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4 16:1-8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조회 수 158 추천 수 0 2017.11.11 09:50:00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출애굽기 강해 (34)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16:1-8)

 

 

출애굽은 니산월 즉, 이스라엘 종교력의 첫 달 15일에 이뤄졌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최단 거리인 해변 길은 나흘 정도 걸린다. 중도에 강력한 블레셋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하나님은 광야로 우회시켰다. 광야로 우회하면 약 6배 즉, 24일 정도 걸린다.

 

본문의 신 광야에 이른 것이 둘째 달 15일이다.(1절) 한 달이 경과했는데도 가나안 여정의 절반도 진행하지 못했다. 아이, 부녀자, 노약자들까지 동행하는 2백만의 행군이니 더딜 수밖에 없다. 거기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광야로 이끄니 결국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또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했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먹을 것 타령을 했다. 쉬운 말로 바꾸면 고기와 떡을 배터지게 먹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다. 굶어서 죽을 것은 기정사실로 간주한 것이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한국 속담처럼 잘 먹고 죽은 귀신은 얼굴 색깔도 곱다고 말한 셈이다.

 

매일 바비큐 파티를 연 이스라엘

 

그러나 출애굽 당일 밤에 양과 소와 가축을 심히 많이 데리고 나왔다.(출12:38) 성경에서 “심히 많다”고 강조하면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뜻한다. 애굽에게서 은금패물뿐 아니라 가축도 함께 받았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이 그동안 공짜로 노역한 것에 대한 밀린 임금을 일시불로 받게 해준 것이다. 또 고대에선 전쟁에 승리하면 패전국의 좋은 것들을 다 탈취한다. 애굽은 모세 한 노인에게 또 노예였던 이스라엘에게 나아가 그 히브리인의 신인 여호와에게 10전10패를 했으니 이스라엘이 달라는 대로 다 주었을 것이다.

 

그럼 광야를 행군하면서 당연히 그 가축들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또 고기는 서늘한 곳에 말려 저키(jerky)로 만들든지 연기로 훈제하여 햄으로 만들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애굽에선 고기를 가끔 먹었겠지만 사실상 지난 한 달 동안은 매일 바비큐 파티를 한 셈이다. 간단히 생각해보라. 사백 년 만에 노예에서 해방되었는데 얼마나 기뻤겠는가? 또 그것이 행군이 더디어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생축의 일부는 짐을 싣는 수레를 끄는 운반수단으로 또 치즈나 우유를 공급해주는 용도로 살려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그마저 도살해서 먹어야 한다. 사람이 일단 살고 봐야지 짐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 음식을 안 먹고 물만 마시며 꼼짝 않고 있어도 금식기도에서 보듯이 최장 40일도 버틴다. 행군을 할지라도 물만 있으면 최하 며칠은 버틸 수 있다.

 

지금 성경에 그런 언급이나 힌트가 전혀 없다. 또 물이 부족했다는 기록도 없다. 결국 모세에게 “식용으로 잡아먹을 동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따진 것이다. 마라의 쓴물 때처럼 미리 염려에 사로잡혀 불평한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된 상태가 아니고 질리도록 고기를 먹은 후다.

 

그런 전후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모세이기에 “우리가 누구관대 원망하느냐”(7절 후반) 크게 야단을 쳤다. 첫째, 모세와 아론은 인간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지시하는 대로 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 자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 구름 기둥이었다는 뜻이다. 셋째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그래서, 넷째 너희가 우리에게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견책한 것이다. 그래서 7절 전반에 여호와가 당신을 향한 너희의 원망을 들었다고 엄하게 꾸짖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고난이 닥치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으면 지난 은혜, 지금은 마라의 쓴물과 엘림의 단물을 기억하며 이번에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하며 잠잠히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불안하면 차라리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아도 된다.

 

원망이란 상대가 좋아야 하거나, 상대에게 관심을 갖고 있거나, 최소한 상대에게서 기대할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원망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다. 다윗의 시편 거의 전부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다 지난 은혜를 기억해 내고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확신하거나 최소한 구원의 소망을 더 키우다가 마지막 결론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으로 맺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씨름할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고 있다. 신자도 힘든 일이 있으면 차라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토설해야 하고 원망을 퍼부어도 된다. 힘든 일이 생겨서 괜히 주위 사람,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 교회 성도, 직장 동료들에게 신경질부리고 사이가 틀어지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가 어느 경우에 어떤 모습이든 어쨌든 당신을 가장 먼저 찾아주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하나님이 계속 광야로 이끄니까 미래에 고난이 닥칠 것은 확실했고 또 이스라엘이 그것을 염려한 것은 어쨌든 연약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런 반응이다. 또 장래를 염려해야 미리 대책을 세울 수 있어 어떤 면에선 좋은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한탄이다.(3절) 노예 생활을 계속하다가 수명이 다해 자연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럼 애굽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호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죽는다는 뜻의 히브리어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럼 그 의미는 둘뿐이다. 우선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심판을 받았을 때에 함께 죽었으면 좋았다는 뜻이다. 장자만 죽인 것은 애굽 전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이며 또 그래서 심판을 경고하는 의미를 지녔다. 이번에 회개까지는 몰라도 이스라엘을 안 풀어주면 다음에는 모두 다 죽인다는 것이다. 애굽은 자기들 눈앞에 장자가 다 죽는 엄청난 형벌을 목격하고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항복의 표시로 은금패물과 심히 많은 가축을 갖다 바쳤다.

 

이스라엘이 이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해서 자기들 장자만 죽이고 나머지만 출애굽 하겠다는 의미일 리는 없다. 아들만 죽여 놓고 자기들 살겠다는 부모는 천하에 없다. 하나님더러 자기들을 애굽인들과 같은 취급을 해달라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불신자가 되더라도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둘째로 열 번째 재앙이 아니라면 그냥 애굽에서 평소에 우상숭배의 죄에 참여해왔는데 그 대가로 고기를 먹고 음란한 죄를 범했던 것이 지금 같이 여호와를 따르는 것보다 좋다는 것이다. 그 죄의 대가로 여호와께 심판도 기꺼이 받겠다고 큰소리친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이스라엘은 지금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다고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정말로 애굽 사람들처럼 여호와의 손에 죽어 마땅하다. 그럼에도 문 인방과 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만으로 여호와의 심판에서 면제되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그 전에 아홉 번의 재앙은 고센 땅에 미치지도 않아서 그들의 머리 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셨다.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는커녕 겨우 한 달 만에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것이다. 굶어 죽게 하지 말라고 그것도 입에서 고기 냄새가 풀풀 나는 상태에서 불평했다. 여호와를 따라 계속 광야를 행군하느니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한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 지옥 가는 것보다 이런 불편한 삶이 싫다는 것이다. 마라와 엘림의 체험을 거쳤으면 믿음이 자라야 하고 당연히 더 인내할 수 있어야 하나 지금 정반대로 더 악화만 되었다.

 

이스라엘에게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줄만한 것은 딱 하나 있다. 애굽에서 고된 노역을 했지만 먹고 마실 것은 애굽이 전부 조달해주었다. 자기들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본 적이 없다. 물론 목축을 했고 우유 치즈 고기를 팔아 장사까지 했지만 곡식을 재배 추수한 경험이 전혀 없다. 그래서 가축의 숫자가 줄자 급격히 불안해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원망을 비유하자면 이렇다. 아버지가 너무 가난해서 친구들이 다 갖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하나 사주지 못하자, 차라리 부모 행세를 하지 말고 나를 죽이라고 악다구니 쓰고 있는 것이다. 세상 어떤 부모라도 그런 원망을 들었다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쇼크로 안 쓰러지는 것이 다행이지 않겠는가?

 

전혀 야단치지 않는 하나님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야단도 치지 않고 곧바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다. 그렇게 하신 첫째 이유는 누차 강조한 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안전하게 들여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자 어폐가 있지만 의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장 저를 비롯해 인간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을 절대 굶기지 않으신다. 여러 고난을 직간접으로 허용하지만 반드시 피할 길을 미리 다 마련해놓으셨다. 지금도 광야로 당신께서 이끌어 놓고 굶겨 죽일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특별히 당신께서 세운 소명자가 그 소명을 실현하고 있는 한에는 먹고 마실 것은 당신이 끝까지 책임지신다. 물론 그중에 때로는 순교로 인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결과로 예수 십자가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신다. 나아가 순교자들 자신도 스데반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보듯이 기쁨과 감사로 스스로 기꺼이 감당한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참여할 수 있어서 도리어 영광스럽게 여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명을 이미 받았음에도 지금 소명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로 사백 년이 넘도록 애굽의 노예로 고난을 겪게 했다. 미약한 가문을 창성한 민족이 되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이었다고 이미 말씀드렸다.

 

나아가 그렇게 창성해진 당신의 백성들로 죄악으로 가득 찬 땅을, 죄악 밖에 없는 그 땅을 깨끗케 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빛이 넘치는 거룩한 땅으로 변화시키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었다. 하나님이 아담이 타락한 후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그 계획을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시점에 이스라엘은 거꾸로 다시 애굽에서 죽겠다고 즉, 사탄의 편에 서겠다고 한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참 뜻은?

 

하나님은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자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는 일을 중지했다.(출16:35절) 농사를 지어 스스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잘 아시는 대로 가데스 바네야 거역으로 인한 광야 방황 기간을 포함해 사십 년 넘게 기본 생존은 물론 고기가 이 사이에 끼일 정도로 모든 것을 보장해주셨다.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의 말도 안 되는 배역에도 불구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 것은 수르 광야에 다다르자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출애굽 때부터 하나님의 일정표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자비이자 은혜로운 기적임에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감사만 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말도 안 되는 배역을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과 비교도 안 되게끔 말도 안 되는 섭리로 역사했다. 성경 특별히 구약성경에는 여호와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기록들이 아주 많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어 절로 불평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실제로 종종 있다. 그 모든 일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숨겨져 있다. 고난이 닥치면 그래서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믿음이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을 말이 되는 하나님으로 전환하고 해석해서 내 삶에 적용 실현할 줄 아는 실력이다. 먹을 것이 없는 땅에 이르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능력의 하나님만 붙들면 계속해서 힘들 때만 울부짖고 급할 때만 기도하는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신앙으로 그치고 만다. 이스라엘이 당신에 대한 원망을 넘어 사탄을 따르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음에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해석해 낼 줄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16장 전체를 죽 연결해서 읽으면 하나님이 강조하려는 초점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는 기적에 모여 있지 않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시내 산에서 성문화(成文化)되기 전에 모세를 통해 구두로 제정하여서 준행하는 방안까지 가르쳐서 삶에서 실현하도록 훈련시키는데 있다.

 

본문 4절 후반부에 이같이 하여 율법을 준행하는지 내가 시험하겠다고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망을 듣고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해주는 것이 당신 뜻의 전부라면, 마라의 쓴물 때처럼 하늘에서 비처럼 양식을 내렸고(4절) 그래서 이스라엘이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록으로 그치면 그만이다.

 

성경은 4절에서 35절까지, 만나 메추라기 기적보다 거의 열배를 할애해서 안식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어떻게 거두어 어떻게 보관하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안식일은 거두지 말아야 하고 그 전에 아예 내려주지도 않으며 평일에 많이 거둘 욕심을 내지 말고 이튿날까지 보관하지 말라고 한다. 다음 날에 바로 썩지만 인식일 전날은 두 배로 거둘 수 있고 또 다음 날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가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구출해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굶어 죽게 된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떨어지려 하자 조급하게 하나님께 원망했음에도 그 원망을 듣자마자 해결해 주었다. 먹을 것에 대한 염려는 아예 하지 말고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대신에 너희들의 관심을 전혀 다른 곳에 돌리라는 것이다.

 

미국 최고의 회사에 채용되고서도...

 

하나님은 사십 년이 넘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는커녕 도리어 원망으로 지샜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이 수시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셨다. 고난에서 기도하여 해결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포커스를 거기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이미 예비해 놓고 그것으로 믿음의 훈련을 시키려고 광야로 이끄셨다. 안식일에 거둘 필요가 없다. 거둘 수도 없고 그 전날에 거둔 것으로 먹게 하는 규정을 제정하고 온전히 준행하는 훈련을 시켰다. 그분의 인도로 광야 길을 따라가면서 당신이 어떤 분인 줄,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미국 최고의 회사에 합격을 했는데 입사하기 까지 몇 달의 여유가 있다. 미국 본사에서 그 몇 달의 생활비를 대주는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인 셈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 현지인을 개인교수로 회사 경비로 붙여서 영어와 미국 문화 관습에 대해 미리 가르쳐 주는 것이 지금 안식일 규정인 셈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금 생활비만 받아먹고 정작 미국 회사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출근할 생각은 않고 영어가 어렵다는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가나안 땅에 입경시키는 것이 아니다. 열방 앞에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모습을 통해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그분의 인자와 긍휼이 어떠한지 를 그분을 따르는 백성의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통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아무리 부족해도 염려하지 않고 평강과 자유는 물론 기쁨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또 그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죄악에 절대 넘어지지 않는 믿음을 통해서다.

 

그 훈련을 하나님 쪽에서 너무나 기쁘게 서두르고 있다. 미국회사가 아주 뛰어난 수재를 영입하게 되어서 기꺼이 또 혹시나 마음을 바꿔 경쟁회사로 진로를 바꿀까봐 모든 경비를 대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너무 신나서 미리 적극적으로 광야로 인도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고 있다. 마치 당신의 백성들로 사백 년간 노예 생활을 시킨 것이 어폐가 있지만 미안하여서 보상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만큼 귀하게 여겼다. 정말로 극상품 포도로 가나안 땅에 심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 포도가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하나님은 똑같이 귀하게 여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본문 이스라엘처럼 그저 원망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주에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하루 길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실제 거리는 10킬로미터 밖에 안 된다. 어른들 보통 걸음으로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어린이 노약자 가축이 있어서 두 배가 걸린다 쳐도 반나절이다. 고대에는 어린이나 노인들도 걷는 것이 몸에 배여 있어서 그 정도는 쉽게 갈 수 있다.

 

마라에서 원망하지 않고 하루 밤만 참았더라면, 혹은 선발대라도 물을 찾으러 보냈으면 금방 엘림에 도착할 수 있다. 지금도 똑같은 상황이다. 최소한 마실 물이 있고 잡아먹을 가축도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여건이다. 그런데도 마라보다 더 심하게 배역했다. 마라 때는 모세에게만 원망했으나 지금은 여호와 손에 죽었더라면 더 좋았다고 하니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엄청난 거역이다. 눈앞의 현상에 묶여서 한 치 앞도 못 보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고 한다. 고대에 고기 가마는 주로 어디에 있는가? 우상 신전 옆이다. 이스라엘도 성전 마당에 고기 가마가 있었고 모든 고기를 여호와께 먼저 바치고 나서 나눠 먹었다. 그러고 나서 시중에 팔리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비싸서 먹기 힘들었다.

 

애굽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는 것은 고기만 아쉬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상 신전에서의 쾌락이 더 아쉬웠던 것이다. 광야 생활은 너무 심심하고 아무 재미가 없어서 너무 싫다는 뜻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훈련하는 뜻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안식일을 준행하는 훈련시키는, 특별히 안식일까지 남겨 두면 썩어버리는 의미가 무엇인가? 주일 날 가게 문을 열거나 여행으로 예배에 결석하면 벌을 준다는 것인가? 아니다. 모든 여건이 고난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이 이해는커녕 의심만 되는 때일수록 하나님 그분만 따르라는 것이다. 광야길 같은 인생살이가 아무 재미가 없고 쓸쓸하기만 해도,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감으로써 온갖 음해 멸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절대 놓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온 사방이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가득 차자 겨우 한 달 전에 홍해와 마라에서 받은 은혜조차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다. 눈앞의 고난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 한 치 앞도 보지 못했다.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자연스런 한계다. 그것을 두고 탓할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못 보지만 하나님이 이끄시고 계시지 않는가? 그럴수록 하나님께 원망을 하지 말고 그분께 더욱 의지하고 잠잠히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원망을 해봐야 사실상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는가? 현실적으로도 그분만 의지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출애굽을 홍해의 기적으로 마무리 짓기 전에 하나님은 여호와가 너희를 위해 싸울 테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다.(출14:15)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의미는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이 앞으로 이루실 승리를 소망하며 잠잠히 있으라는 것이다.

 

믿음의 출발 핵심이, 아니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어떤 상태에 있던 절대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소명자로 세우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 자신의 소명을 지난 주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자는 그런 귀한 소명을 주시고 주님이 이끌어주심에 대한 감사와 더욱 충성하겠다는 헌신이 이뤄진다. 또 아직은 그런 단계까지 못 간 신자는 지난 주간의 고난 가운데도 버려두지 않으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확인하고 힘을 얻어 당당히 고난과 맞서 싸우려고 일어서게 된다.

 

가장 못난 기독교 신자들?

 

다시 말하지만 먹을 것이 떨어져서 걱정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 없다고 야단칠 것까지는 없다. 염려가 생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염려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지난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번의 고난이 이전 것과 달라 보이고 더 크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하나님이 일부러 여건을 자꾸 어렵게 몰고 가시는 분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의 아버지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근본이다. 정말로 그분은 우리 아버지인지, 정말로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지 어려울 때마나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이 힘든 줄 알면서도 그냥 버려두는 것은 자녀가 잘못했거나 훈련시키려는 경우 오직 둘 뿐이다. 하물며 하나님이시겠는가? 정말 어려우면 하나님께 간구를 넘어 원망까지 할 수 있다. 부모에게 요구하다 들어주지 않으면 원망도 한다.

 

그러다 언제 부모에 대한 원망을 그치는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보면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된 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어떠한지 깨달으면 그동안 부모에게 원망한 것이 얼마나 큰 불효였는지 진심으로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이 정말로 아버지이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면 왜 하나님에겐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그러고도 과연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엄청난 빚을 자기 힘으로 갚아가는 연예인 이상민을 알 것이다. 지난주 우연히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사로 접했다. 고난 중에 우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고, 견뎌내는 자는 보통 사람인 반면에 고난 중에 웃을 수 있어야 진짜 센 자라고 했다. 하나님을 모르지만 인생에서 참된 진리를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신자들을 향해 어떻게 비방하는가? 나태하고 나약해서 일만 생기면 스스로 이겨낼 생각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에게 울부짖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상민 식으로 이야기하면 못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이 정말로 아버지인가? 내가 그분의 자녀라고 확신하는가? 교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그것도 고난 중에 그런 은혜를 받고서 확신하게 된 고백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다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 없지 않는가? 정말로 하나님이 여러 분의 아버지인가?

 

10/1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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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출#50 20:16 목사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master 2018-04-21 114
97 출#49 20:15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뜻은? master 2018-04-21 402
96 출#48 20:14 Me too 운동의 영적 실상 master 2018-04-21 66
95 출#47 20:13 정말로 무시무시한 살인 master 2018-04-21 54
94 출#46 20:12 효도하면 장수하는가? master 2018-04-21 95
93 출#45 20:8-11 주일인가? 안식일인가? master 2018-04-21 110
92 출#44 20:7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 master 2018-04-21 81
91 출#43 20:4-6 우상이 정말로 무엇인지 아는가? master 2018-04-21 200
90 출#42 20:1-3 첫 계명의 뜻도 모르는 신자들 master 2018-01-27 149
89 출#41 20:1-17모든 인간은 십계명으로 구원받는다. master 2018-01-17 104
88 출#40 19:7-15 시내 산의 경계를 넘어섰는가? master 2018-01-13 195
87 출#39 19:1-8 정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가? master 2018-01-13 101
86 출#38 18:13-22 정말로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master 2018-01-13 149
85 출#37 17:8-16 여호와가 정말로 당신의 깃발인가? master 2018-01-13 104
84 출4:8-9 하나님이 불확실하신 것은 아닌가요? master 2017-11-20 52
83 출#36 17:1-7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신자들 master 2017-11-16 82
82 출#35 16:15-20 만나 사건의 참 기적은 따로 있다. master 2017-11-11 439
» 출#34 16:1-8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master 2017-11-11 158
80 출#33 15:22-27 쓴물을 단물로 너희가 바꾸어라. master 2017-10-12 696
79 출#32 15:1-11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 master 2017-10-05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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