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51 20:17 십계명의 결론은?

조회 수 116 추천 수 1 2018.04.21 12:47:51

십계명의 결론은? 

출애굽기 강해(51) - 십계명 (1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탐심과 탐욕.

 

불신자를 전도하다 보면 자신은 부모를 열심히 공경하고 있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오늘 살펴볼 열 번째 계명인 이웃의 물건을 탐한 적도 없기에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을 필요 없다고 반발하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성경의 구원진리는 물론 오늘의 본문의 뜻도 모르는 그들로선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문제는 도리어 그런 반발에 제대로 변증하지 못하는 신자이다.

 

우선 탐낸다고 하니까 우리말 어감(語感)으로는 마치 훔치려 드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그럼 도둑질 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과 중복된다. 탐낸다는 것은 이웃의 소유가 내 것보다 훨씬 좋아보여서 갖고 싶어지는 욕심이 커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간음이라는 실제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그녀가 자기 아내보다 훨씬 더 예쁘게 보이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간음과 같은 죄라고 정의를 내린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의 의미이다.

 

또 이웃집을 탐내지 말라고 했다. 단순히 집(house) 자체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훔쳐갈 수도 없지 않는가? 이웃 사람과 그의 삶과 인생 전반을 대변하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 안에 자기 것보다 더 좋게 여기는 대상이 재물만이 아니다. 아내, 남종과 여종, 소 나귀 같은 가축들이다. 마지막에는 ‘무릇’이라는 형용사로 이웃에 속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를 다시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열 번째 계명은 욕심을 보통 수준 이상으로 과하게 품는 것을 탓하는 의미와 전혀 무관하다. 또 마음으로 짓는 죄도 분명히 죄로서 죄의 범주를 정확하게 정희 혹은 확장한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십계명에서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다섯 번째에서 아홉 번째까지 다섯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탐심이라는 뜻이다. 또 그래서 이 열 번째 계명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고도 정작 행하지 말아야 할 첫째 사항이라는 것이다.

 

살인은 이웃의 육신적 생명을 탐한 것이다. 간음은 이웃의 아내, 도둑질은 이웃의 가축은 물론 당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기계로 즉, 재물로 간주된 남종과 여종을 탐한 것이다. 거짓 증거도 당시는 단순한 농경사회라 재물의 소유권 분쟁이 거의 전부였다. 간혹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신 대로 말로 상대를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것은 이웃의 인격을 탐한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에 해당되는 이 네 계명을 지키지 못함이 탐심이 그 원인임을 쉽게 이해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탐심 때문이다. 효도하는 시간과 경비와 노력을 자기 형통과 안락에 사용했기에 공경을 잘 못하는 것이다.

 

한국의 최근 신문기사에 따르면 부모로부터 재산을 많이 물러 받은 금 수저 자녀일수록 명절에 부모를 찾기 보다는 해외여행을 간다고 한다. 자기 치장을 해서 남보다 우월한 것을, 최소한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웃의 풍요를 너무 부러워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결국 아무리 세상에서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고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는 자들도 이 열 번째 계명에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어떻게 한다고 말하는가?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주어야 마땅한데도 배가 아프다고 한다. 그런 일에 단 한 번도 배가 아프지 않았던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십계명은 인간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탐심에 기인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탐심이 없다면 모든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열 번째 계명은 탐심이 죄의 본질이라고 최소한 시발점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 특유의 진리만이 아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생각을 하므로 짐승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뜻이다.

 

십계명과 연결해서 따져보면 생각이 악을 도모하니까 말도 악하게 나오고 악한 말이 지나치다 보면 악한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그 반대로 행동이 악하니까 말도 악해지고 또 그래서 생각까지 악해진다는 법은 있을 수 없다. 이는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진리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타 종교와 윤리에선 마음이 추악한 것까지는 죄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오늘의 성경 본문이 말하는 탐심이, 정도를 벗어나 지나친 욕심이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죄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는 너무 모순이지 않는가? 이미 마음이 죄의 원인이라고 모두가 인정해놓고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끼리 다툼을 없애려는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인간사회에 분쟁과 죄악이 번창하는 것을 방치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의 보존과 유지만이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가 되면 곤란하다. 역으로 말해 내 혼자서 무엇을 하든 나의 자유와 권리이지 죄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설령 내 자신과 내 주변에 부작용이나 부정적인 폐해가 생기더라도 내가 책임지겠고 또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기 일을 책임질 수 있는 두 성인끼리 상호 자발적 합의 하에 행하는 간음과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들에겐 육신은 물론, 설교 중에 구체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성애는 실제로 육신이 아주 추하고 망가지는 면이 분명히 있음, 정신과 영혼이 초라하고 비참하고 추악해지든 말든 아무 문제 삼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

 

물론 불신자들 중에 생각과 영혼의 고결함을 추구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 실현하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가? 남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해주고, 타인의 소유도 존중하고, 과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자가 열심히 자기 소유를 모아 쌓고 즐기면서, 인간 사회의 근본 윤리의 테두리를 지키자는 정도다.

 

바꿔 말하면 모든 인간의 내면의 마음 밭이 선하고 또 자기 책임 하에 자기 노력으로 그 마음을 스스로 얼마든지 다스릴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유행가 가사에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등장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유행가란 모든 대중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자기 마음도 모른다고 대다수 사람이 인정했다.

 

솔직히 말해 저부터도 아침저녁으로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생각이 여러 번 바뀐다. 한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사건, 같은 사람을 두고도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이 변화무쌍해진다. 나아가 그 한 순간의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끼리도 전혀 일치하지 않고 각기 따로 놀기에 스스로 놀라는 것이 인간이다. 심지어 전혀 의도도 하지 않았고 의식도 하지 않았는데 수시로 사악한 생각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러는 자신이 너무 싫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어려서부터 모든 생각이 악한 인간

 

좀 더 실감나게 설명해보겠다. 우리 모두 선한 일은 정말로 오래 궁리 계획한 후에 자기 경비와 시간과 노력을 쥐어짜야 어쩌다 한 번 성공한다. 반면에 악한 일은 전혀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너무나 수월하고도 자연스럽고도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다. 분명히 자기 경비와 시간이 소비되고 있는데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악은 행하면 행할수록 더 재미가 있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죄의식도 거의 없다.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스쳐지나가지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 또는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어때라고 핑계를 대면서 점점 더 빠져 든다. 너무 재미있는데다 조금 꺼림칙한 측을 없애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동참을 권유한다. 공범을 만들겠다는 심보다.

 

그 권면을 거부하면 혼자서 잘난 척 한다고 비난한다. 어른들 이야기가 아니다.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골려 먹이려 작당한 후에 순진하고 착한 학생에게 함께 하자고 권한다. 그 학생이 거부하면 이제는 떼를 지어 그 학생을 왕따시켜 버린다. 한국에선 소셜미디어(SNS) 즉,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르는 아이들에게서 집단적인 악플을 당해 상처 받아 초등학생인데도 자살하는 지경이다.

 

이런 판국에 어떻게 인간의 마음 밭이 선하고 또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성경은 노아의 홍수 심판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창6:5) 홍수 후에 무지개 언약을 세우면서 하나님은 그 ‘항상’이라는 시간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시켰는가? 아예 “어려서부터” 모든 생각이 악하다고 반복해서 강조하지 않았는가?(창8:21)

 

혹시라도 인간이 이웃의 것을 좋게 여기는 시기심은 자연발생적인 반응일 뿐이고, 상식과 이성의 범위에서 과하지만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선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일부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순진한 생각에 불과하다.

 

세상의 것을 전부 100이라고 치면 이미 99개를 가진 자가 마지막 남은 한 개를,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크다. 인간은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 잘 감사하지 않는다. 당연히 자기 노력의 열매로 여긴다. 반면에 못 가진 것에 대해 집착만 하는 존재다.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하는 감사하는 마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오죽하면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남의 소유를 시샘하는 것이 나쁜 일이므로 하지 않겠다는 선한 뜻은 그 안에 하나도 없다. 우선 남의 것이 훨씬 좋아 보이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지 자꾸 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혹시라도 상대가 나의 그런 낌새까지 알아채버리면 두 번이나 패배하는 셈이므로 부러운 내색을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하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어떻게 꾸짖었는가? 왕은 이미 99 를 가졌는데도 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가 달랑 하나 가진 것마저 왕의 지위와 권력을 동원해 빼앗았느냐고 크게 질책했다. 오늘의 열 번째 계명의 뜻대로 이웃의 아내에게 탐심을 가지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 번째 계명의 위반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고 따진 것이다.

 

십자가 자체인 열 번째 계명

 

열 번째 계명이 마지막이라고 해서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십계명 강해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와 연결해서 묵상해야 한다고 내내 강조했다. 이 열 번째 계명이 가장 두드러지게 연결되며 예수 십자가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펴본 대로 인간 내면의 마음 밭 자체가 너무 추악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는데 사실은 첫째에서 넷째 계명까지도 신자가 가져선 안 되는 탐심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교회에서도 중용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므로 좌로나 우로 너무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소유를 줄이고 근검절약해야 한다, 등의 내용으로 설교하고 가르친다. 그 뜻은 선하고 가르치는 내용도 옳다. 그러나 그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내용이자 세상 종교나 윤리 모두가 가르치고 있으며 교회가 가르칠 내용이 아니다. 그런 것을 배우려면 교회에 출석할 필요도 없다.

 

신자의 탐심은 단순히 세상의 것을 정도 이상으로 욕심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첫째 계명은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 당신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당신을 사랑하라는 명시적 뜻도 아니다. 그냥 다른 신을 너희에게 두지 말라고 한다.

 

물론 지금 출애굽의 은혜와 권능을 넘치도록 체험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사랑으로 통치 중인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는 것은 입이 아프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말로 생각하는 동물이라면 그 진리는 당연히 알 수 있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후대의 기독교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라고 그 뜻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사고하기 때문에 고귀한 존재라고 덧붙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충만하고도 완벽한 사랑으로 보호 인도 받기에 고귀한 존재이다. 또 그런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기에 고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대신에 너희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 그 네 계명의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거부, 외면, 등한히 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안이라는 것이다.

 

너희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한다. 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참 쉽지 않는가? 오늘날의 신자들도 주일을 지키는 것에 큰 어려움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겁이 나서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우리 중에 아무도 우상을 새겨서 섬기는 자가 없지 않는가?

 

이 넷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치다.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고개를 당신 쪽으로만 돌려놓고 있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겠다는 뜻이다.

 

신자의 탐심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배운바 대로 바로 너희가 우상의 실체라는 것이다. 너는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라고 제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는 것이 탐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그 존재, 삶, 인생 전부를 그분의 거룩한 통치에 전적으로 내어드려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바로 그것이 탐심이 된다.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라. 피조물인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보다 더 위에 서겠다는 것이 가당치나 한 생각인가 말이다. 꿈도 못 꿀 엄청나게 패역한 생각이지 않는가?

 

신자의 탐심은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재물, 권력, 명예에 대한 도가 지나친 욕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불신자들에게 해당되는 탐심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없으니까 세상의 것뿐이고 또 그것을 많이 차지하려고 분쟁이 일어나니까 항상 탐욕이 문제가 된다.

 

그들은 또 생각이 악하므로 말과 행동이 악해지는 것까지 인정한다. 그래서 악한 생각을 다스리려고 노력도 많이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왜 생각이 악해졌는지 그 원인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니 악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

 

끝까지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에서 악한 생각을 다스리려 든다. 탐욕으로 가득 차서 이미 부패해진 자기 마음을 동원해서 자기의 생각을 통제하려 덤비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 한다. 자기 영혼을 고귀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죽을 때까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바꾸면 하나님 그분을 거역한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불신자들이 세상적인 욕심이 많아서 그 삶이 갈급한 것이 결코 아니다.

 

신자의 탐심은 그와는 달리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리지 못하는 것이 탐심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면 모든 이웃의 모든 소유도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어떻게 이웃의 것을 탐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이웃을 사랑해야 마땅하다. 이웃 사랑까지 못하면 최소한 탐내지는 말아야한다는 것이 열 번째 계명이다.

 

탐심은 우상숭배

 

바울 사도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라. 곧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이라고 했다.(골3:5) 음란은 간음, 부정 사욕은 도둑질을 일으키듯이 인간 사회의 모든 죄악의 원인들이다. 십계명으로 따지면 5-9 째의 인간관계의 계명들을 어기게 만드는 요소다.

 

마지막에 하나를 더 보탰다. 탐심을 죽여야 하는데 탐심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했다.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숭배가 된다. 또 자기 속에 하나님이 실종되거나 약화되면 그 자리를 자신이 대체하거나 자기가 더 강화된다. 바로 자기가 우상숭배의 대상이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바로 탐심이 되는 이유다.

 

요한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 했다.(요일2:15)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세상을 사랑할 리가 없다. 역으로 말해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 그분의 사랑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다.

 

나단 선지자로부터 간음의 죄보다 탐심의 죄를 지적 받은 다윗이 그 후에 어떻게 했는가?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고 철저히 회개했다. 주의 목전(目前)에서 즉, 주님 보시는 앞에서 죄를 범했다고 실토했다.

 

따지고 보면 다윗이 간접적으로 살인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와 그 집안에 가장 크게 잘못했음에도 하나님께만 범죄 했다고 고백한다. 그런 잘못을 깨닫지 못했거나, 왕이니까 부하에 대한 잘못을 무시하겠다는 뜻은 전혀 없다.

 

이웃의 아내를 탐하게 된 까닭이 잠시 하나님을 자기중심에서 놓쳤기 때문이라는 처절한 고백이다. 바꿔 말해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탐심이 죄의 본질임을 철두철미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런 회개를 할 줄 아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가 되었다.

 

오늘로써 십계명 강해를 마친다. 열 번째 계명이 말하는 탐심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앞장세우거나 위에 두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도 자기 발아래인데 이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동적으로 자기 발아래의 먼지가 된다. 그 소유를 탐하게 되고 말과 행동의 죄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얼마나 오묘하고 풍성한지 미처 모르는 것이 신자의 탐심이다. 하나님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품어선 안 되는 생각, 그 금도를 넘어서는 생각이 바로 탐심이다. 하나님 그분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세상 윤리로만 따져도 이 열 번째 계명에서 자유로울 자 아무도 없다. 사촌이 논을 사면 모두 얼굴은 웃지만 속은 시기와 분노로 뒤틀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 마음 밭을 선하고 아름답게 바로 잡을 수 있는 방안은 예수님의 사랑뿐이다.

 

부끄럽게도 제가 최근에 탐심을 많이 가졌다. 하나님이 뭔가 부족한 것 같고, 이상하고 충족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목사인 제가 이런 판국인데 인간 모두, 신자모두에게 예수님 외에 과연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예수 십자가 밖에서 소망을 찾는 것이 바로 탐심이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다시 무릎 꿇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바로 이 탐심을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드는 생각 그것을 부인하라는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십계명 전체가 열 번째 계명을 통해 결론의 한마디로 계시해 주는 내용이다.

 

4/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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