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과 불기둥은 은혜도 아니다.
출애굽기 강해 (29)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13:17-22)
요셉의 유골을 취하는 모세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여호와”일 것이다. 당신의 백성에 하신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려는 뜻이다.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올 때가 다르다”고 흔히 말하듯이 사람들은 급할 때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그러다 그 받은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당장 눈앞의 고난만 불평하는 너무나 치사한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2, 13장에서 유월절 제사를 몇 번 씩이나 강조하시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없이는 출애굽은 불가능했다. 나아가 사백 년의 노예 살이 자체가 외적의 방해 일절 없이 이스라엘을 창성케 하려는 하나님만의 숨겨진 은혜였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래서 첫째로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 감사하며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현재의 숨겨진 은혜를 찾아내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미래에는 당연히 더욱 은혜가 넘치도록 임할 것을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실력이 믿음이다.
성경을 읽는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를, 특별히 숨겨진 보석 같은 하나님만의 섭리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본문에도 그런 은혜는 풍성히 있다. 낮에 구름 기둥으로 밤에 불 기둥으로 보호 인도한 것인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은혜라고 강조했다.
먼저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가져가게 된 것이다.(19절) 창세기의 결론 부분(창50:22-26)에 요셉이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자기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유언했다. 지금 그대로 준행했기에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가? 히브리들의 선조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왕이면 12 선조의 유골도 함께 갖고 가야만 했는가? 왜 꼭 요셉의 유골만 챙겼는가? 요셉이 야곱 가문을 기근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큰일을 수행한 핵심적인 인물 중심으로 기록한 탓이기도 하지만, 요셉의 유골을 애굽 땅에 남겨두지 말고 반드시 들고 나가야할 몇 가지 이유 즉,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 해답은 창세기의 마지막 구절인 50:26에 나온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몸에 향 재료를 넣어 입관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방부제로 처리하여 미이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셉을 극진히 대접하여 애굽의 바로나 왕족과 동일한 장례 절차를 거쳤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유골을 갖고 가라고 한 것이다. 단순히 고향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선조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원이 아니었다. 자기는 비록 애굽의 총리였지만 애굽인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은 그분의 백성임을 고백한 것이다.
도굴 된 바로의 무덤
요셉을 총리로 세울 때의 바로는 그를 애굽인으로 귀화시키려 노력했다. 먼저 그의 이름을 ‘사보밧네아’라고 애굽식으로 지어주었다.(창41:45) 기근에서 구해주었다고 “세상의 구원자”라는 의미와, 꿈을 잘 해몽했다고 “비밀의 계시자”라는 두 가지 뜻이었다. 또 애굽의 대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시켰다.(창41:50) 요셉을 완전히 애굽인 취급을 했다.
고대 왕들은 자기 무덤에 왕비나 충신을 나중에라도 함께 묻는 관습이 있었다. 어쩌면 요셉을 총리로 세운 바로와 같은 무덤 피라미드에 묻혔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고대인들은 무덤을 신성시했다. 바로의 무덤이 아니었다 해도 자기들 고관대작의 무덤이 일종의 도굴이(?) 되는데도 애굽인들 모두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했다.
지금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거꾸로 고대 애굽의 유물을 아주 많이 탈취해 놓았다. 밤중에 그 유물을 훔쳐 가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시신도 아닌 돌덩이에 불과한데도 그러한데 이와 비교하면 지금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또 모세가 야곱의 해골을 취했다고 선언하고 있다.(19절) 나이 팔십이 넘은 노인 한명에게 세계최강국 애굽이 10전10패하는 치욕을 안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는가? 열 번의 재앙을 일으킨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명예를 그가 죽은 이후에 그것도 사백 년이 지나서라도 회복시켜 주었다. 이스라엘 후손은 물론 애굽 온 천하에 당신의 당신 되심을 분명하게 당신께서 증명해보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으로 택하여 부른 자를 일생토록, 아니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 당신의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당신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
요셉은 현실 여건과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비록 애굽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지만 그가 애굽에 끼친 공로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요셉은 애굽의 이름을 가지고 또 애굽 대제사장의 딸과 결혼하는 일에 묵시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선 누구나 그랬을 것이며 인간적으로 선한 일이자 하나님의 뜻에서도 그러했다.
그의 유언의 뜻은 무엇인가? 내 정신만은 절대로 애굽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 나치가 자기들 육신은 유린하고 마음대로 죽였지만 자기들 영혼은 절대로 그들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죽일 수 없었다고 말이다. 요셉 또한 애굽의 우상에게 자기 영혼이 속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죽은 후 내 해골이라도 이 우상의 땅에 절대로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를 죽은 후에 미이라로 바꾸는 것은 자칭 살아있는 신으로 영생의 상징이었다. 요셉으로선 여호와 외에 신이 있을 수 없었다. 또 인간이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었고 미이라는 영생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로선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이단 사설이요 사탄의 거짓말이었다. 요셉의 유언은 선조 곁에 묻히고 싶다기보다 여호와 하나님 곁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바로잡기
이처럼 요셉의 시신은 애굽에 절대로 남겨둘 수 없었다. 애굽은 요셉에게 큰 배려를 했다. 인간 사회 애굽의 역사기록에 그를 애굽인으로 남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참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역사로 보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역사바로잡기’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계획 안에서 애굽이 이스라엘을 창성시키는 역할을 일부 맡았다. 그러나 자기들 탐욕과 기분 내키는 대로 맘껏 학대하고 유린했다. 이스라엘로부터 너무나 큰 유익을 얻었고 나라가 그렇게 부강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애굽에 너무나 큰 도움을 주었다. 애굽에 신세 진 것이라곤 단 하나 없었다.
바꿔 말해 이스라엘을 풀어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애굽이 반대할 이유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큰 기적을 몇 번 당했으면 곧바로 그 동안 공짜로 수탈한 것만도 감사하면서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열 번이나 거역했으니 얼마나 큰 죄악인가? 하나님이 맡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역할로 인한 일말의 봐줄 여지마저 완전히 다 까먹어버렸다. 장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다 살려준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너무나 큰 자비였다. 애굽이 일방적으로 심판 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애굽의 은금패물을 취하게 한 첫째 이유도 너무나 간단하다. 그 동안 밀린 임금을 일시불로 환급받게 해준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해선 안 된다. 그분에게 이런 능력 발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요셉 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는 일에 쓰임 받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당신의 백성의 명예만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훼손당하는 일은 하나님 쪽에서 반드시 막으신다.
이스라엘이 때로는 쓰러지고 죄에 빠지고 심지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큰 죄를 저질러도 오랜 기간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큰 영적 흐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 스스로 구체적으로 인식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하나님이 출애굽에서 베푼 은혜란 결국 현실의 고난에서 구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에서 구원하여 그분의 예배자로 세운 것이다. 죄로 타락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세상에서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빼내어서 당신의 선을 실천하게 만든다.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 구원이다.
정반대의 두 인생으로 나뉘는 요셉
요셉은 죽어서 애굽 식으로 미이라가 되었다. 살아생전에도 완전히 애굽 사람의 외양이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생명의 상징으로 여긴 머리털을 잘 자르지 않는다. 반면에 애굽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없이 완전히 밀어버린다. 비단 옷을 입고 왕의 홀을 잡고 금수레를 타고 출퇴근을 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요셉은 애굽 사람이요, 애굽 이름을 가졌고, 애굽인 아내를 두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두 아들에겐 히브리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장남은 과거의 쓰라림을 잊는다는 뜻으로 므낫세, 둘째는 하나님이 창성케 해준다는 뜻으로 에브라임으로 명명했다. 자기 인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과 후 둘로 나눠진다고 고백한 것이다. 현실적인 고난과 풍요의 구분이 아니다.
총리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과 계속 씨름했어도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몰랐었다. 어렸을 때 형제들은 물론 부모들도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두 번이나 꿨으나 현실은 그 꿈과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형제들에 의해 광야 구덩이에 빠트려져 죽을 뻔 했고, 애굽의 노예로 팔려 와선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처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 애굽 관원의 꿈을 해몽해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꿈마저 거의 포기했던 그 쓰라림을 절대 잊지 말자는 뜻으로 므낫세로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 그분은 자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그 꿈대로 이끌어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주었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이 자기 가문을 기근에서 건져 큰 구원을 주시려고 자기를 먼저 애굽에 보내어 죽을 고생을 시켰다는 진심어린 고백을 하게 되었다.(창45:7,8) 하나님의 너무나 다르고 큰 뜻에 진정으로 항복하는 의미로 둘째 아들 이름을 에브라임으로 지은 것이다.
요셉은 광야 구덩이에 빠졌을 때 정말로 죽었다고 각오했다. 며칠 만에 굶어 죽을 것이 너무 빤해 살아날 것은 거의 포기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이 없이는 생존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마침 우연의 일치처럼,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따라 그곳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고에 노예로 팔려감으로써 살아났다.
요셉은 바로 그 때에 귀로만 듣던 또 부모의 신앙교육을 통해 배우던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뵌 것이다. 인격적으로 그분과 일대일 대면을 함으로써 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철부지 아이에서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그분의 종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 후로 그는 환경과 사람과 사건이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정반대로 흘러가 곤혹스럽더라도 하나님 그분만은 놓치지 않게 된 것이다. 광야의 구덩이에서 죽다 살아났기에 하나님 그분의 손을 놓는 순간 다시 절망이자 죽음뿐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었다. 주님을 귀로만 듣다가 직접 눈으로 뵙고 성령으로 거듭나 인격적으로 대면한 이후에는 주님이 우리를 창성케 해주는 인생으로 바뀐다. 또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이름을 예컨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람’, 하나님의 은혜로 낳았다고 ‘하은’으로 지어 부른다.
그럼 아이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현재의 고난 가운데 숨겨진 그분의 은혜와 섭리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창성케 해줄 하나님을 소망해야 한다. 최소한 아이들이라도 그들의 창성케 될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큰 소망 가운데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그럼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전쟁과 기업에서 제외된 레위와 아버지 요셉을 대신해서 야곱의 손자임에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는 영광을 얻었듯이 반드시 주님이 그 아이들의 앞날에 큰 영광으로 함께 해주신다.
애굽에게 추격의 신호를 보내는 하나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으라고 하면 열이면 열이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 인도하신 것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하나님은 사백 년 전의 언약을 어김없이 준행하시는 분이다. 지금 의도적으로 블레셋을 보면 두려워할까 광야로 우회시키고 있다. 그런데 보호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예 말이 안 된다.
구름과 불 기둥이 본문에선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좋기만 한 대박 같은 은혜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은금패물을 잔뜩 챙겨서 나왔다. 애굽의 모든 집의 장남이 죽는 날 밤에 황급하게 무교병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탈출했다. 애굽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모든 집이 죽은 장남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 뒤처리까지 하려면 최하 3일에서 일주일은 걸린다.
그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차츰 히브리인들과 그들의 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을 것이다. 애굽인들도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올 때의 심경이 달라지듯이 은금패물이 너무 아까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국의 IMF 때에 집안 장롱에 넣어둔 금붙이만 모아서 극복했다. 다른 재화가 드문 고대에는 빼앗긴 은금패물은 엄청난 역할을 한다. 나라의 국고가 텅텅 비어버린 꼴일 것이다.
고대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사흘 길만 떨어져도 추적 불가능한 거리로 여겨졌다. 이미 일주일 정도 지났으면 추적하기 상당히 힘들다. 물론 이백 만이 넘는 무리가 움직이는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야밤에 광야에 숨어버리면 찾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밤에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이스라엘에겐 밤에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는 광야에서 방한(防寒)의 기능을 해주고 컴컴한 밤길을 밝혀주는 큰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애굽 쪽에서 보면, 불 기둥이 이스라엘 눈에만 보인 것이 아닐 것이므로, 이스라엘이 어디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신호가 된다.
그래서 곧바로 추격이 가능했다. 죽은 장남의 복수를 하고 빼앗긴 은금을 되찾으러 홍해까지 올 수 있었다. 애굽 군대를 누가 인도했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이렇게 역사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할 수 있겠는가?
사백 년 간의 노예 살이가 오히려 이스라엘에 대한 최선의 보호책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80년이 바로의 궁정과 미디안 광야의 전문가로 양성 훈련시키는 그분의 섭리였음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 그분을 모르는 셈이다. 모세는 살인죄라도 범했지만 요셉은 어렸을 때에 멋모르고 꿈을 자랑한 것 말고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린 나이에 죽도록 고생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다.
신자를 세상에 던져버린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세상에 내던져 준다. 정쟁, 질병, 기근 같은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신자라고 절대 비켜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가 자기들의 우상숭배와 부정부패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핍박한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신자는 많은 손해와 상처를 입는다.
당신의 백성을 풍요와 안식으로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룩하게 바뀌어서 거룩하게 자라게 한다. 엄밀히 말해 우리에게는 그럴 정도의 수준이 안 되고 실력도 없다. 하나님 당신만을 붙들게라도 만들려는 것이다. 본문처럼 구름과 불 기둥으로 때로는 더 핍박을 불러오게 만든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 자에게 상처와 고난이 덧나게 하신다.
그 뜻은 하나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인생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자가 그러기만 하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당신께서 증명하신다. 그 일을 오랜 기간에 걸쳐, 평생토록 그분이 이뤄내신다. 심지어 우리는 죽더라도 우리 후손을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삶이 힘들 때 우리도 이전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여 헤아려본다.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다시 힘을 얻는다. 그러나 솔직히 잠시 그 때뿐이다. 곧바로 미래에 대한 염려가 생기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 겉으로 보이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같은 것만 은혜라고 한정지었기 때문이다. 기쁘고 좋은 일이 생겨야 하나님이 역사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난과 문제를 이겨내는 가운데 숨겨진 그분의 은혜를 발견해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은혜를 회상 감사하려 해도 솔직히 몇 개 없다. 현재도 신나는 일이 안 생기면 은혜가 아니라고 여긴다.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과거에 얼마나 풍성히 베풀어졌는지 모른다. 그분께서 우리의 먼 미래를 예비하셔서 계획을 세워 실현하셨으며 지금 실현 중이며 또 아직 실현 되지 않은 일도 많아 너무나 큰 영광으로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이런 분명한 인식이 바로 믿음이다.
이런 인식이 없으니 과거에 그냥 흘러 보내버린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풍성한 영광으로 일생에 함께 하신다. 그분만의 거룩한 계획이 다 마련되어 있다.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했다가 화장실 갈 때와 올 때 다른 모습의 너무나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의 믿음을 수십 년 되풀이 해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우리 중에 숨겨진 그분의 은혜를 온전히 찾아낼 수 있는 영적 분별력 통찰력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없다. 바로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완전한 계시인 성경을 주셨다. 우린 갈 길을 모르지만 요셉의 일생을 배워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묵묵히 그분의 뜻을 기대하며 그분만 놓지 않는 것이다. 신학적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처럼 어쨌든 해골마저 당신의 품 안에 거두어가길 소망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럼 현실이 아무리 우리를 실망시키고 우리 소망과 정반대로 흘러갈지라도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혹시 넘어져도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최소한 느긋하게 기다릴 수는 있다. 혹시 오해해선 안 된다. 그럴 수 있는 것도 우리 믿음이 좋아서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우리의 갈 길을 모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서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그분에 의해 요셉처럼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자라면 그분이 태초부터 택하셨고 또 당신의 완벽한 계획과 일정에 따라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9/10/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