다. 술사들에게 뱀에 명령을 하달하여 뱀이 그대로 따르게 하는 능력이 아예 없었다. 뱀들에게 실존조차 하지 않는 애굽 우상 신들의 능력이 발휘될 리가 없다. 열왕기상 18장의 바알 선지자 450명이 엘리야 한 명에게 꼼짝 못하고 당한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그 배후에 작동하는 사탄도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는 한 마리 뱀 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갖고 놀던 바로 그 뱀에게 말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재미있고 짓궂기까지 하지 않는가? 사탄을 너무 우습고도 가볍게 갖고 놀지 않는가 말이다.

 

더 강퍅해진 바로

 

더 흥미로운 일이 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요술사들은 단순히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기들은 알고 있다. 현재 세계 최고 마술사로 불리는 데이빗 카퍼필드도 자기에게 그런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트릭이라고 인정하지 않는가?

 

뱀에게 최면을 걸고 푸는 것만 해도 보통사람이 못하는 상당한 실력이긴 하다. 어리석은 대중들이 열광할 만하고 또 신이 배후에 역사한다고 호도 내지 착각한다. 사탄이 그런 점을 이용해 자기에게 신탁이 가능한 영매로 세운다. 또 고대에는 모든 인생사를 왕이 주관했다. 그래서 왕궁에 전속되게 해서 나라의 대소사의 길흉을 점치게 했고 또 왕의 명령을 집행함에 정당성을 신의 이름으로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게 했다.

 

바로도 어리석긴 마찬가지다. 같은 인간들끼리 오직 이 땅에서 형통하고 풍요해지는 동일한 목적에 따라 정치집단과 종교집단이 손잡고 작당해서 백성들을 기만했다. 자기들 배만 채우려고 말이다. 사탄도 자신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대로 인간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거역하게 만드는 일에 그들을 꼭두각시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뱀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바로와 애굽의 요술사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속으로 뜨끔하고 놀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져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13절)

 

바로로선 자기들 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베풀었기에 모세가 조금 더 강력할 뿐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신들과 많은 술사들이 남아 있다. 신들의 다툼은 어차피 지고이기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니 이번에 한 번 진 것뿐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아직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 없으니 모세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사탄은 욥기에서 보듯이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 존재인 천사들의 우두머리였지만 타락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다 쫓겨난 자다. 큰 능력을 갖춘 거의 영원한 존재이긴 해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무생물인 지팡이를 생물인 뱀으로 바꾸는 것은 창조로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 사탄이 욥의 아들들을 죽였지만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참새가 아무리 값싸게 팔릴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즉, 죽게 버려두지 않는다고 했다.(마10:29) 너희 즉. 예수 믿는 신자들은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다고 약속하셨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신자의 멸망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보일 적절한 반응

 

본문 사건에서 아마도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에 가장 크게 놀랬을 것이다. 모세는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이적의 예행연습을 했다. 바로의 궁정에서 술사들의 뱀 요술을 익히 봐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뱀에 물려 자칫 즉사할 수 있는데도 꼬리부터 잡고 자기 손 안에서 뱀이 꼼짝 못하고 있다 다시 지팡이로 바꾸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작정했을 것이다. 팔십 노인이라고 문전 박대했던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다른 권능을 보여주었다. 더 중요하게는 모세의 그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고 아론더러 던지게 했다. 모세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워 자랑하려 했던 교만한 마음을 비록 속으로 잠시 스쳐지나간 것에 불과해도 하나님은 철저히 깨트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고 완전하지 않는가? 인간세상의 일상적 사물 사건을 통해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행할 수 없는 당신만의 권능을 실현하신다. 당신의 당신 되심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신다.

 

지금 동일한 이적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바로가 그 지성과 도덕성에 모세보다 열등한 자가 아니다. 바로가 아주 악한 심성을 가졌다고 여기면 안 된다. 어쨌든 그도 애굽의 국리민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자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자신이 잠시 생각으로 지은 죄도 회개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헌신하였다. 반면에 바로는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졌고 완악하게 거역했다.

 

각자의 영에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영이 작용했다는 것 외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서로의 가치관이 달랐고 인생의 방향이 달랐다. 요컨대 사람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선 그 안에 당신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사람을 오직 두 부류로만 나뉜다. 당신의 영이 없는 자는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당장에 애굽을 무너뜨릴 능력이 있었다. 바로와 첫 대면에서 모세는 말로 경고했다. 지금 둘째 대면에선 그 경고가 절대 빈말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였다. 그럼 세 번째는 직접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누구라도 예측이 가능하다. 히브리인은 물론 애굽인들도 상천하지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고 다른 신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발 깨닫고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래서 약속을 어김없이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이 특별히 신자가 그분에 대해 보여야 할 적절한 반응은 그분의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는 것이다. 그분의 힘에 복종하지 말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진심으로 순복하는 것이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만 구하는 인간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1) 오늘 본문의 바로가 말한 것과 표현이나 내용에서 동일하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멀고 유일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랐다. 또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고 메시아가 오면 하늘에 속하는 큰 권능을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런 순수한 의도는 없었다. 먼저 16장에 이르도록 예수님이 이미 숱한 표적을 보였기에 더 이상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앞 15:31에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장님이 보는 이적을 주님이 베풀자 일반 유대 백성들은 기이히 여기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오신 분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소에 사이가 안 좋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찾아왔다. 바리새인은 종교지도자, 사두개인은 정치지도자이다. 출애굽기 오늘의 본문처럼 현실의 풍요를 지키려는 공통의 유일한 목적에서 짝짜꿍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기존의 종교와 정치 질서체계를 흔드는 이단 내지 소요분자로 몰아서 죽일 구실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들의 흉계를 모를 리 없는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표적 외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답했다.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스스로 올라가 죽으시겠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바로와 애굽을 그 자리에서 멸망시키지 않은 것처럼 표적만 요구하는 유대 지도층들조차, 그것도 당신을 죽이려드는데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구약의 바로와 신약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적으로 양극단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뜻이다. 시대와 장소가 아무리 달라도 인간들의 하나님에게 하는 요구는 오직 하나다.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현실에서 형통케 해달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도 한 결 같다.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언약을 실현하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상적으로 불가능한 일, 인간 능력 밖의 일을 나는 도무지 할 수 없으니 하나님더러 대신 해달라는 것이다. 흔히들 우리는 할 수 없으니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아주 성숙한 신앙으로 여겨진다. 이는 분명한 진리이고 성숙한 신앙이다. 그러나 매우 정직하고도 솔직하게 표적을 구하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속아서 착각하는 측면이 그 안에 있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바꿔 말해 나머지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고 하겠다는 뜻이다. 또 내가 못하는 것이기에 이미 자신이 계획하고 소망한 일들을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벽에 부딪혔기에 대신 해달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원죄에서 크게 진전된 점이 없다.

 

이스라엘이 로마를 물리쳐 달라는 요구는 분명히 선하다. 예수님도 잘못이라고 정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로마를 멸망시키는 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계획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에겐 더 크고 중요하고 그분만의 시급한 계획이 따로 있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로마도 애굽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와 애굽이 그분에겐 박멸의 대상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똑 같이 긍휼을 베풀어야 할 당신의 백성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억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뜻이 무엇인가? 네가 할 수 없는 크고 긴급한 일만 하나님께 의탁하지 말라는 것 즉, 표적을 구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당신을 자기가 하다하다 못하는 일의 뒤치다꺼리만 해주는 해결사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빈 말을 절대 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하신 약속은 토씨 하나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분에겐 너무나 당연하다. 정말로 기억해 준행할 일은 우리 존재, 삶,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약속 안에 맡기는 것이다. 그 이전에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약속 안에 이미 들어와 있을 뿐 아니라 약속 자체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침묵하거나 고난과 징계를 주는 것도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필요악적인 부차적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로 거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필연의 과정일 뿐 아니라 그조차 넘어서 그분의 약속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무슨 일이든, 아니 급한 일만이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아주 귀한 일이다. 불신자 시절에는 꿈도 못 꿨던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신앙행위로 하나님도 기쁘게 들으시고 당신의 선한 뜻대로 응답하신다.

 

그러나 어떤 사건, 환경, 고난, 문제, 사람 등등 하나씩 떼서 하나님에게 맡기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내 계획과 소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된다. 특별히 그분의 능력에 편중되는 믿음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하나 해결되면 맡길 것이 없어져서 당분간 쉰다. 잠시 영적인 전투를 멈추기에 성장은 뒷전이고 오히려 자칫 후퇴할 수 있다. 신앙생활이 항상 간헐적이며 up and down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만 만나 그 해결을 시도하는 일 밖에 하지 않는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에게 정작 맡겨야 할 것은 자신의 일생 전부다.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된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일생 자체가 사실은 이미 하나님께 맡겨져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확증되었고 영생을 보장 받았다. 당연히 이 땅의 삶 전부도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들어가 있다. 그분의 계획과 일정대로 다스림을 받는다. 그분은 오직 한 가지 목표로 이끄신다. 현실의 형통과 풍요가 아니라 당신의 영광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단 한 치의 차질 없이 나아가게 하신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 작품, 기쁨, 소망, 목적이다. 약속을 신실히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그분의 약속 안에 들어와 있는 인생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요 축복인가? 하나님 그분이 내 인생에 대한 약속을 마련해 놓으시고 또 그분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이뤄주고 있는 신분이 되었지 않는가?

 

신앙묵상의 순서를 바꿔라.

 

제가 목사로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동일한 한 사람의 신자이자 하나님 백성으로서 지금껏 믿음의 씨름을 하여 얻은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저도 내 계획만 붙들고 기도하거나 때로 나태해져 급한 일이 생겨야만 내 소망대로 어서 빨리 해결해 달라 기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하는 풍성하고도 완벽한 모습으로 저를 바로 세워주셨다.

 

지금도 현실에서 획기적으로 개선 된 면은 없고 여전히 힘든 고난 중에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그분의 너무나 풍성하신 긍휼과 자비 안에 드러나기에 진심으로 순복할 수 있었다. 수시로 하나님께 멀어지고 반대로 가다가 많은 실패를 겪었다. 수십 수백 번의 믿음의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내 이름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고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인생 전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러분보다 나아진 것이라곤 어떤 큰 어려움이 와도 이전만큼 안절부절 하지 않고 조금은, 아주 조금 흔들리지 않는다는 정도다.

 

모세의 120년 인생을 보라. 그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이었지 않는가? 날 때부터 그분의 기적을 맛보았다. 그 자체가 모세는 그분의 약속이었다는 증거다. 비록 80이 되도록 하나님께 의심 불평하며 씨름했지만 자신의 인생이 그분의 약속임을 깨달은 이후로 죽을 때까지 40년은 오직 묵묵히 순종했지 않는가?

 

우리의 신앙적 묵상의 순서를 바꿔야 한다. 지금껏 해왔던 하나님 그분에 대해 생각하는 패러다임을 정반대로 바꿔야 한다. 우리는 가장 먼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부터 생각한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이것 하나 못해주시는가? 불만 염려가 생긴다. 그럼 그분이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인가? 약속을 안 지킨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이런 순서로만 생각을 진행해왔다. 그러니 평소에 자신의 전부를 맡기지 않고 급하고 위중한 일만 그분께 들고나가 표적만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지금껏 순서와 정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그분의 기쁨이 이미 되어 있다. 그분의 사랑 가운데 온전히 붙들려 있다. 그러니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는 없다. 지금도 나를 통해 그 약속을 지켜나가는 중이다. 단 당신의 방식과 시기에 따라 때로 침묵 부재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그분의 전능성이 올바르게 드러난 모습이다. 내가 그분의 약속이라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해야 삶에서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7/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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