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
출애굽기 강해 (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출11:1-8)
열 번째 재앙의 특성
하나님은 아홉 번이나 큰 재앙을 내렸으나 바로가 완악하게 버티자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열 번째는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初胎生)까지 모두 죽는 엄청난 벌이다. 가축이라고 하지만 7절에서 다시 짐승과 개라고 풀어 설명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유용한 가축과 말이나 낙타 외에 애완용과 우상숭배에서 신성시 되는 동물들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애굽의 가정 경제 국방 종교 등등 모둔 분야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는 선언이다.
이 열 번째 재앙은 그전의 아홉 번의 재앙과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들이 훨씬 많다. 같은 점은 우선 재앙의 종류를 미리 경고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계획하시고 징벌의 전 과정을 주관하셨다는 뜻이다. 또 무엇보다도 애굽만 피해를 입었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전혀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구별하는 하나님임을 입증했는데 본문 7절에서 다시 그 점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아홉 번의 자연재앙에선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숨통을 틔어주었다. 인명에는 직접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바로의 여러 번 번복이 가능케 했다. 다른 점의 첫째는 이번에는 바로와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혹시 자녀가 없는 집에는 애완동물까지 죽었다. 단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모두 초상집이 되었다. 그러니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6절)
둘째는 지금까지는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징벌했지만 이번에는 밤중에 내가 애굽에 들어가겠다고 하셨듯이(4절) 하나님이 직접 심판의 칼을 휘둘렀다. 셋째로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고 나오면서 심하게 노했다.(8절)
가뜩이나 성질이 급한 모세가 그 동안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 모세는 팔십 년의 연단 기간을 거쳤고 하나님과 떨기나무 불꽃으로 대면하여 다섯 번의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확립했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자기 맡은 일에 묵묵히 충성했고 그 결과는 하나님에게 맡겼던 것이다.
열이라는 숫자는 꽉 찬 충만한 의미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찬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을 때에 당신께서 직접 심판하겠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절감했다. 또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심정이 모세에게 그대로 심어진 것이다.
넷째는 모세가 바로의 면전에서 분노를 했음에도 바로가 꼼짝 못하고 당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세를 아주 위대하게 보았기 때문이다.(3절) 첫 대면 때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멸시했다. 왕 체면에 점잖게 말한 것이지 그 뜻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이름이냐?”는 정도다. 지금 천하의 패권을 쥐고서 스스로 신이라 자부하는 바로다. 노예 종족이자 팔십이 넘은 노인이 화를 내는데도 평소 같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감인데 찍소리도 못했다.
다섯째로 은금 패물을 챙겨 나왔다. 바로와 애굽이 단순히 출애굽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돈까지 줘가며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한 것이다. 다음번에는 모두가 죽을 판인데 은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히브리인들을 더 잡아두었다간 아예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질(map-out) 게 빤하다. 물론 애굽인들이 자진해서 은금을 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먼저 요구했는데도(2절) 전혀 거절 못한 것이다. 그만큼 죽음이 바로 문턱 앞에 다다른 것을 애굽인들은 실감했던 것이다.
여섯째는 애굽의 모든 신하들이 모세에게 절하며 출애굽을 정중하게 요청할 지경까지 되었다.(8절) 바로의 신하들은 사실 셋째 이 재앙 때부터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했다. 일곱 번째 우박 재앙 때는 모세의 경고를 듣고 미리 대피한 자들도 있었다. 바로 혼자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뿐 애굽의 전 국민이 여호와가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믿는 것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히브리인들의 신이 최고로 강력해 자기들 신들과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고 시인한 것이다. 무엇보다 거역했다가 큰일 나겠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했다.
너무나 일방적이고 통쾌한 승리
틀림없이 바로마저 모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살리든지 죽이든지 처분에 맡기겠다는 단계까지 된 것이다. 이는 완벽하고 일방적인 승리다. 이스라엘로선 통쾌하기 짝이 없고 애굽으로선 이런 비참하고 창피한 패배는 그들 역사에 없다. 성경 전체, 아니 인류 역사를 통 털어 이런 승전기록은 없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승리다.
그렇다고 아홉 번의 전초전 내지 힘겨루기 끝에 열 번째서야 비로소 완전한 승리를 했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처음부터 아예 게임이 안 되는 승부였다. 비유를 하자면 바둑 프로 9단이 이제 갓 바둑의 규칙만 배운 초보자와 시합을 하는 꼴이다. 프로 선수는 전술을 구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두어도 전멸시킬 수 있다.
바둑 용어로 호랑이 아가리를 뜻하는 ‘호구’(虎口)가 있다. 돌을 놓기만 하면 따먹히는 곳이다. 초보자는 잘 모르고 그곳에 놓으면 뭔가 좋은 수가 되는 것 같아서 호구에 자꾸 돌을 놓는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에게 아홉 번이나 호구에 들어오면 죽는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바로는 프로 9단 격인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니까 호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다. 그러다 열 번째는 시간제한이 걸리고 어차피 승패는 내어야 하니까 이미 다 죽어있는 대마(大馬)에 가일수 한 것이다.
승패는 시합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초보인 바로는 앞뒤 사정을 제대로 분별도 못하고 나름대로 아등바등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프로 9단에게 시합을 하자고 감히 맞선 용기와 담력을 가상히 여겨줄 여지는 전혀 없다.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너무나 우매한 자살행위였을 뿐이다.
출애굽을 이스라엘과 애굽, 모세와 바로, 여호와와 애굽의 우상 신들의 대결이라고 이해한다면 신앙상의 큰 오류다. 아직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그분을 완악하게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지, 반면에 하나님의 인자가 얼마나 풍성하고 끝이 없는지 대조하는 것이 그 첫째 의미다.
문제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이 너무 일방적으로 당해서 조금 불쌍해 보인다. 마지막에 꼭 모든 장자를 죽였어야 하는지? 잘못을 따지자면 바로의 잘못이지 그 장남이 무슨 죄가 있는가 싶다. 처음부터, 아니면 지금 열 번째라도 신하들 몇 명만 본보기로 벼락을 내려 죽이면 큰 희생 없이 일찍 끝낼 수 있었지 않겠는가?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가 훨씬 돋보이지 않는가?
절대로 본때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본때를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전혀 합당하지 않다. 민수기 16장에 고라당의 반역 때에 땅이 입을 벌려 250명을 삼켰지만 본때 보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직접 참가한 자들이다. 그때에 모세 즉,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여 염병으로 죽은 14,700명 중에도 죄가 없이 억울하게 죽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애굽 백성 전부가 우상숭배를 했다. 인간 바로를 신이라고 추앙했다. 히브리 노예를 차별 학대하며 자기들만 호의호식했다. 하나님은 벌을 주어야 할 자는 반드시 벌을 주신다. 또 상을 주어야 할 자는 반드시 상을 주신다.
본때를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서 신속하게 항복하고 두려워서 믿는 척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고 진정한 믿음의 경배가 성립되지 않는다. 몇 사람을 본때 보이는 것이야말로 차별하는 것이다.
장자만 죽인 데는 아주 중요한 영적 진리가 있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 도덕적 우열이 있는데 장자만 죽였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모든 장남이 더 악하다는 법은 없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고 그야말로 장남만 차별하는 하나님이 된다. 당신의 성품과도 상충된다.
따라서 장자만 죽였다는 것은 애굽 전 국민을 대표해서 죽은 것이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모두의 도덕적 점수가 빵점이라는 의미다. 그래야 차별하지 않는 공평한 하나님이다. 누구만 특별히 죽어야 할 더 악한 자는 없다. 또 누구만 특별히 살려주어야 할 더 선한 자도 없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이 열 번째에야 처음으로 인간의 목숨에 직접 손을 대었다. 당신의 긍휼의 끝이다. 바로와 애굽 사람처럼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했다. 또 이 열 번 째 재앙과 동시에 출애굽이 이뤄졌다.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의 인내의 결실이 맺어져 구원이 실현되었다. 그들에겐 이전과 다른 새롭고도 더 풍성한 그분의 긍휼이 시작되었다.
애굽이 열 번이나 일방적으로 당해서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적 정에 불과하다.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공평과 인자를 모르는 영적 무지다. 하나님이 열 번이나 참고 기다려주는 동안에 당신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더 큰 학대를 받았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재앙을 겪을수록 그 화풀이로 애꿎게 히브리인들에 대한 채찍질만 더 악랄해졌을 것 아닌가?
생명은 보존해주시는 뜻
출애굽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아홉 번의 자연 재앙 중에도 하나님이 바로와 애굽의 생명은 보존해준 이유다. 종교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선 고대인들은 필연적으로 자연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 해 열심히 농사해 놓은 것이 한 번의 자연 재앙으로 물거품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파리 목숨처럼 사라진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이 자연에 있음을 인정한다. 강, 바다, 산, 천둥, 번개 심지어 메뚜기 파리 떼에도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 자체가 신이거나 그 배경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사무엘상 6장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블레셋에 탈취 당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독종이 생기게 했다. 언약궤를 돌려주며 독종을 없애려고 금으로 쥐의 형상 다섯 개를 만들었다. 독종을 쥐가 옮긴다는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쥐가 큰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자연의 큰 형상이나 현상을 직간접으로 신으로 받들어서 최고 최대의 치성을 받쳤다. 제발 재앙만은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간구했다. 오늘날에도 냉수 한 사발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올 한해 우리 집에 나쁜 일만 제발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하는 것과 똑 같다.
하나님은 아홉 번의 자연 재앙을 일일이 미리 예고했다. 생명에는 손을 대지 않고 큰 피해가 생기기 직전에 멈춰서 숨을 쉴 수 있게끔 일정을 조정했다. 아홉 번 재앙 전부를 다 모세의 말 한마디로 그랬다. 무슨 뜻인가? 아홉 번의 재앙 각각에 따로 신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여호와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는데 말씀만으로 그 전부를 주관했다. 심지어 애굽인들이 회개도 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거역할 것을 알고도 그랬다. 천하 만물을 사랑과 공평으로 다스리는 통치자가 과연 누구이냐는 질문을 아홉 번이나 제기한 것이다. 너희 스스로 그 엄청난 위력 때문에 신으로 모시고 경배했지만 그 모든 신들 위의 신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따져보라. 너희 신들의 통치를 정말로 받고 있느냐? 비나이다, 비나이다 간절히 기도한 제목들이 실제로 응답 받은 적이 있느냐? 대신에 너희 스스로 위로 받으려고 신들을 만들고 경배한다고 핑계 대는 것 아니냐? 무엇보다 그 핑계로 우상신들 제단 앞에서 온갖 음란한 행위를 더 즐기고 있는 것 아니냐? 그 모든 잘못을 열 번이라도 참고 용서해줄 테니 제발 돌아오라.” 하나님의 애굽인들에 대한 사랑의 프로포즈이다.
그런데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회개했는가? 아니다. 갈수록 더 패역했고 홍해까지 쫓아왔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딱 하나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자기에게 목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이야 죽던 말든 상관 않는다. 바로가 열 번이나 버틴 첫째 이유도 백성들만 피해를 입었고 자기는 개구리가 침상에 올라온 것 말고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이 왕이라는 입장을 배려해준 것이었다. 단순히 체면을 살려준 것이 아니다. 왕이 진정으로 항복해야 백성들도 진심으로 항복할 것이다. 바로는 전 애굽을 대표하는 자였다. 그런데도 끝까지 거역했고 하나님도 끝까지 참아주었다.
바로는 겨우 규칙만 아는 바둑 초급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전혀 몰랐다. 프로가 바둑 초급자를 무참히 이겨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절망에 빠트리고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게 하면 프로답지 못하다. 그럴수록 그 초급자가 자라도록 알아듣게 가르쳐 실력을 성장시켜야 하지 않는가?
열 번째 죽음의 근본적인 뜻.
하나님의 9번 재앙에 애굽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얼마든지 수 천, 수 만 명을 죽일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이른 비, 늦은 비를 때에 따라 내려주시며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고센 땅보다 더 풍성히 허락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인간 육체의 생명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인간에게도 중요한 과제가 전혀 아니다. 어차피 인생은 모두 죽게 마련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동식물에게도 해당되는 복으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80년이고 하루살이는 24시간이지만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수명의 차이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오히려 오래 살아봐야 헛되고 헛된 고생만 더 할 뿐이다.
하나님은 아홉 번이나 재앙을 내리는 동안 죽음의 벌을 내리지 않았다. 언제든 생명은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체적 생명으로 신자와 불신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선 인간을 동식물의 수준으로 절대 판단하지 않는다. 짐승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살고 죽음으로 인간을 위협 조종하는 것은 당신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당신의 성품에도 거슬린다. 그 또한 일종의 본때를 보이는 것으로 독재다. 불신자들마저 천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천하의 흉악범인데도 활개치고 다니며 더 형통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짐승이라고 스스로 증명하고 다니는 꼴일 뿐이다.
신자들도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 받는가 의심 불만을 가지는데 하나님을 잘 모르는 탓이다. 본때를 보여 달라는 요구이다. 나는 그들보다 의롭다는 교만이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직도 체험적으로 완전히 고백하지 않은 셈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에 코에 당신의 생기를 직접 불어 넣었다. 영적인 생명을 지니게 했다. 다른 어떤 피조물과는 다르게 만드셨다. 이 땅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으로 절대 기쁨 만족 행복을 못 느끼도록 구조적으로 제한을 두셨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동물은 본능을 소프트웨어로 깔아주었지만 인간은 영혼이라는 중앙전산장치(CPU)를 심어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교제를 하지 않아 그분이 날마다 주시는 생기를 공급 받지 못하면 활기와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의미와 가치 있는 인생을 절대 살 수 없다. 아무리 가진 재물, 권력, 명예가 많아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 결말은 허망하고 갈급해진다. 그들이 선하고 업적도 크게 쌓을 수 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최고의 노력을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구조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소망을 두는 것은 고달픈 인생길을 당신과 함께 걸어가자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 하는 인생에는 그분 쪽에서 먼저 풍성하게 의미와 가치를 부어주신다. 단 한 가지만 요구하신다. 그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진심으로 겸손히 엎드려 나는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 말이다.
인간이 짓는 가장 큰 죄
이런 맥락에서 열 번째 재앙이 그 앞 아홉 번 재앙과 가장 크게 다른 요소가 두 가지 더 있다. 먼저 하나님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정녕’ 내보낼 것이라고 보장했다.(1절) 선악과 금령에서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언약에서, 형을 피해 도주하는 야곱에게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등 중요한 약속마다 강조해온 수식어이다. 당신의 약속을 단 한 치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당신께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개도 움직이지 않게 하신다고 했다.(7절)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개는 주위에 아주 작은 움직임은 물론 냄새의 변화도 제일 먼저 탐지하는 동물로 집을 지키기에 최적이다. 그런 개가 소리도 내지 않고 혀도 움직이지 않는다. 주위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뜻이다.
고센 땅에는 어떤 불안과 소요도 없이 오직 평강뿐이다. 육체적 생명이 고달프든 안락하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는 초상집이 아닌 집이 단 하나도 없다. 눈물의 바다에 떠내려 갈 판이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애굽 관원의 가혹한 매질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은혜에는 전혀 손상을 받지 않았다. 이제 곧 출애굽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실현될 소망을 키우고 잠잠히 하나님 하시는 일을 기다리는 가운데 고요와 평화가 넘쳤다.
그럼 인간이 짓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 밖에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영적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육체적 생명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 중에 도덕적 의인도 많다. 남들에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자라고 칭찬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거역한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피조물 중에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는데도 지금 열째 재앙에서 함께 죽은 생축과 같은 수준으로 자기를 스스로 비하시킨 것이다.
출애굽 때나, 가나안 정복 때에 왜 애꿎게 동물까지 다 죽이는지 의아해 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 아닌가라는 비난도 받는다. 인간 때문에 동물이 인간과 함께 죽은 것이 아니다. 인간들 스스로 완전히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바로 그 점을 깨달으라고 생축을 함께 죽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함께 죽은 것이다.
아들 중에 갱 짓을 하다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평생 부모의 속을 썩이는 자가 있다. 그럼에도 항상 부모에게 너무나 죄송하고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온다. 반면에 부모가 너무 가난해서 자기에게 보태준 것 하나 없고 오히려 장애가 되었기에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절연하고 크게 성공한 자식이 있다. 둘 중에 누구를 부모가 더 사랑하겠는가?
당연히 부모로 인정조차 안 하는 아들은 자식도 아니다. 부모에겐 공부 잘하고 출세하든,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감옥에 가있든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부자관계를 절연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부모는 죽을 때까지, 그 육체적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안타깝게 기다린다. 그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다 부모와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채 자식이 먼저 죽을 수 있다. 얼마나 부모 마음이 쓰라리겠는가? 그러나 더 이상 방도가 없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이 끝내 당신을 거역하고 죽으면 하나님의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구원의 기회는 없다.
신자가 행하는 가장 큰 선은?
그럼 인간이 행하는 가정 선한 일은 무엇인가? 반대로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기쁨, 만족, 안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분에게만 인생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영적 생명의 충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매일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공급 받는 것이다.
이 땅에서 육체적 생명이, 그 겉 사람이 후패하든 풍부하든 상관없이 그 영혼에 ‘정녕’ 철저하고도 완벽한 구원을 주신다. 개의 혀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그 주변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친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의미와 가치를 채워주어서 고귀한 인생으로 세우신다.
애굽에 내려진 아홉 번의 재앙과 열 번째 심판과 다른 점을 간단하게만 살펴봐도 여덟 개나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심판과 구원을 그만큼 공평하고도 완벽하며 철저하게 나누신다는 것이다. 아홉 번까지 참더라도 마지막 심판 내지 구원의 순간에는 어떤 부족도 하자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나누신다.
인간이 행하는 최고 악한 죄와 선을 말했다. 불신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럼 구원을 받고 난 후의 신자가 범하는 최고의 잘못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신자가 되어서도 불신자 시절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프로 구단인 것을 자꾸만 잊고 바로처럼 호구에 머리를 밀어 넣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여건에만 정신이 집중되어서 하나님이 개도 짖지 않게 해주시는 완벽한 섭리는 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다.
신자가 행하는 인생의 어떤 싸움도 하나님이 이미 승리를 확보해 두었음을 모르거나 잊고서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저 불안해하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확신은커녕 평강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을 모독하는 짓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모독 받는 것은 사실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나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며 하나님을 모욕했지만 하나님은 열 번이나 기회를 주었다. 세상에서 의인으로 칭찬 받는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관대라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럼에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앞에 진심으로 엎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의 영적 생명을 나눠주었다. 오직 한 가지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정녕 지키기 위해서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된 후에 할 수 있는 가장 선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7/30/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