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조회 수 25 추천 수 0 2018.07.10 12:04:59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새벽기도 설교 (6)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

 

시혼은 억울하지 않는가?

 

이스라엘은 가데스바네야에서 하나님께 거역한 죄로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하는 벌을 받았다.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 멸망하는”(신2:16) 벌이었다. 아무리 가나안 족속들이 강대해 보여도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이 크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죄였다. 스스로를 메뚜기처럼 작게 여기며(Grasshopper Syndrome 민13:33) 가나안 입경을 거부했던 세대는 광야에서 멸망했다.

 

군대 가는 나이가 20세인데 40년이 지났으니까 60세 이상의 세대는 다 죽었다. 그들에게서 태어난 둘째, 셋째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모세가 다시 가르친 것이 신명기이다. 가나안의 중심에 위치한 여리고 성을 향해 진군하기 직전 요단동편 모압 평야에 모였을 때다.

 

율법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전에 모세는 그곳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먼저 기념했다.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장 나라를 세워야 하는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헌신시키려는 뜻이다. 광야방황 사십 년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대표로 헤스본 왕 시혼을 정복한 사건을 회상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만나는 민족들과는 전쟁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화평을 선언하고 통과하게 해달라는 허락만 청하라고 했다. 통과하게 해도 필요한 음식이나 물은 돈을 주고 사먹으라고 명했다. 만약 통과를 거절하면 우회를 해야 하나 대적이 싸움을 걸어오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본문 30절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바가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호와께서 헤스본 왕 시혼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승리로 이끌었어도 전쟁은 피차 큰 피해를 입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냥 통과하도록 허락하게끔 했다면 서로에게 유익이지 않는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며 열 재앙을 일으킬 때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바로를 패배시키고 결국에는 출애굽 시켰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시혼을 완강하게 만들어 놓고 승리는 이스라엘이 차지했다. 그럼 바로나 시혼에겐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인가? 이왕에 그럴 양이면 꼭 그들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불신자들은 가룟 유다를 예수님이 배반할 줄 알고서도 제자로 택한 것이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닌가라고 반발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질문 비방들에 대해서 많은 신자들이 제대로 변증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스스로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가 없이 애꿎은 고난이 생긴다. 간절히 뜨겁게 기도하고 교회생활에 충성하다 보면 언제 그런 고난이 있었는지 사라지고 좋은 일마저 생긴다. 마치 하나님은 병을 주었다가 다시 그것을 고치는 약을 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하나님 중심의 이스라엘

 

성경에 이런 식의 표현이 종종 나타나는 것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섭리 통치한다고 믿었다. 애굽의 바로나 헤스본의 시혼이 자기 생각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적하려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거나 허락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범사를 통치한다고 철저히 믿는다면 이런 표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구약성경을 작성하여 그것을 계속 읽고 있는 독자는 바로 유대인들이다. 그들에겐 이런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겐 오히려 이상했다.

 

그럼 성경의 그런 표현이 이상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오늘날의 신자들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들보다 믿음이 더 떨어진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신학적으로 따져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와 똑같은 표현을 일상적으로 아주 자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쪽의 과실은 하나도 없이 억울하게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차를 완전히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큰 충돌이다. 그런데 몸은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을 정도로 멀쩡했다. 대신에 보험회사에서 정신적 피해까지 감안하여 새 차를 살만큼 보상금이 두둑이 나왔다. 안 그래도 차를 바꿨으면 했는데 너무나 잘 되었고 정신적 피해보상금으로는 집안의 급한 다른 일까지 처리했다. 완전히 전화위복이 되었다.

 

처음 사고 난 직후에는 몸도 쑤시고 차가 없어서 여러모로 불편했다. 왜 이런 고난을 유독 나에게 일어나도록 하는지, 차까지 말썽을 부리니 정말 죽을 지경이라고 하나님께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상을 다 받고난 후에는 하나님이 내 사정을 미리 다 아시고 내게 유익하도록 그런 고통을 주셨다고 겸손히 수긍할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완벽한 선으로 이끄셨다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할 것이다.

 

신자는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는다. 전적으로 상대 과실로 그런 교통사고가 난 것은 하나님이 시혼 왕을 완강케 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만든 것과 같다. 보험 배상금으로 더 좋아진 것은 이스라엘로 헤스본을 완벽하게 승리하게 하신 것과 같다. 신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는 형식과 의미에서 본문과 하나 다르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가?

 

기룟 유다를 배반할 줄을 아시고도 주님이 택하신 것은 맞다. 그러나 당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일방적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다. 내 쪽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자동차 사고가 난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맞다. 그러나 음주 운전 같은 상대의 과실과 잘못이 사고의 원인이자 책임의 전부다. 유다도 마찬가지로 은 삼십 냥에 흔들렸다. 마찬가지로 헤스본 왕 시혼도 애굽의 바로도 이스라엘을 통해 현실적 이익을 탐낸 것이 자기들 패배의 원인이자 책임의 전부이다.

 

결국은 원죄가 문제다.

 

인간은 각자가 자기 죄 값으로 영원한 심판과 이 땅에서의 형벌을 받는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탄의 활동도 허락한 채 선악과 금령을 계시했다. 순전히 인간의 자발적 선택과 순종에 맡긴 것이다. 아담은 얼마든지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탄을 따랐기에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자 죄다.

 

그 이후의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어긋나려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이 언제나 추하고 흉악한 행위를 하고 싶어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죄의 본질이 아니다. 그 전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는 것이다. 바꿔 말해 인간인 자기로 그분을 대체했거나 더 우위에 둔 것이다.

 

그 결과 자기를 치장하고 풍요와 사치를 향락하는 것만이 모든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자기를 최고로 둔다는 것은 다른 이가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것을 극력 싫어한다는 뜻이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 본성을 지니니까 필연적으로 시기 질투 미움 분노 분쟁 전쟁이 따른다.

 

시혼 왕도 거지 떼나 다름없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땅을 밟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성가시고 불편한 일이 많을 것이고 지나간 뒤치다꺼리도 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애굽의 보화도 탐이 났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스라엘을 향한 적의를 먼저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아무 잘못 없는 당신의 백성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다. 헤스본은 스스로 자기 죄로 망했고 그 책임을 어느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역사는 거의 다 본문처럼 현실적 불행의 모습을 띈다. 처음에는 고통으로만 여겨지지만 지나고 보면 다 선하고 반드시 신자의 유익이 된다. 그럼 처음부터 그냥 선하게 인도하면 안 되는가? 물론 그럴 때도 가끔은 있다.

 

그러나 신자도 원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좋은 일은 마치 자기 실력과 공로로 된 것 같고 힘든 고난만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다. 힘든 일이 겹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반드시 선하다는 진리는 까맣게 잊고 하나님 왜 이렇게 힘들게만 하시는지 원망부터 앞서지 않는가? 그마저도 당신을 찾고 더 깊이 교제하자는 그분의 은혜인 줄 모르거나 잊고서 말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이 신자의 성장을 위해 일부러 고난으로 이끄는 일은 사실상 아주 드물다. 신자가 겪는 고난의 거의 대부분도 신자 자신의 판단력 부족, 탐욕, 감정적 대응, 죄악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놓고는 그 부정적 결과만 하나님이 책임지고 바로 잡아달라고 떼를 쓴다.

 

본문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까지 완악하게 만드신 셈이다. 또 완악해진 그대로 두신 것이다. 그럼 그 자체도 그분의 오묘하고도 완벽한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짐승이나 기계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당신께서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시지 않는가?

 

신자라고 다 이런 은혜를 누리지는 못한다. 신자도 연약한지라 현실 불행의 모습에서 그분 사랑을 좀체 찾기 힘들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영적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만 자기 내면을 채워야 한다. 자신의 중심에 오직 하나님만 모시고 범사를 오직 그분 중심으로 판단하면 범사에 그분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다.

 

5/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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