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이 풀지 못한 피라미드의 비밀
출애굽기강해 (22)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출7:20-25)
기적인가? 자연재앙인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출애굽을 구두로 요청했으나 한방에 거절당했다. 두 번째는 당신의 권능을 실현해보였다. 전쟁으로 치면 처음은 선전포고이고 둘째는 무력시위였다. 모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강력하고도 합당한 응징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본문은 애굽이 받은 열 번의 징벌 중 첫째로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다. 둘째 대면에서 모세는 지팡이를 뱀으로 바꿨고 애굽 술사들도 비슷한 흉내를 내었다. 이번에도 애굽 요술사들은 동일한 이적을 실현했지만(22절) 피 빛 물감을 뿌려서 눈속임을 한 것이거나 사탄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났을 수 있다.
그러나 애굽 술사의 뱀 여러 마리가 모세 뱀 한 마리에게 삼킴을 당하며 무참하게 패배했듯이 이번에도 하나님의 권능과는 비교가 안 된다. 자세히 19절을 보면 하수, 운하, 못 등 모든 물이 다 피로 변했다. 식수와 농업용수 사용이 전면 불가능해진 것이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애굽의 생축과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경고다.
실존조차 않는 우상 신들이나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농간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그보다 현대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기독교 외부에서 출애굽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더 문제다. 애굽에서 흔히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모세가 미리 경고하여서 그대로 발생하면 마치 모세가 일으킨 기적처럼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다. 아니면 후대의 성경기자가 그런 현상을 응용해서 소설처럼 지어낸 이야기라고 비난한다.
나일 강이 범람하면 붉은색 점토가 퇴적하여서, 또는 붉은 색 플랑크톤이 일시에 대량으로 발생하는 적조 현상이 생겨서, 붉은 핏빛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하여 악취가 났다.(18절) 붉은 점토가 퇴적한다고 물고기가 죽지 않는다. 플랑크톤이 많아지면 도리어 물고기의 먹이 감이 풍부해진 것이다. 나아가 나무와 돌그릇에 즉, 집안에 떠놓은 물에 점토나 적조가 생길 수는 없다.(19절)
자연 현상 혹은 재앙도 마땅히 하나님의 궁극적 주권 아래 있다. 설령 모세가 단순히 미리 예고한 것뿐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아홉 번이나 정확히 교통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미리 모세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면 미리 계획해 놓은 것으로 하나님이 일으킨 이적임에 틀림없다. 논리적으로 아예 성립도 안 되는 비난일 뿐이다. 본문은 물론 앞으로 8번 더 일어날 재앙 모두가 요술사의 눈속임이나 자연재앙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 한다.
성경을 모르면 신자가 아니다.
성경의 기록을 정확히 분석해서 읽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임을 밝히려 했던 프랭크 모리슨은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라는 책을 저술했다. 하나님이 돌을 옮겼고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법률전문기자로 안티 크리스천이었던 리 스트로벨이 아내가 교회에 출석한 이후로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사람들에게 인자와 사랑을 많이 베푸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아내를 그렇게 변화시킨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성경을 탐구하다가 오히려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다. 최근 그분의 실화가 the case for Jesus 라고 영화화 되기도 했다. 이런 간증은 너무나 많고 그 중에 감히 저도 포함시킬 수 있다.
“물이 어떻게 피로 변해?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게 말이 돼? 거기다 아무 선행도 하지 않고 그 사람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웃기는 이야기 그만해!”라고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공격한다.
어떤 사안을 비평하려면 그 사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본 후라야 유효한 법인데도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고 반발만 한다. 정말로 구체적으로 예수를 비평하려고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지하게 읽으면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 말씀의 생명력 앞에 항복하게 된다. 간혹 끝까지 거역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음에서 선 이해, 편견, 선입관 등을 버려서 중립 상태로 만들지 않았거나 성경을 정확하게 읽지 않은 탓이다.
이는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모르면 그 믿음이 굳건한 바탕 위에 설 수 없다. 성경기록이 역사적 진실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거짓말은 잠시 재미있고 심지어 동화 소설 등이 그러하듯이 감동까지 줄 수 있다. 그러나 거짓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한 사람 전체를 절대 변화시키지 못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밝혀놓았다. 인생을 충분히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경을 통해 누릴 수 있다. 성경을 모르면 신자가 아닌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도 전혀 없다.
출애굽에 대한 몇 가지 의구심
출애굽의 열 재앙 전부를 자세히 살펴보다간 이 강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기독교 외부에서 출애굽에 대한 공격에 신자들마저 의구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몇 가지 측면만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출애굽이 정말로 역사적 사실인지 의심하는데 이에 대해선 이미 다뤘다.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거주했고 가나안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그 땅을 차지했다는 것은 세속역사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자력으로 노예반란을 일으키든지 주변 강대국이 도와주는 두 가지 길뿐인데 둘 다 전혀 불가능했다. 그럼 초자연적인 간섭이 있었다는 결론 외에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정말로 재앙이 열 번이나 일어났는지, 그렇게 엄청난 재앙을 열 번이나 당하고도 어떻게 바로가 항복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그럼 정말로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바꿨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바로와 애굽은 억울하게 하나님의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는지 등등이다. 이에 대해서도 성경을 앞뒤로 잘 살피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한국 사람은 중고등학교에서 입시에 대비한 단편적 지식의 암기식 교육에 익숙해서 성경공부도 그렇게 접근하는 습성이 남아 있다. 예컨대 열 가지 재앙의 종류와 순서를 외우면 성경을 아주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한다.
성경은 종교적 지식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당신의 뜻을 계시해 놓은 책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대일로 이야기하듯이 말씀하신다.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 그분을, 특별히 그분의 능력보다 성품을 알아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성경 66권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성경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출애굽 사건에서도 하나님이 이적을 베푸는 모습, 특별히 한 이적에서 다음 이적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또 그것을 바울과 술객들의 반응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요컨대 열 가지 재앙 전체를 일관되게 연결해서 분석하며 읽어야 한다.
차츰 약해지는 바로와 술사의 반응
하수를 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첫째 재앙을 애굽 술객도 흉내를 내었다.(22절) 그러나 마실 물을 땅을 파서 구함으로써 연명할 수 있었다.(24절) 그리고 7일 후에 모세가 바로를 다시 만나 둘째 재앙을 예고했다. 무슨 뜻인가? 그 7일 안에 혹은 최장 7일 만에 하나님이 피를 다시 물로 바꿔주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죽일 수 있는데도 그들의 숨통을 튀어주었다. 어서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더 큰 재앙으로 당신께서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증명해보이겠다는 뜻이었다.
둘째 재앙은 개구리가 애굽 온 땅에 범람하는 것이었다. 애굽 술사들도 동일한 이적을 보였다.(출8:7) 소매 자락에 숨긴 개구리를 땅에 쏟아놓을 수 있고 사탄이 그들을 통해 뭔가 요술을 부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왕궁의 침실과 음식 그릇에까지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8:8) 바로로선 잠도 못 잘 형편이 되자 개구리를 없애주면 너희를 내보내겠다고, 말하자면 협상하자고 청했다.(8:8) 모세는 언제 끊어지게 할까 물었고(8:9) 바로는 당장 내일까지 없애달라고 협상이 아니라 사정했다.
나일 강의 수위가 가장 낮아지는 12월 중순 경에는 개구리가 대거 육지로 올라온다고 한다. 만약 그런 자연 현상이었다면 모세가 날짜를 정해서 끊어지게 할 수는 없다. 또 한꺼번에 모두 죽여서 땅에 악취가 나게 하지도 못한다. 다시 바로가 숨이 통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스스로 강퍅해졌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집어넣었던 것이 아니다.(8:15)
셋째 재앙은 티끌로 이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술객들이 흉내도 도무지 흉내 내지 못하겠다고 실토했다. 이는 사람과 생축에 있는 것인데(8:18) 즉, 티끌을 불어서 모든 생축과 사람에게 붙게 한 후에 이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도무지 없다고 시인한 것이다.(8:19) 눈속임의 한계를 자인한 것이다. 지금껏 행한 것도 모두 사기였음을 인정한 셈이다. 또 사탄에게 아무리 신탁의 간구를 했어도 묵묵부답이었다는 뜻이다.
급기야 술객들이 이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고백했다.(8:19) 이는 대단한 일이다. 바로에게서 그런 이적도 못한다고 야단을 맞거나 술사 신분이 박탈당하고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시인했다.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히브리인의 신에게 어쨌든 힘으로 졌다고 항복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혼자서 더욱 강퍅해졌다.
넷째는 파리 떼 재앙 이후로는 술사들이 흉내를 내려 시도했다는 기록 자체가 사라졌다. 술사들과 바로의 반응도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넷째 재앙 때에 바로가 출애굽을 허락하면서 광야로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너희가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8:28) 그러나 숨통이 트이자 다시 번복해서 완약해졌다.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케 했는가?
여섯째 독종 재앙이 끝났을 때 비로소 여호와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진술이 등장한다.(9:12) 유대인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바로의 배후에도 여호와가 있었다는 뜻일 뿐이다. 바로의 마음이 약해져서 여호와께 항복할 마음이 조금 생겼는데 하나님이 일부러 악한 생각을 먹게 만든 것이 아니다.
9장 11절과 12절 사이에 사전 설명이 없이 대뜸 그런 표현이 등장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 전과 동일한 일이 반복되었기에 구태여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생각을 바꿨다는 기록이 생략된 것이다.
전 국가적인 재앙을 여섯 번이나 겪고도 심경의 변화가 없고 더 고집만 피우는 데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이며 완벽한 주권이 작용했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버려두었다. 그럼에도 결국은 열 번째 장자의 죽음까지 당신의 계획과 일정에 하나 차질 없이 진행되게끔 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도 연결시켰다. 바로는 자기 뜻대로 다 했기에 억울할 것도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것도 단 하나 없다.
일곱 번째 재앙 우박이 내일 때에는 모세의 경고를 그대로 믿고 미리 피신하는 신하들도 나왔다.(9:20) 바로도 내가 여호와께 범죄 했으며 여호와는 의롭고 나와 내 백성이 악하다고 고백했다.(9:27)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 때는 바로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고 죽음이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비는 형국까지 되었다.(10:17)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그 결론이 무엇인가? 거짓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허점이 발각된다. 특별히 이런 초자연적 기적 이야기를 꾸며내면 누가 읽어도 동화 판타지인줄 안다. 지금 하나님은 자연재앙과 동일한 양상의 기적만 일으켰다. 욥에게 백 개가량의 자연계에 관한 질문을 던졌으나 당대의 현자인 욥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시 애굽의 과학이 상당히 발달했어도 그 아홉 자연 재앙의 원인과 과정을 절대 알 수 없다. 현대의 동식물, 기상, 천문 과학자들을 총동원해도 열 재앙을 성경처럼 이야기로 절대 꾸며내지 못한다.
기적의 외적 모습은 애굽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자연 재앙처럼 보였으나 내용적으로는 간단히 살펴본 대로 평소의 자연 현상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 있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성격도 전혀 아니었다. 하나님의 권능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당시 가장 완악한 바로와 애굽의 술사들도 어쨌든 차원이 다른 신이라고 인정했지 않는가? 불신자의 눈에는 가장 동화 같이 보이는 출애굽이 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기록이다. 거짓이 아니다. 또 일어난 사실 그대로 기록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바로도 당장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권능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숨통이 트이자 바로 번복하고 끝까지 버틴 데는 그 모두가 자연재앙일 뿐이라고 스스로 평가절하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더듬어서라도 즉, 조금만 합리적으로 따져 봐도 당신을 쉽게 찾게 하려고 일반 자연재앙의 모습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당신께 진심으로 순복하길 원하셨던 것이다.
결국 바로가 언제 이스라엘을 내보내는가? 아홉 번의 자연 재앙으로도 성경기록 상으로는 애굽의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또 먹고 마실 것도 죽지 않을 만큼 하나님이 남겨 두셨다. 그러다 열 번째는 애굽의 장자(長子)들이 다 죽었다. 장자란 전 백성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다음에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경고다. 바로로선 자기가 죽을 차례가 되니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예수 십자가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언제 심경이 흔들리는가? 죽기 직전이다. 신자에게 이런 나도 하나님이 용납해주실까 물어보고 또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완악하게 버틴 또 다른 이유
바로가 완악하게 버틴 첫째 이유는 공짜 노동력을 놓치기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는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았고 본인도 그렇게 믿었다. 미이라로 만드는 것은 영원불사의 존재임을 과시하려는 뜻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술사들이 신령한 일을 일으키고 국민들도 열광한다. 술사들부터 아부하려고 바로를 신이라 칭해 숭배한다. 바로도 처음에는 그런 양 착각하다가 착각이 계속되면 착각이 확신으로 굳어진다. 대대로 바로 숭배는 애굽의 종교가 되었고 바로 또한 애굽 최고의 신으로 숭배 받는다.
바꿔 말해 아담의 원죄 이후에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고 자기를 최고로 높이는 죄의 본성이 바로에게서 최고로 강해졌다는 것이다. 또 그 본성으로 인해 참 하나님을 만나면 오히려 더 거역하려 들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바로가 스스로 강퍅하게 되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집트 기자 지구에 현대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이 노예 살이 하기 전부터 이미 세워져 있었다. 오늘날 역사, 고고, 건축 학자들이 그 비밀을 다 파헤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인간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비록 전문가들을 동원했어도 어쨌든 바로의 총괄지휘 아래 건축된 것이다.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 받을 만도 하다.
피라미드의 건축 동기 중의 하나를 성경의 출애굽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은 사막에 자주 부는 거대한 모래 폭풍이다. 사방 천지가 캄캄해지고 어지간한 건물은 모래에 파묻혀 버린다. 그러나 피라미드만은 아무 손상 없이 그대로 서있었을 것이다. 아홉 번째 마지막 재앙이 모래 폭풍이라면 애굽 사람들이 가장 겁내는 자연재앙인데 그것을 이겨내고 바로가 건축한 피라미드가 건재했다.
모세 같이 80 넘은 노인이 남루한 차림으로 일으키는 기적에 항복하는 것은 바로의 자존심이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역사상 최고로 교만한 바로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 신들을 거느리고 있기에 원죄로도 최고로 악했다. 자신이 신이라는 종교적 망상까지 보태졌다.
바로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신과 방불한 권력을 휘둘렀다. 애굽 전 국민이 그의 말 한마디로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바로는 바로대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말할 수 있는 “내다. 내라니까”라며 정말로 신의 행세를 했다.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흙이 들어가도 자기 패배를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정말로 치료 불가능한 극도의 자아도취증에 걸려 있었다.
인간 바로라면 몰라도 신인 바로, 그것도 애굽 최고의 신이 히브리 신에게 항복할 수는 절대 없었다. 그래서 열 재앙 후에 이스라엘을 내보내는 척하다가 또 다시 군대를 홍해까지 따라가게 한 것이다. 바로가 스스로 신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을 놓치면 출애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로보다 더 완악한 신자들
지금 바로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에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거역했는가? 열 번인가? 바로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기적을 누렸음에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많이 거역했다. 출애굽 후 예수님 오시기까지 1500년간 쉴 새 없이 그랬다.
아니 예수를 믿은 오늘날의 신자는 또 어떠한가? 간단한 예로 매주일 예배에서 대표 기도하는 단골 문구가 무엇인가?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를 용서해주세요”이지 않는가? 일 년이 52주면 바로보다 더 완악한 것 아닌가?
사실은 저부터 그랬다. 저를 전도하려 했던 사람이 열 명은 넘었다. 저를 알지 못하면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은 더 많았다. 둘째 아들이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재롱잔치 한다고 해서 그때만은 어쩔 수 없이 교회를 갔다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 중도에 뛰쳐나왔다.
전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하나님이 있다면 내 눈 앞에 보여 봐라. 그럼 믿겠다.”고 큰 소리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벼락 맞아 죽지 않는 것이 너무나 큰 다행이자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 믿고 목사가 된 후에도 여전히 대표기도에서 지난주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문구에 가장 크게 아멘 한다.
인간 세상에선 3번만 용서하며 기다려줘도 최고 의인으로 칭송 받는다. 모든 사람이 원죄 하에 있다. 시쳇말로 자기가 최고라는 ‘자뻑’ 증상에 취해 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용서 인내해주는 일을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렵고 못한다. 하나님은 지금 열 번을 참아주셨다. 마지막에는 어차피 말로 해선 안 들을 테니 당분간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히브리인들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애굽의 장자를 치신 것이다.
열 번의 재앙이란 숫자적으로 완전히 찼다는 의미다. 더 이상 채울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다. 열 번 아니라 백 번을 거역해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전에 모든 거역한 일들을 다 잊으시고 기억조차 않는다. 그 회개가 마치 첫 번인 양 그 한 번의 회개로 구원해주시고 하늘에서 큰 잔치가 열린다.
계속해서 골치만 썩이고 거의 포기하다 시피해서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어떤 모습이라도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망나니 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아들이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사람 구실을 하는 것만큼 부모에게 더 큰 기쁨은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바로 그런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그분의 기쁨의 크기가 여전할까?
하나님은 출애굽기가 비과학적이고 꾸며낸 이야기 같아 못 믿겠다는 사람들까지도 제발 성경을 온전히 읽어서 구원으로 인도하길 소원하신다. 기독교 신자를 만들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당신의 권능과 사랑으로 그 인생을 풍성하게 바꿔주려 하시고 그분이 그 일을 더 원하신다. 허망하고 갈급한 인생을 끝내주신다.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 믿으면 장담하건대 그 인생이 반드시 뒤집어진다.
그래서 매주 지치고 고달픈 모습으로 우리가 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영성으로 지난주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판에 박힌 기도를 반복해도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하나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신다. 로마서 6:1절이 어떻게 말하는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에 다함이 없고 너무나 풍성하다. 그분의 권능은 오묘하고 완벽하시다. 불신자라면 하나님께로 돌아옴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 인생이 풍부해진다. 신자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인생이 성숙해진다. 예수를 닮아가며 모세처럼 하나님의 큰일까지 할 수 있게 된다.
7/9/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