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가?

출애굽기 강해 (39)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출19:1-8)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세 달째이자 만 두 달 만에 시내산 아래의 광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약 11개월간 머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수받았다. 본문은 모세가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지시 받기 전에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言約 Covenant)을 맺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피기 전에 언약이 무엇인지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어떤 요리라도 본차이나에 정결하게 담겨 있으면 맛이 훨씬 더 좋게 느껴진다. 언약이라는 그릇 즉, 형식이 귀할수록 그 안에 담긴 요리인 의미가 더 귀하게 다가올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언약의 두 가지 특성

 

먼저 인간 사회의 계약(contract)과는 다르다. 상호 이해관계를 조정 합의하여 쌍방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위반하면 형벌도 쌍방에게 적용하는 것이 계약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는 언약은 쌍방이 의무가 있다는 점에선 계약과 같다. 이스라엘의 의무는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5절) 하나님의 의무는 그들을 열국 중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주는 것이다.(5b, 6절)

 

그러나 어겼을 경우에 형벌 조항이 따로 없다는 면에서 언약은 계약과 다르다. 이스라엘은 그냥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안 되는 것으로 그친다. 언약 전과 바뀌는 것도 추가적인 형벌도 없다. 바꿔 말해 이스라엘이 지키기만 하면 받을 복밖에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당신의 영원한 경륜에 따라 계획하여 주도하는 내용으로 정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형벌이 없기에 의무가 아니다. 독선적 폭력적 강압도 아니다. 이스라엘로선 오직 받을 보상뿐인 은혜다.

 

나아가 인간의 계약과 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끼리 계약은 수정 불이행 파기는 물론 위반 후의 형벌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언약을 티끌만큼이라도 위반할 가능성은 완전히 제로다. 하나님이 어겼다고 그분에게 형벌을 가한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지만 어긴다는 자체도 아예 상상 못할 일이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면 언약은 인간 쪽에선 절대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언약의 둘째 특성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거의 같아 보이지만 세밀하게 따지면 구별된다는 점이다. 언약과 달리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 쪽의 의무사항마저 전혀 없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약속이지 언약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아무 한 일이 없다. 심지어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졌음에도 하나님이 구해내셨다.

 

출애굽 후에도 강력한 블레셋 군대와 마주치면 패배할 것이 뻔해 광야 쪽으로 우회시켰더니 홍해가 가로 막았다. 차라리 애굽에 그냥 두지 왜 출애굽 시켜서 칼에 죽게 하느냐고 아우성쳤다. 그래도 하나님은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을 건너게 했다. 그 후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불평하고 원망했지만 온갖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가나안 땅에 하나님께서 입경시켰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봐도 이스라엘은 도무지 자격이 없고 거꾸로 진멸 당해 마땅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양보, 인내했고 어폐가 있지만 손해까지 감수했다. 그분의 약속은 이뤄지지 않는 법은 없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없다. 홍해 바다뿐 아니라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시는 유일한 그분의 약속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응하지 않고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당신께서도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했다.

 

언약을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준수해야 할 사항은 있지만 그에 위반한 것에 대한 형벌은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은혜의 약속이다. 그 은혜를 받고 안 받고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기에 의무가 아니라 축복이자 권리다. 서두에 계약과 비교하느라 인간이 준수할 의무라고 말했으나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서 누리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축복을 누리는 두 가지 절차

 

그런데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두 가지 절차가 수반된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크게 두 가지 사항을 갖고 언약을 맺는다. 첫째는 네 몸에서 날 자가 기업을 이을 것이며, 둘째는 그의 후손들이 하늘의 뭇별처럼 창성해지지만 이방의 노예가 되어 섬기다가 사대 만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뜻 둘 다 하나님의 일방적 약속 같으나 언약이며 하나님이 실제로 그와 언약을 맺는 의식까지 거행했다. 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기적으로 아브라함이 할 일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다. 또 그 후손이 출애굽 하는 것을 조금 전까지 약속이라고 해놓고 다시 언약이라고 하니까 조금은 의아할 것이다.

 

먼저 아들을 주는 언약을 따져 보면 사라의 경수는 실제로 끊겼고 아브라함도 노쇠했다.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은 인간적 관점에선 가능성 제로의 일방적 약속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가 의로 여겼다고 했다.(창15:6) 또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믿음이 없이는 이 약속은 전혀 응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이 사건에서 많은 신자들이 간과해버리는 사항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이 믿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에겐 거의 의무에 해당되는 것으로 열심히 행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자녀는 네 몸에서 날 자였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도, 사라의 몸종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도 아니었다. 쑥스럽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연세에 성실하게 육체 관계를 가졌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언약은 분명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자 축복으로 의무가 아니다. 그럼에도 첫째 그 내용을 믿어야 하고 둘째 그 축복을 차지할 수 있는 절차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 선물을 주고 안 주고는 주는 자의 호의에 전적으로 달렸지만 받기는 받아야 하는 것과 같다. 선물을 받는 행위 자체가 전제, 조건, 자격이 아니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창성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도 하나님의 일방적 약속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야에서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안 받기로 선택함으로써 차지하지 못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제2세대는 받기로 선택했고 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싸워야 했다. 그랬더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여리고성의 기적을 베풀었고 그 후에 연전연승하게 해주셨다.

 

이는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 뜻이기도 하다.(약2:17) 믿음에 따라 나오는 선택적, 필연적, 헌신적 행함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을 자증하시는 분이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믿음 또한 스스로 말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 속에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신자라면 믿는 자다운 모습이 어떤 방식으로든, 특별히 예수님이 강조하신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주일에 교회에 출석은 한다. 아무리 목사의 설교가 지겨워도 그런 중에도 설교 말씀에 가끔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하게 된다.

 

언약에서 특별히 주의할 점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먼저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일방적 약속이 있다. 다음으로 그것을 찾아 누릴 수 있는 방안이다. 그리고 그 방안까지도 실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시고 실천하게끔 인도해주신다.

 

본문에서 “내 언약을 지키면”(15절)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안이다. 이스라엘로서 선물을 주신 분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이다. 그럼 “제사장 나라로 세워주신다”(16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본질이다.

 

문제는 언약을 안 지키면 그 복을 소유할 수 없다고 조건이나 전제처럼 서술되어 있어서 행위 언약으로 가르쳐져 왔다는 것이다. 언약을 지켜야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스라엘이 율법의 행위 구원에 실패하여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은혜 구원으로 바꾸었다고 오해하면 큰일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로마서 4장에서 무할례자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또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다.(롬4:13) 즉 아브라함은 창12:1-3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언약을 믿음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 율법을 지켜서 언약의 수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시내 산의 율법을 받기 5백 년 전의 사람이다. 율법이 행위 구원의 조건이라면 믿음의 조상으로 살았던 아브라함 시대에 그런 기준이 아예 없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 행위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도, 선악과 금령에서부터 말라기까지 일관된 원리다. 에스겔 선지자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가 시리는 법은 없다고 하면서 범죄 한 영혼마다 죽는다고 선언했다.(겔18:1-4) 구원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에, 심판은 오직 그분을 거역함에 달렸다.

 

본문의 제사장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그 집단이 대상이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개인은 물론 그들 민족 전체의 구원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구원 진리에 관한 예표, 상징은 될 수 있으나 구원론 자체는 아니다. 구약 성경을 해석함에 바로 이 점을 착각 혼동해선 결코 안 된다.

 

정작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본문의 언약 내용인 5,6 절 바로 앞 4절이 무엇을 말하는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왔다고 한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 앞으로도 율법대로 살면 그와 동일한 복을 매일 누릴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재확인하려는 뜻이다.

 

또 다른 민족들이 그런 모습을 볼 때에 상천하지에 이스라엘의 여호와만이 참 신인 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들로 하나님을 찾게 하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받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더러 그들 앞에 거룩하게 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에 주는 보편적인 약속이다.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다. 애굽에서 독수리 날개로 업혀 나왔다고 강조하는 뜻은 제사장 나라로 서지 않으면 또 다른 애굽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가 될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불행은 이 언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천오백 년이 지난 예수님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 율법을 준행하는 것을 복을 받는 조건과 자격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은 율법대로 살고 있으니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서 해방되는 메시아를 기다렸고 지금도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줄 메시아만 기다리고 있다.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찾아 누릴 수 있는 권리요 은혜라는 인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 누릴 수 있는 방안과 절차는 믿음인데 그 믿음이란 행함의 믿음으로 실제로 제사장 나라로 서는 것이어야 한다. 출애굽으로 이 언약 즉, 일방적 약속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근거를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하나님 쪽에선 이미 다 제공했다. 그 정도라면 못 믿을 바보가 없고 또 못 믿으면 너희만 손해라는 뜻이다. 제사상 나라로 서지 못하는 것이 바로 너희 삶에 기쁨이 없고 갈급하고 허망해지는 유일한 이유이자 근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율법을 안 지킨 것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이 그러듯이 형식적으로라도 지켰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데 실패한 것이다. 정확히 말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을 싫어했다. 애굽에서 따로 구별하여 불려나온 목적이 바로 그것인데도 말이다. 지금도 그들은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자기들만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스라엘 나라의 형통만 빌고 또 빌고 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솔직히 또 부끄럽게도 교회에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만의 복을 빌고 또 빌고 있지 않는가? 본문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우리 또한 세상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는 즉, 십자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알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무가 아니라 축복과 권리다.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덜 받을 뿐이다. 추가적 형벌은 없다. 구원이 취소되는 법도 없다. 바울이 나중에 공력이 불에 탈 때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긴 해도 말이다.(고전3:15)

 

모리아 산과 골고다 언덕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자가 잘 아는 진리이긴 해도 만약 그것으로 그치면 부끄러운 구원으로 그쳐도 좋다는 나태한 불순종의 핑계로 악용될 수 있다. 어쨌든 구원은 받는다고 안심한다. 이는 참 믿음이 아니다.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빠졌다.

 

아브라함이 네 몸에서 날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였다. 그날 밤에 언약의식을 거행하려고 아브라함은 짐승을 죽여 반으로 쪼개어 양쪽으로 벌려 놓았다. 그런데 타는 횃불로 임하신 하나님이 혼자서 그 사이를 지나가셨다.(창15:7) 인간의 언약식에선 언약 당사자 쌍방이 함께 지나간다. 어느 한 쪽이라도 위반하면 쪼개진 짐승처럼 죽는다는 의미로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할 틈도 없이 하나님만 혼자 지나가셨다. 당신만 생명을 걸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온갖 윤리적 죄악을 범했어도, 창세기 20장에 또 다시 혼자 살려고 마누라 사라를 파는 천하에 부끄러운 죄를 지었어도 죽이지 않았다. 나아가 결국에는 자기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즉, 죽기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리에까지 이끌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는 고대 언약식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날 밤에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면서 당신의 생명을 걸고 맹세하는 것을 보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두렵고 떨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순간 천하가 두 쪽이 나도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완전히 뇌리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아들을 백세에 주겠다는 약속에 대한 소망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외아들을 바칠 때도 또 다른 아들을 주시거나 이삭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을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후손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이 도무지 성립될 수 없지 않는가? 자기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졌을 것이며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친 모리아 산이 바로 골고다 언덕이다. 실제로 천오백 후에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생명을 두 쪽으로 쪼개는 일이 발생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물론 본문의 시내 산의 언약을 위반해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는 이스라엘인데도 말이다.

 

인간들은 전혀 거룩해지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출애굽의 대박 같은 은혜를 터트려달라고,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달라는 타령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인간을 대신해서 당신께서 벌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모세와 시내 산에서 말로써 일방적 언약을 맺었다. 인간 쪽에선 전혀 손해 볼 일이 없다. 그저 찾아 먹기만 하면 되는 은혜였다. 그조차 하지 않자 하나님은 직접 다시 타는 횃불로 완전한 하나님으로 와서, 완전한 인간으로 쪼개진 제물이 직접 되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젠 새 이스라엘인 신자와 교회와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셨다. 또 골고다 십자가에서 정말로 하늘이 두 쪽이 나는 은혜를 베푸셨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천지사방이 흑암으로 뒤덮였다. 삼일 후에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서 천사들을 통해 광명의 빛을 비추셨다.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에 업어 애굽에서 데려 나왔듯이 우리를 사탄의 노예에서 풀어주셨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은혜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을 쪼개는 이 은혜는 세상이 누리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랑이다. 상상도 못하는 구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한 걸림돌로 비방만 받는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착한 일 하나 하지 않았는데도 로마의 사형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반발한다. 자기처럼 착한 자가 구원 받아 마땅하다고 큰소리치지만 막상 제사장 나라가 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전도가 왜 어려운가? 십자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은 물론 세상마저 두 쪽을 나누는 구원이다.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인간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먼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말도 안 된다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는 자다. 그들은 그냥 흑암에 버려진다. 원래 흑암에 있었던 터라 추가적인 형벌을 더 주신 것이 아니다. 죄 중에 빠져 한 번도 하나님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다.

 

둘째 반응은 십자가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을 왜 구원을 주시는지 왜 빛으로 옮겨주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둘째 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겐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신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거듭나게 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단순히 선택할 수 있는 은혜이자 축복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으신다. 바울처럼 전하지 않고는 그 심령이 눌리게 된다. 부득이함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당위성에 따른 전도도 아니다. 불같은 심령이 되어 절로 십자가 보혈의 생명의 냄새가 속에서 솟아난다.

 

정말로 신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아닌가, 그 언약을 소지했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를 보면 너무 애처로워 눈물을 흘리는지 여부다.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를 전해야 할 만큼 그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죽음의 절망을 맛보았고 그분의 생명에서 소망을 발견한 자라면 지금도 그분의 참 생명을 매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받아 누릴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전에 이 땅에서의 삶에 온갖 고난이 겹친다. 인간끼리 피해와 상처를 주고받는다. 가장 가까운 성도와 부부사이와 부모 자식 간에도 온전한 사랑으로 섬기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인류에게 십자가 사랑 외에 과연 무슨 소망이 있는가?

 

정말로 그분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 누리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 그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애처로워 가슴이 미워진다. 매일매일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다보면 우리도 어느 샌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친 것처럼 우리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서는 놀랍고도 엄청난 축복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12/1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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