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5 20:8-11 주일인가? 안식일인가?

조회 수 110 추천 수 0 2018.04.21 12:32:03

주일인가? 안식일인가? 

출애굽기 강해(45) - 십계명 (5)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신자 된 가장 확실한 표식

 

십계명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지탱한 도덕법으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반드시 준행해야 할 최소의 규범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오늘 네 번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유대교와 기독교 특유의 종교 규례이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일부 기독교인들마저 구약의 율법은 폐지되고 신약의 예수님의 은혜로 대체되었으므로 교회가 주일성수를 강조할 필요도 없고 그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예수 십자가 구원을 강조하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신구약 성경이 안식일에 관해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탓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강조하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주일 예배의 의미를 정확히 가르치고 반드시 지키도록 독려해야 한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음으로써 일어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인가? 바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다. 거룩은 다 배워서 아는 대로 윤리적으로 최고 선(善)한 경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따로 구별하여 떼어내어서 당신에게 속하게 만든 상태다.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으로 모세에게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발을 벗으라고 명했다.(출3:5) 척박한 모래와 바위들과 가시덤불뿐인 땅이 거룩하기는커녕 전혀 아름답지도 않다.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하나님이 임재해 있기에 거룩한 것이다.

 

거룩이란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을 거부 외면 무지한 세상에 속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때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세상은 주일에 여행 같은 취미활동이나 유흥으로 말 그대로 하루를 편안하게 휴식하며 보낸다. 신자들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기도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을 위해 봉사한다. 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다 죄송하지만 돈까지 바쳐야 한다. 이러는 자체가 벌써 세상과 너무 다른 것으로 거룩하다.

 

물론 주일 예배에 빠지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는다든가, 반대로 잘 지키면 큰 상을 받는다고 협박 내지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그런 기복적인 생각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장로니까 집사니까 심지어 목사니까 의무적 형식적으로 억지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즉, 아무 의미와 유익 없이 헛되게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는 것을 죄 없다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히브리 어법 상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분명하고도 확실한 죄라고 선언한 것이다.

 

거룩하게 주일을 지키는지 점검하는 기준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지 쉽게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이 하나 있다. 주일예배가 기다려지는가? 빨리 교회로 가고 싶은가? 몸이 아픈 이유 빼고는 교회에 모이는 것이 즐거운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 기도하고 성도끼리 교제를 하면 일주일간 쌓였던 육신적 피로는 몰라도 정신적 스트레스는 완전히 풀리는가?

 

목사의 설교로 가슴이 찔려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재물이나 육신의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에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만 고난이 겹치고 있어 가슴에는 안 와 닿을 수도 있다. 피곤해서 졸 수 있고 매번 설교 내용이 뻔하고 지루해 주보에 괜히 낙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가슴을 한두 번 쾅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사의 언변이 아니라, 성경과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기쁘다면 주일예배를 거룩하게 드린 것이다.

 

이는 불신자 때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지겹고 괴로운 일이 불신자가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입에 침도 안 바르고서 선동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용하는 단어의 뜻도 생경하다. 그 선동에 아멘, 아멘하고 신자들이 맞장구치는 것을 보노라면 너무 어리석고 불쌍해 보여 속으로 쯧쯧 혀를 차게 된다. 저는 심지어 예의도 없이 설교하는 도중에 박차고 일어나 나온 적도 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예수 십자가로 깨어진 후에는, 아니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 마음 문만 조금 열어도 교리를 공부하기도 전에 설교가 쏙쏙 머리에 들어오고 이해가 된다. 때로는 남들 모르게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제가 교회에 출석하여 처음 들은 설교가 공관복음도 아닌 그 어려운 요한복음이었다. 그것도 한국말을 가장 어렵게 구사한다고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에도 6개월을 울면서 교회를 다녔다.

 

제가 그렇게 계획 의도하기는커녕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하나님이 내 속에서 일으키신 신령한 변화였다. 그분이 저를 택하시고 세상에서 따로 떼어내어서 그분의 십자가 사랑의 제단 앞에 내 심령을 엎드리게 만드셨던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체질과 심성이 연약해서 때로는 하루만 집에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죄의 본성이 살아나고 세상을 향한 옛 습성이 꿈틀대기도 한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갔다 오면 집에서 쉬는 것보다 수백 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 억지로 추슬러서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한 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이끌어 주신 것이다.

예배를 드리면 기쁨이 회복되는 것은 성령님이 충만하고도 강권적인 인도에 따라,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성부 하나님께 찬양 예배드렸기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교제하며 누리는 충만한 기쁨 가운데 신자가 함께 참여한 결과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14:17) 집에서 쉰다고 육신적 피로는 몰라도 정신적 영적 스트레스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 평강과 희락을 얻을 수 있다.

 

주일예배는 종교적 명령이나 의무가 아니다. 교회에서 권면 교육할 차원도 아니다. 신구약 시대, 장소, 인종, 나라 구분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갈급한 자들은 그분을 경배하게 마련이다. 특별히 성령이 내주한 신자들로선 하나님에게 내어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예배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삶이 예배가 되고 24시간 7일 내내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는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 그들은 분명히 거룩하게 지켰다.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에 화장을 하면 안 되었고, 여행은 5리 이상 가면 안 되었고, 밀밭을 지날 때에 이삭을 따서 먹으면 안 되는 등등 유별나도록 이방족속들과는 다르게 즉, 거룩하게 지켰다.

 

모세의 율법에는 없지만 어떻게 하든 더욱 거룩하게 지키려고 세부 규정을 추가한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율법을, 특별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았던 탓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회개한 결과다. 그 규정들을 제정한 의도는 아주 선했다.

 

본 계명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을 하지 않으셨고(10절) 또 하루를 쉬셨다고 했다.(11절) 하나님이 쉬신다면 당신의 백성들도 당연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 하나님은 첫 6일간 창조를 마치고 7일 째에 쉬셨기에 유대인들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이자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하셨다. 유별나게 병자들을 많이 치료해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를 치유하는데도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분노하다니 너무하다고 일방적으로 그들을 비방할 계제가 아니다. 그들이 병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자를 고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치료하느냐고 따진 것이다.

 

예수님이 고쳐준 병자는 거의 평생의 불치병이거나 나면서 불구자들이었다. 물론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바로 그곳에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해주셨다. 그럼에도 불치병이나 불구자는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꼭 그날에 안 고쳐주어도 하루 정도 늦춘다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도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건져주지 않느냐는 주님의 반문도 사실은 조금 잘못된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함부로 잘못되었다니 이상하겠지만 양은 그날 건져 주지 않으면 죽는다. 불치병자와 불구자는 내일 이 시간 이 장소로 모여서 치유 집회를 하자고 하면 되지 않는가? 그럼 유대인들과 구태여 분쟁이 일어날 이유도 없고 교회의 덕을 세우게 되고 그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식일로 유대인에게 시비를 거신 예수님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안식일 문제로 유대인들을 도발한 것이다. 먼저 시비를 걸었다. 거기다 주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했다.(막2:27) 한 술 더 떠서 인자가 – 사람을 통칭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예수님 본인을 말함 –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다. 당신이 바로 안식일을 제정한 자요 안식일에 경배를 받을 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미 붙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너희가 안식일을 이방 종교나 세상 사람들과 달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좋은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점을 고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지키고 종교적 허례허식이 많아서 짐이 되었다고 지적하려는 것만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이 7일 째 쉬셨다는 창세기 2:3과 그 구절을 인용한 이 넷째 계명의 뜻부터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창조로 만드시던 일을 마치고, 또 본 계명도 만들고 나서 쉬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 7일 째에 완전히 손을 놓고 쉰 것이 아니라 창조의 사역만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창조하신 피조세계가 운행되도록 법칙을 제정하시고 직접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일을 바로 그날부터 성실히 시작하셨다.

 

하나님에게 쉰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하나님이 손을 놓고 쉬어버리면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태양 빛이 어두워져서 인간은 순식간에 멸절된다. 베드로후서 3:10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인간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예언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는가? 주의 날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심판이고 그 때에 하늘은 물러간다.

 

창조주 하나님은 7일 째에 더 성실히 일하셨다. 창조의 마지막 순서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하셨다. 당신의 창조 사역을 마친 것에 흡족해 하시며 당신의 마음에 쉼을 얻은 것이다.

 

이 날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 7일 째에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식을 한 자가 있다. 누구인가? 바로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였다. 인간의 이 땅에서의 첫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품 안에서 안식을 주려고 창조한 것이다. 창조의 목적이 인간의 안식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관해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또 그럼으로써 스스로 분쟁을 촉발한 셈이다.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분명히 좋고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안식일에 참 안식을 누리는지 여부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그분의 사랑의 품 안에서 마음의 쉼을 얻고 있는지 따진 것이다.

 

안식일 논쟁에 관한 신학적 책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안식일 논쟁을 신학적으로 설명한 성경책이 있다. 무슨 책인지 아는가? 바로 히브리서다. 유대인들의 선조가 참 안식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찬 안식이 있다고 선언한 책이다. 시간 관계상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히브리서를 ‘제사’보다는 ‘안식’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꼭 다시 읽어보라.

 

히브리서 9, 10장에는 동물 제사로는 속죄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선언한다. 왜 그런가? 그 두 제사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인간 제물로 바쳐져서인가? 물론 그것이 첫째 차이이지만 더 쉽고 정확한 차이를 아셔야 한다.

 

구약율법의 제사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동물 제물을 바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했다. 레위기가 그렇게 복잡하게 제사의 절차와 종류를 규정한 까닭은 인간이 짓는 죄의 종류와 성격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미처 알지 못하고 짓는 죄와 습관적으로 짓는 죄와 제사를 일일이 드리지 못해 용서 받지 못한 죄들도 있다. 이런 죄들은 어떻게 용서 받았는가?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을 정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전백성의 그 모든 죄들을 양 두 마리에게 안수하며 전가(轉嫁)했다. 그 중 한 마리는 잡아서 그 피로 언약궤 위 속죄소에 뿌려서 죄 사함을 받는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죄의 근원인 사탄이 거주하는 광야로 되돌려 보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죄의 효과는 일 년밖에 못 간다는 것이다. 매년 동일한 제사를 지내야 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사의 유효기간 즉, 종교적 규례의 불완전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구약 제사는 행동과 말로 범죄 할 때마다 용서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용서를 받으려면 아무리 레위기 규정대로 엄격히 지켜도 평생에 지은 죄를 도무지 해결할 방도는 없다. 거기다 아직 생각으로 지은 죄는 구약 율법에선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 죄는 어떻게 용서 받을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따졌다. 주님은 그 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다고 답했다. 생각으로 지은 죄들이 더 크고 많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바로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범한 행동 때문에 죄인이 된다면 그 죄들을 일일이 하나씩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으로 죄를 짓고 또 영혼이 썩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를 하나씩 용서 받는 방식으로는 안식을 절대 얻지 못한다.

 

하나님이 안식을 주려 창조한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실제로 존재했던 유토피아인 에덴동산에서 먹고 마실 것 하나 부족하지 않고 풍요로웠다. 정말로 전혀 일을 하지 않아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위에 서려고 했다. 아니 하나님 밖으로 스스로 뛰어나갔다. 그랬더니 갑자기 저절로 두렵고 부끄러워졌다. 하나님을 자기 속에서 제거하자 그 영혼이 완전히 부패되었기 때문이다. 참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교통은 끊겼다. 그로 인해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 후 모든 세대의 인간은 속에서 저절로 죄가 솟아나왔다. 속에서 나오는 것은 죄 뿐이었고 인간은 죄의 덩어리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는 당신께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제물로 바쳐졌다. 인간의 죄를 일일이 따질 수도 없다. 생각 아니 그 영혼이 썩었는데 정죄 야단 교육 훈련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안식일 논쟁을 의도적으로 먼저 시작하신 원래의 뜻과 또 그로 인해 사람들이 십자가에 당신을 매달게 하려는 계획대로 십자가에 기꺼이 올라가셨다. 당신의 전부를 우리를 위해 주셨다. 죄인인 우리와 의인인 당신을 맞교환했다.

 

주님은 율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지켰기에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 비난까지 한 죄인 중의 괴수인 저나 바울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죄인이라 죄를 짓기에 사람 전체를 새롭게 살리셨다. 또 그 사람 전부를 살렸기에 과거에 지은 윤리적 죄까지 자연히 용서받는 것이다. 예수만이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자 예수 외에는 안식이 없다.

 

안식일에 불치병자와 불구자를 치유해준 것도 그들에게 안식일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평생을 두고 육체적 안식은 물론 당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취급되었기에 정신적 안식도 누릴 수 없었다. 회당이나 성전에서 아무리 안식일 예배를 매주 드려도 한 번도 참 안식을 얻지 못했다. 주님이 그들을 안식일에 치유해줌으로써 비로소 육체는 물론 영혼의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모든 인간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지는 이유는 당장에 생명을 살려야하기 때문인데 이들 불치병과 불구자들도 예수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안식일에 참 안식을 주기 위해 불치와 불구를 고쳐준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엄숙히 경고하고 있다. 안식에 들어갈 약속은 받았으나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조심하라고 한다.(히4: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구원을 완성함으로써 공짜로 베풀어질 참 안식에도 못 들어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은”(히4:2) 탓이라고 했다.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율법이나 동물 제사는 가장 성실히 지켰을 것이며 유대 사회에선 최고 의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참 안식을 얻지 못했다. 또 마르틴 루터는 하루 종일 자기가 지었던 모든 죄들을 회개함으로써 이제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평강이 들어서 일어섰으나 그 순간 지금껏 회개한 모든 죄보다 더 크고 추한 죄가 떠올랐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의 은혜에 믿음으로 화답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며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참 안식을 얻어야 한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 누려야만 한다.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교통이 단절된 인간은 그 상태로는 평생을 가도 갈급하고 허망하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참 안식이 없다.

 

아주 심각한 말씀

 

지금 제가 사실은 아주 심각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중이다. 주일예배에 설교 듣고 기도 찬양 성도간의 교제도 하며 지난주의 잘못을 회개하며 다시 새로 시작하자고 다짐하는 것은 너무 귀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이다.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정말로 참 안식을 얻었는가? 새로운 한 주의 삶을 그 안식 가운데 실현할 자신이 있는가?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인해 내 존재 전체가 완전히 이미 바뀐 새로운 신분, 위치, 소속 등에 대해 실감하는가? 더 이상 나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그 앎의 바탕에서 말과 행동이 이어지는가? 주일예배 마치고 교회 문 밖으로 나갈 때에 정말 예배를 제대로 거룩하게 드렸는지 점검해봐야 할 기준이다.

 

혹시라도 아직도 내가 범한 특별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나 종교적으로 잘못된 의식 관습 하나하나 때문에 내 안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이 고난은 끝나지 않는가? 기도를 아무리 해도 응답이 빨리 안 되니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서 예베 드리며 지은 죄들을 다 회개하고 알게 모르게 지은 죄까지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더니 조금 안도감이 들었는데 교회 문밖에 나가자 말자 또 걱정이 덮치는가? 교회에서 열심히 헌금 봉사했으니 이제 복 주시겠지 최소한 고난은 끝내주시겠지 정도만 기대하는 것 아닌가?

 

마르틴 루터가 예수 십자가 은혜에 믿음으로 화답하라고 종교개혁을 했다. 그런데 작금 구교는 사람인 신부 앞에서 자기 지은 죄를 일일이 속죄 받아야 하고, 신교는 하나님 앞에서 일일이 그러는 것밖에 차이가 없지 않는가? 이스라엘의 제사는 그래도 일 년 간은 유효했는데 우리의 제사는 그 효력이 일주일 밖에 가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회개하는 심정은 순수하고 그 의도도 선하다. 또 성화에 필수적인 과정으로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마다 일일이 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 자체로 그쳐선 유대인들처럼 종교적 수고와 짐이 되어버린다. 회개만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배때 마다 십자가에서 이미 맞바꾸어진 의인이라는 나의 신분과 정체성을 재확인해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어떻게 고백했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죄 덩어리였던 이전의 죄인은 완전히 죽었다. 이제는 내 대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했다. 내 안에 성령이 임재 해계시기에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이 어떤 좋은 것도 주시지 않겠는가?

 

신자는 더더욱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매주 회개하는 것을 반복하는 모습만으로 신앙생활을 끝낼 수는 더더욱 없다. 신자들이 안식이 없는 까닭은 이미 참 안식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잊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의미를 모른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참 안식을 얻지 못한 것은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의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메뚜기처럼 왜소하고 가나안 족속이 네피림 거인 족속 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였고 출애굽의 그 큰 이적들을 보여주셨다. 그런데도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마저 작게 보였던 것이다.

 

주일예배가 지난주의 도덕적 잘못과 종교적 허물을 반성하고 스스로 위로 받는 것이 아니다. 외롭고 단조로운 이민생활의 적적함을 사람들을 만나 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참 안식은 결코 없다. 바울 같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면 자기가 받은 소명을 성실히 실행해야 하고 그럼 또 그분이 그에게 생명의 활력을 얼마나 충만하게 채워주겠는가? 그것이 바로 주일 예배를 통해 얻어갈 참 안식이다.

 

2/1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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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출#41 20:1-17모든 인간은 십계명으로 구원받는다. master 2018-01-17 104
88 출#40 19:7-15 시내 산의 경계를 넘어섰는가? master 2018-01-13 195
87 출#39 19:1-8 정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가? master 2018-01-13 101
86 출#38 18:13-22 정말로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master 2018-01-13 149
85 출#37 17:8-16 여호와가 정말로 당신의 깃발인가? master 2018-01-13 104
84 출4:8-9 하나님이 불확실하신 것은 아닌가요? master 2017-11-20 52
83 출#36 17:1-7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신자들 master 2017-11-16 82
82 출#35 16:15-20 만나 사건의 참 기적은 따로 있다. master 2017-11-11 439
81 출#34 16:1-8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master 2017-11-11 158
80 출#33 15:22-27 쓴물을 단물로 너희가 바꾸어라. master 2017-10-12 696
79 출#32 15:1-11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 master 2017-10-05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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