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6 20:12 효도하면 장수하는가?

조회 수 95 추천 수 1 2018.04.21 12:34:50

효도하면 장수하는가?

출애굽기 강해(46) - 십계명 (6)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성경은 특별히 구약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는 구절들이 많기에 잘 분별해서 읽어야 한다. 오늘 살펴보려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모에게 효도하면 장수한다는데 사실인가?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교훈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면 되는가?

 

이 계명이야말로 문자적으로 이해 적용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둘이다. 우선 부모님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음식은 골고루 균형 있게 먹으라, 매일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 스트레스는 술 담배로 풀지 말고 취미 활동을 한두 개 가져라, 등등의 말씀을 하신다. 그대로 순종한다면 장수는 보장된다.

 

둘째로 본문의 생명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고 인도하시는 삶 전체를 말한다.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는 대체로 다른 이들에게도 깍듯이 잘 대한다. 또 자신의 일상사에도 성실해서 스스로 생업을 잘 유지하고 그런 이를 하나님도 반드시 축복하신다.

 

이 계명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뤄진다고 해서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가르침으로 여겨선 안 된다. 더 깊이 따져볼 내용이 많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 자식이 몰라줘도 또 알아주기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한 다 베푼다. 인생을 먼저 살았던 경험과 지혜와 그로 인해 얻게 된 멀리 보는 안목으로 지도한다.

 

반면에 세상의 모든 자식은 청개구리다. 다른 사람의 말은, 정말 적절한 표현으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특별히 친구의 말은 따르면서 유독 부모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 부모로선 그러면 실패로 끝날 결과가 빤하게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막상 당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 허나 부모는 이미 자신이 겪어봤기에 그 실패의 원인과 과정은 물론 그로 인한 고통이 어떤지 잘 알기에 자식보다 더 아프고 안타깝다.

 

물론 아버지가 아파트 수위로 수입이 적어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주는데도 아들이 서울대 수석입학 하는 것 같은 경우도 있다. 이는 아주 특별한 예외일 뿐으로 죄송하지만 가난한 환경이 큰 동기를 부여한 측면을 무시 못 한다.

 

부모는 위대한데 자식은 청개구리인 모습은 이 땅에 인간이 생존하는 한 지속되는 현상이다. 사람들의 행동 양상이 장소와 시대의 구분 없이 동일하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차피 그렇게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 간혹 친 자녀도 학대하는 부모가 있지만 유전적 환경적 결함이 그 원인으로 이 또한 예외일 뿐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교육, 훈련, 의지적 노력이 전혀 필요 없이 자동으로 행해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껏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선(善)이다. 다른 선들은 아무리 사소해도 막상 행하려면 얼마나 어려운가? 솔직히 말해 신자 부모조차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 요즘에는 집집마다 한두 명의 자녀뿐이라 거의 절대적인 우상이 되어 있다.

 

모든 자식이 부모와 엇나가는 것도 특별한 양심의 가책 없이 거의 자동으로 행해진다. 하나님도 거역하고 자기를 그분 위에 둔 타락한 본성을 지녔는데 인간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모든 것을 자기가 요구하기도 전에 엄마가 다 마련해주니 더욱 부모를 우습게 여긴다.

 

물론 자식도 피붙이인 부모를 본성적으로는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부모 입장에선 내 자식이지만 원수 같을 때가 많다. 그러다 자식이 언제 정신이 드는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부모 입장이 된 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부턴 자기 새끼들 돌보고 사랑하는데 바빠 부모에게 신경 쓸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식들을 다 결혼 시키고 안정 되는 것을 보고 여유가 생겨 이젠 부모를 돌봐야지 하면 부모는 벌써 늙어서 치매 같은 중병에 걸려 있다. 이젠 거꾸로 부모가 원수 같이 여겨진다. 혹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서 땅을 치고 회개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침 지난 주일이 제 어머님의 기일이었다. 형님도 돌아가셨기에 집안의 제일 어른이 된 큰 누님한테 미국에 있다는 핑계로 조화도 못 보내고 매번 죄송하며 돌아가신 후에도 큰 불효를 한다는 카톡을 보냈다. 칠순이 넘은 누님께로 돌아온 답이 이랬다. 우리도 늙어서 자기 몸뚱이 하나 추스르기 바쁘니까 돌아가신 분 생각하지 말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효도라고 말이다.

 

아직도 창창한 여러분은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인생의 결국은 그렇다. 누차 강조하지만 가뜩이나 짧고 한 번뿐인 인생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해본다. 본성적으로 힘 안 들이고도 가능한 피붙이에 대한 사랑을, 그 중에서도 효도 하나 제대로 못한다. 너무나 불쌍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본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 즉,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주신 것이다. 효도도 하나님 뜻 안에서 해석 적용해야 한다. 그 첫째 의미가 이처럼 효도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의 영적 실체가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지 분명히 자각 인식하여서 겸손해지라는 것이다.

 

부모를 하나님과 동격에 두라.

 

본문의 ‘공경하라’는 히브리 원어 카베트는 영광(glory)의 동사 명령형이다. 구약성경에선 하나님과 부모에게만 사용되었다. 유교에선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해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 셋을 동격에 두고 그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모는 임금과 스승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위치에 두라는 것이다.

 

부모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대하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영어 성경은 영예롭게, 존경스럽게 여긴다는 뜻으로 조금 격을 낮춰서 ‘honour’라고 번역했다. 이 계명에서 공경하라는 것이 여행 보내드리고 좋은 옷 사드리고 맛있는 음식 대접하고 용돈 드리는 효도의 차원이 아니다. 진심으로 부모에게 하나님과 상응하는 의미와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부모를 숭배하라는 뜻은 아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부모를 인식하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인식이 전혀 없다. 부모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증조부, 증조부는 고조부가 주신 것일 뿐이다. 계속 올라가면 원숭이와 아메바를 거쳐 결국은 산소와 수소 원자 같은 물질이다. 요컨대 부모와 자식 사이가 진화로 맺어진 것뿐이다. 둘 다 물질로 시작해 물질로 끝나는 관계다.

 

따라서 불신 인간사회의 최고 덕목은 부모 효도다. 부모 위에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된 근거도 오직 부모의 공이며 또 그 부모를 있게 한 조상의 덕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털끝만치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부모와 조상에게 제사를 금하는 개신교와 그 하나님을 싫어한다.

 

인류 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바울이 전도하면서 어떤 말을 했는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한 혈통에서 나게 했다고 선포했다. 모든 인간의 본성이 똑 같다는 것이다. 또 인생의 연대와 거주의 한계를 그분이 정하셨는데 당신을 더듬어서라도 찾게 할 목적이라고 했다. 부모와 조부를 따져서 올라가면 자신의 궁극적 근원이 물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점을 신앙이 없더라도 인간 이성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힘을 입어 기동하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너희 스스로 노력해서 혹은 조상 덕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공짜로 다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 안에는 당연히 부모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제발 깨달으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신자 부모만 공경하라.

 

자식이 부모를 하나님과 상응되게 공경하려면 부모부터 하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하나님 대신에 영적지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 자녀를 당신이 낳은 육신적 자녀로만 알고 자기 욕심과 감정대로 키워선 안 된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분의 자녀로 양육 지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 계명은 신자인 자녀가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부모는 그 가정을 하나님 나라로 가꿔나가는 부모라는 뜻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그렇다고 불신자 부모는 내팽개쳐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수록 그 부모가 더더욱 하나님을 알고 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며 전도해야 한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서로 돕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것을 실현할 제도로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제정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교회가 만들어졌다.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

 

가족 사이에 감출 허물과 잘못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혹시라도 있으면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줘야 한다. 죄로 생긴 결과인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가정 안에 일절 있어선 안 된다. 그 일을 부모부터 솔선수범하면 하나님과 같은 영광은 아니더라도 부모는 물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식들이 저절로 자기 부모를 영예롭게 여기게 된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구절이 신명기6:5 ‘쉐마’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되 그것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다.

 

하나님이 모세가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스스로 있는 자”(추3:14)라고 하면서 이름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어지는 15절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대대로 기억해야 할 당신의 표호라고 덧붙였다. 이름은 없지만 영원히 그렇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불러주길 원하는 유일한 이름이었다.

 

정확하게 말해 당신의 성품이자 당신의 백성을 이끄는 모습이다. 애굽에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그들의 최초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내용을 바로 그 약속하신 때에 어김없이 달성하신 하나님이다. 선조들의 덕으로 출애굽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아테네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최초 인간이 타락한 후에 때가 되면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깨트려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모든 인간은 바로 그 언약의 은혜 아래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성육신하셔서 그 약속을 신실히 달성했다. 바울은 아데네의 불신자들더러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 십자가 아래 즉, 참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했던 것이다.

 

두 종류의 생명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 사람에겐 첫째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부모가 최고가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신자는 첫 네 계명이 전제 내지 근거로 삼아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다섯째 계명의 의미가 불신자들의 것과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부모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는 뜻이다. 육체로 살고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살고 죽음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육신의 생명을 주어서 이 땅에서 실존이 가능하게 한 은혜는 너무 크고 중하지만 하나님이 마련한 통로일 뿐이다. 또 육신의 생명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포장상자에 불과하기에 부모는 포장상자를 준 것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포장상자에 불과한 육신이 전부라고 여긴다. 포장상자를 최고로 아름답게 꾸미려고 평생을 두고 돈, 권력, 명예, 지성을 최대한 추구한다. 그러나 포장상자란 원래부터 남에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로 자신의 본질이자 전부인 자기 내면이 채워지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아무리 큰 성공을 이뤄도 자아 충족은 없고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 중에도 조금 깨인 사람들은 내면의 자아를 충족시키려 노력한다. 도덕 철학 종교 등에 심취하며 정신을 수양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기에 자기 존재의 기반은 물질이다. 그 정신도 실은 물질에서 출발한 것이요 물질의 작동일 뿐이므로 아무리 고상하게 가꿔도 소용이 없다. 물질인 정신이 또는 죄로 타락한 정신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의 뜻으로 주신 거룩한 영혼에 충족을 주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다.

 

실제로도 불신자들 모두가 자아충족을 외치지만 아무도 성공하는 자는 없다. 청개구리 같은 본성이라 실패할 수밖에 없다. 또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며 성의를 다해 가르쳐줘도 도리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반발만 한다.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불쌍하기 짝이 없다.

 

다시 제 누님 이야기를 하겠다. 세상에 그럴 수 없는 의인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다. 그 연세에 박물관에 자원봉사하고 계신다. 노년에 자기 몸이 건강한 것이 효도라고 했는데 반쯤은 성경적 진리다. 그러나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 무엇인가? 마지막까지 중요한 것이 내 몸의 건강 즉, 육신적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내 인생은 내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 목사인 제가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두 종류의 인간

 

이 다섯째 계명은 결국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오직 두 종류의 사람으로만 나눈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다. 부모가 이 땅에서 인간이 영예를 돌려야 할 최고의 존재라고 믿는 자와, 부모의 은혜가 너무 귀하고 감사하여 최대의 영예를 돌려야 하지만 그런 부모를 주신 하나님부터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더 우선인 자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내리 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모든 이가 인정하고 또 그래서 그것은 인생의 진리다. 그럼에도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충분히 다 갚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십계명을 잘 지키므로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는 불신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말로 가슴에 손을 얹고 이 다섯째 계명에 대해 떳떳할 수 있느냐고 대답해보라고 하라. 예수님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두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했을 때에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다 슬슬 물러간 것보다 더 빨리 모두 물러갈 것이다. 아무도 예스라고 답하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간과해버리는 사항이 하나 있다. 내 부모도 실은 당신의 부모에게 똑같이 한없이 작아지는 불효자였다는 것이다. 그 위의 할아버지도 또 그 위의 할아버지도 모두 그랬다. 문제는 우리의 자식들도 똑같이 우리에게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대체 이런 현상이 왜 생기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무엇보다 누가 누구에게 죄책감을 가져야만 하고 또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만 하는가? 우리 모두 스스로 양심의 가책에 따라 그랬다면 도대체 그 양심은 어떻게 누가 만들은 것인가? 그 답은 오직 하나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위에 두었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차지한 탓이다. 그래서 모든 이가 천하의 불효자인 동시에 불충분한 부모인 것은 그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정을 창조하신 그 선하고 아름다운 경륜을 인간이 스스로 파괴한 탓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영혼을 부여해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데도 인간은 포장상자에 불과한 육체의 생명을 가꾸는 데만 몰두했다. 처음 타락한 이후로 그 육체는 살아 있어도 그 내면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인 영혼은 정녕 죽었다.

 

그러다 결국 본인의 육체의 죽음이 다가오면 누구나 인생이 참 덧없었다고 고백은 한다. 만족보다 후회가 많이 남는다고 실토한다. 이때에도 여전히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내 시신을 부모와 조상 곁에 묻어달라는 한 가지 소원 밖에 없는 사람과, 내 영혼이 돌아갈 영원한 본향인 하늘의 하나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이제야 비로소 참 안식을 얻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는 자다. 쉽게 말해 마지막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자와 평강 가운데 아름답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다.

 

부모를 어떻게 공경할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신자는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설교 내내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내리 사랑이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비록 충분치는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모를 잘 공경하고 있고 시간이 없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최선을 다해 효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기억되고 싶은 이름은 단 하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자식을 더 이상 불효자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들의 쉐마처럼 자식에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육체의 생명보다 영적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하고 우선임을 자기들의 삶에서 자식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종교교육에 열심을 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야 한다. 쉽게 말해 신자 부모는 불신자 부모와 달라야 한다. 포장상자만 가꾸는 일 즉, 아이들을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내고 안정된 직장을 구하도록 도와주는 것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우선적인 것은 자식에게 영적인 생명이 훨씬 더 귀함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아이의 인생이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결론으로 고백한 내용의 첫 부분에서 그치게 만드는 셈이다. 포장상자를 치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는 따지자면 인류 역사상 솔로몬이 최고였다. 그러나 그것을 얻으려고 해 아래에서 행했던 그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된 것이었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하나님 안에 돌아와 보니 전부가 쓰레기에 불과하더라는 것이 둘째가 그의 진정한 고백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부터 육체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으로 살면 자식도 자연히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그렇게만 하면 그만큼 자식을 그 인생이 실패로 끝나게끔 키우는 일도 없다. 모든 불신자들이 행하는 모습이다. 신자는 그 반대여야 한다.

 

신자는 이미 예수 십자가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확보했다. 세상의 죄악과 사탄의 흑암의 세력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 어떤 큰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최소한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가정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로 아름답게 만들고 가꿔나가야 한다. 대대손손 바로 그 신앙을 물러줘야 한다. 그럼 부모를 자식들이 대대로 저절로 공경하게 된다. 자손들로 바로 이 다섯째 계명을 잘 지키게 만드는 일이다.

 

자식이 없는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 만 스승은 있되 아비는 많지 않고 디모데를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고전4:15) 세상에는 부모가 없는 불쌍한 아이들이 많다. 친 자식은 아니지만 입양하여서 바울처럼 사랑으로 복음으로 키우면 된다. 그럴 여건이 안 되면 모든 집의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을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해주는 일에 자신이 맡은 일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바울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마저 한두 명의 자식인지라 어떻게든 육적 생명 포장 상자를 치장하며 키운다면 그를 그리스도 밖으로 내모는 짓이다. 거기다 일만 스승은 있으나 복음으로 낳는 부모는 드물다고 했다. 신자 부모마저 자식을 자꾸 가르치려는 마음에서 옳고 그른 것으로 따져 뜯어 고치려고만 한다. 그 영적 생명을 예수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고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자라게 인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은 진화된 물질과 물질로 만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 하에서 영과 영이 예수 안에 함께 교통할 수 있는 관계다. 자식의 영혼을 십자가 복음으로 자라게 하지 않으면, 자식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불효자라고 후회하고 한탄하게 만드는 짓이다. 부모로서 육신적으로 최고로 잘 해주는데도 말이다. 요컨대 자식의 영적 생명을 바르게 양육하라는 것이 이 다섯째 계명이 오늘날의 신자에게 주는 참된 의미이다.

 

2/1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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