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사건의 참 기적은 따로 있다.

출애굽기 강해 (#3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5-20)

 

이스라엘보다 뻔뻔한 신자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인간이 도무지 측정은 물론 어림짐작도 못한다. 상상의 범위도 완전히 초월한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너희도 충만해지길 바란다고 간구했다.(엡3:19) 믿음은 그래서 하나님을 최대한 많이 알아서 그 아는 것을 최대한 자기 삶에 적용하여 실현하는 실력이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을 단순히 알기를 바란다고 하지 않고 네 Dimension을 다 알라고 했다. 우선 그가 만나고 체험한 그분의 은혜가 그 만큼 다양하고 풍성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깊은지 도무지 그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입체적으로 다각도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우리 눈에 아무리 크게 혹은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분의 역사는 동일하게 크다. 신자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아주 세밀하고도 풍성한 은혜로 임한다. 그로 인한 결과도 아주 오래 동안 후손들 멀리 만 대까지도 어려 차원에서 그분만의 선한 영향을 남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분을 멀리서 힐끗 한 번 쳐다본 첫 인상으로만 판단한다. 그마저 종종 잊어버리고 제대로 회상해 내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표피적으로 이해하고 치우는데 본문의 만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우리 모두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광대하심은 인정하고 믿는다. 이백만이나 되는 백성을 사십 년 넘게 만나와 메추라기로 농사나 목축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먹여 살리신 것은 엄청난 기적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어떻게 적용하는가?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동일한 권능을 누리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이는 하나님을 표면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더 기초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그런 기적을 베풀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고기를 먹지 못한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았음에도, 애굽과 홍해와 마라에서 기적의 은혜를 받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 원망한 잘못은 아주 크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광야로 이끌고 가니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될 판국임은 분명했다.

 

출애굽 당일 밤에 심히 많은 가축과 함께 중다한 잡족도 따라 나왔다.(출12:38) 이스라엘은 노예인지라 애굽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지만 잡족들 중에는 신 광야의 전문가도 있었을 것이다. 마라의 쓴 물 때에는 출애굽한지 삼일밖에 되지 않아 눈치 보느라 잠잠히 있었겠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다르다. 이대로 가면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죽음의 땅에 이르게 된다고 귀띔해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미리 염려하긴 했지만 어쨌든 눈앞에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원망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메시아인 표적을 요구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 같은 이적을 보이라고 했다.(요6:31)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영생의 떡의 의미는 전혀 모른 채 그 떡을 항상 먹게 해달라고 요구했다.(요6:34) 이 일이 언제 있었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남자만 오천 명, 약 2만 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게 한 후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 하자 주님은 그들을 피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왔는데 이튿날 그곳까지 따라와서 그랬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빈 들판에서 사람들이 먹을 것 하나 없어서 굶게 생겼으니 기적을 베푼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잔칫집의 고급 요리가 아니다. 분명히 맛도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오직 생존을 위한 비상식량이었다. 예수님 때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우리의 상황이 광야처럼 나쁘지도 않다. 그런데도 만나를 요구 내지 기대하면 모세 때의 이스라엘보다 더 못한 믿음이자, 더 큰 욕심이자, 더 뻔뻔한 것 아닌가?

 

기적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기적은 누구에게 필요한가?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 그것도 불신자다. 신자는 이곳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천국 갈 보장을 받았기에 꼭 수명을 연장할 필요는 없다. 물론 신자도 간혹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만 아프리카 선교사 같이 하나님이 반드시 시킬 일이 있을 때이다. 거꾸로 그런 병이 걸리면 어차피 죽을 바에야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 천국 가겠다고 해서 선교지로 가는 분이 있는데 도리어 그곳에서 완전히 치유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실제로 엘에이에 제가 아는 한 노 목사님이 그런 은혜를 입었다.

 

불신자는 예수를 모르고 죽어야 하므로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가? 그러나 막상 그 본인은 죽음 이후가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른다. 단지 이 땅의 미련을 도무지 떨치지 못해서 개신교 금식 기도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다.

 

그런 자는 정말로 손발을 완전히 내려놓고 처분만 기다린다. 세상에서 인간적 수단은 완전히 고갈되었다. 밑져야 본전인 심정이다. 치료가 안 되더라도 원망을 않는다. 그럴 대상도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니다. 어차피 죽을 판이므로 담담하게 각오하고 있다.

 

기적의 뜻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선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쪽에선 당신께서 제정한 피조 세계의 운행 법칙을 일시에 all-stop 시킨 것이다. 기존의 창조 질서마저 거스르는 하나님 쪽에서도 일종의 비상수단이다.

 

하나님이 만약 그 말기 암 환자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번에 이전보다 더 강건하도록 치유해 주신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게 하신다. 기적의 목적은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충만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또 그 하나님의 충만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가장 온전히 드러난다. 그래서 요한 사도의 말대로 하자면 예수를 믿게 해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기적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같은 선교지에선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오염된 물을 먹고 아이들이 하루에도 천 명이 죽는다. 그런데 선교사가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아이들과 기도한 후에 그 물을 먹어도 아무도 배탈도 나지 않게 해주신다. 무한정 그러지는 않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만나가 그쳤듯이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우물을 팔 때까지 만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얼마나 큰 그분의 권능이 따르는지 실제 삶에서 체험케 하는 것이다. 또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불쌍한 이웃을 돕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해주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온전히 믿었다. 사실상 대박 같은 기적을 바라지도 않고 크게 욕심내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기도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기도하는 제목과 내용은 다 각기 다르지만 딱 하나 같은 점이 있다. 기도의 초점이 더 편하게, 더 빨리, 이왕이면 풍성하고도 신나는 열매를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식으로 맺게 해 달라는 데에 모인다. 바로 만나를 달라는 요구이지 않는가?

 

이스라엘은 광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먹고 마실 것 하나 없는 죽음의 땅에 이르렀기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원망했다. 말기 암 환자처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셈이다. 우리는 전혀 그렇지도 않은데 항상 만나를 달라고 한다. 우리의 헛된 욕심을 하나님이 꿰뚫어보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만나 사건의 참 기적은?

 

만나 사건에서 하나님의 참 기적은 따로 있다. 그날 거둔 것을 다음날까지 두면 썩는다.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는다. 대신에 그 전날 두 배로 내리고 안식일까지 남겨 두어도 썩지 않는다. 사람 숫자에 따라 일인 당 한 오멜 씩 거두게 한다.(16절)

 

사람들이 일일이 되로 재가며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금 많다 싶었는데 남지 않았고 모자라다 싶었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이백만 인구라면 가구 수로도 수 십 만은 족히 된다. 하나님은 가구별 사람 수자를 장막 안에 남아 있던 노약자 숫자까지(17절) 합쳐서 정확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욕심을 내어 많이 거두면 다음 날 썩게 하셨다. 이를 현대에 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일일이 거둔 양을 검사해 봐야 하고 또 장막 안에 숨겼는지 일일이 뒤져 봐야 한다. 그럼 언제 이백 만을 먹이겠는가? 전자과학을 동원하면 만나 한 알 한 알에 전차 칩을 붙여서 자동으로 계량, 확대, 축소, 파괴시키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도 매일 사십 년간 그 많은 만나 한 알마다 붙여야 한다.

 

이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은 하나님에겐 식은 죽 먹기이다. 애굽 열 재앙 때처럼 눈만 한 번 깜짝하면 된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된다. 하나님으로선 조금 더 여유 있게 내려 주어서 이튿날 두어도 썩지 않게 하면 너무나 편하다. 아니 그 전에 구태여 광야로 이끌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너무나 성가시고 복잡한 일을 자청해서 하시고 있다.

 

‘헬리콥터 맘(mom)’이라는 시사용어가 있다. 헬리콥터가 공중에 떠서 그 아래를 샅샅이 살필 수 있듯이,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매사에 일일이 간섭 지시하는 엄마를 뜻한다. 하나님도 이백 만의 이스라엘을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각자를 헬리콥터처럼 하늘에서 감찰하고 계신다.

 

사라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애굽 여종 하갈이 광야로 도망갔다. 우물 샘 곁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는데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장래 보장의 약속과 여주인에게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방인 여종인 자신의 고통마저 하늘에서 감찰하셨다고 고백하며 경배케 하신 하나님이다.(창16:13)

 

또 엘리야가 혈혈단신으로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에 극심한 영적 탈진이 와서 광야로 들어갔다.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떡과 물을 공급해준 후에 호렙 산까지 인도하셨다. 하늘에서 감찰하시고 그에게 만나와 엘림의 은혜를 베푼 것이다.

 

만나의 진짜 기적은 하나님은 이백만의 공동체가 먹고 마신 데 있지 않다. 한 명, 한 명 각자의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고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시고 계셨던 것이 기적이다. 언제까지 그러셨는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만나가 그쳤으니 그 때까지인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출생할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당신의 손바닥에 그들의 일생은 이미 새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일상적인 삶을 시간, 분, 아니 초 단위의 오멜로 재고 계신다. 침 삼키는 순간은 일초도 걸리지 않지 않는가? 그래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 말하자면 믿음, 성격, 여건, 주변 사람 모두 정확히 재고 있다.

 

정확하게 말해 그분이 지금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붙여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깔 맞춤으로 완벽하게 주변을 조성하셨다. 다른 옷을 입으면 몸에 맞지 않고 불편하듯이 모든 것이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합하다. 여러분의 배우자, 자녀, 직장, 이웃들,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가장 잘 어울리니까 붙여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의 첫인상마저 잊고 있다. 예수 믿어 처음 삼 년간은 기도 응답이 잘 되더니 이제는 거의 응답이 안 된다. 예수 믿는 것이 전혀 신이 나지 않는다. 주일만 습관적 의무적으로 지킨다.

 

오직 성경뿐.

 

목사로서 드리는 종교적 수사가 전혀 아니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이제 60살 중반이 넘어가니까 육신마저 힘이 들어 한시라도 그분이 붙들어주지 않으면 생존도 못하겠다고 서서히 절감되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인생은 어차피 죽음으로 가는 여정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자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바로 기도원에 들어간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이다. 인생은 하나님을 원망할 처지가 전혀 아니다. 의심과 불만도 그분 앞에 아무 부질없다. 그저 담담하게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걸어 갈 뿐이다. 요컨대 너무나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뛰어야 벼룩임을 한 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성경이다. 기도하여 은혜를 받는 것은 개별적 사건이다. 또 일생을 통해 각기 다른 사건을 겪기에 다양한 은혜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은혜들을 하나의 일관된 의미로 엮어서 평생을 두고 붙들어서 자기 삶에 적용할 만한 가치관, 진리, 삶의 원리를 추출할 수 있는 길은 성경뿐이다. 그 모든 은혜를 신구약 전체 66권에 비추어봐야 한다. 만나 사건만 해도 최소한 출애굽기 한 권 전체의 문맥에서 그분의 광대함을 4D로 읽어내어야 한다.

 

몇 번 말한 대로 사백 년의 노예 생활은 보잘 것 없는 한 가문을 창성케 하는 하나님의 비책이었다. 애굽의 자연재앙의 모습을 한 아홉 기적은 애굽 우상 신들을 패배시킨 것이다. 시간 관계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애굽의 그 수많은 우상중에 그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들만 골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애굽 주술사들도 나일 하수를 핏빛으로 변화시키고 개구리도 둔갑시켰다. 그러나 세 번째 ‘이’ 재앙부터 천지를 주관하는 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실토했다. 무엇보다 처음 두 번의 주술에서 원상복귀 시키는 능력이 그들에겐 전혀 없었다. 사기로 거짓 눈속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 한마디로 원래 대로 회복시켰다. 천지를 창조하여 통치하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행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자연재앙이 아니라 이때도 그 운행질서를 일시에 all-stop 시켰다가 다시 작동한 것이다.

 

애굽의 장자가 죽는 벌은 여호와가 인간 생명을 주관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주관하는 분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홍해의 기적은 이 땅 전체를 언제든 물과 불로 심판할 수 있고 또 새 하늘로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마라의 쓴물과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은 믿은 자의 삶을 주관하는 특별히 그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오직 하나님 당신이 공급하신다는 뜻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이다. 또 지금까지 모든 기적들은 물질계라는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안식일 계명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임을 보인 것이다. 이백만 명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 출생에서 사망까지, 그 중간도 포함해 숨을 쉴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당신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만나를 많이 거두어 다음 날 썩는 것은 인간의 치사한 거짓, 욕심, 죄, 음란, 저주, 분노 등 심령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절대로 숨길 수 없다는 뜻이다. 헬리콥터 맘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그분은 우리의 행동, 입술의 말, 마음의 생각은 물론 영혼까지 감찰 하신다.

 

불신자들의 미혹된 영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잠시 하나님 쪽과 등을 졌는지 멀어졌는지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이 부재할 때는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선하고 위대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허사일 뿐이다. 나아가 그런 것들이 절대 인간의 만족과 기쁨이 되지 못함을 인간은 몰라도 당신만은 아신다. 오직 당신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에 지금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안식일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은금패물의 또 다른 비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심히 많은 가축과 중다한 잡족들이 따라 나왔으나 지금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무엇인가? 애굽의 은금패물이다. 저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바로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다. 은금 패물을 갖고 나오게 하신 데는 그분만의 오묘하고 거룩한 뜻이 많이 있지만 오늘도 그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본문의 단계에선 그것들이 아무 소용과 의미도 없게 되었다. 그저 무겁기만 하다. 가축과 잡족들은 스스로 걷기라도 하지만 귀금속은 걸리적거릴 뿐이다. 이 상황에선 사실상 제일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끈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겠는가?

 

광야에선 물도 음식도 없어 완전히 굶어 죽을 판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2백만 백성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만나와 메추라기 한 오멜과 가진 은금패물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완전히 죽게 된 판국에도 은금패물을 한 끼 먹을 것과 바꾸지 않을 자가 과연 있을까?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떤 일을 해야 구원을 얻는가 물었다. 청년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물었기에 주님도 율법을 지키라고 했다. 그 부자는 율법을 다 잘 지켰다고 대답했고 부자이기에 구제와 선행에도 분명 이스라엘 전체에서 제일 많이 했을 것이다. 그 답을 들은 주님은 언뜻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셨다.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이는 구제를 최대한 많이 하라는 도덕적 계명이 절대 아니다. 바로 본문의 상황과 일치한다. 만나 한 오멜 즉,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생명의 떡과 네가 가진 재산 전부와 바꿀 수 있는가? 하나님과 돈 중에 누가 주인인지 분명히 택하라는 것이다. 부자는 재산이 너무 많아 돌아갔다. 결국 예수님 대신에 돈을 택한 것이다. 구원을 버리고 그 반대편으로 스스로 걸어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에게 만나를 달라는 요구 밖에 않는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동일하다. 다른 대답은 없다. 오직 하나다. 썩지 않는 참 생명이자 영원한 양식인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답이다. 바로 본문의 안식일 규정의 뜻이다.

 

어폐가 있지만 몇 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당신 자녀들의 생존을 보존하는 것은 그분의 책임이다. 그러지 못하면 그분의 직무유기다. 제발 먹고 마실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갓난아기가 자꾸 젖 달라는 울음소리일 뿐이다. 정말로 온전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최악의 경우 굶어서 순교밖에 더 하겠는가? 잘못 말한 것이다. 신자에게 순교는 최악이 아니라 가장 큰 영광으로 신자에게 최악이 아니라 최선이다.

 

만나를 이틀간 보관하면 썩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참 기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침 삼키는 순간까지 일일이 감찰하신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이 오직 그분의 은혜다. 그래서 오늘날의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일에 스스로 묻고 확인해야 할 질문도 오직 하나다. 부자 관원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바로 그 질문이다.

 

예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비록 먹고 마실 것이 없고 세상에서 멸시 핍박 받더라도 주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여서 나로 인하여 단 한 명이라도 거룩하게 그 인생이 변화되며 그도 주님의 안식으로 초대할 것인가? 둘째 질문에 아무 주저함 없이 곧바로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참 제자이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의 어떤 권능이 따르는가? 매일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기본이다. 그것이 신자가 누릴 참 권능도 아니다. 주님은 세상과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얼마든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 이것이 신자의 참 권능이다. 또 그래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런 확신을 다시 품고서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갈 수 있어야 참 안식일을 지킨 것이다.

 

10/2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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