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강해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출34:1-9)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배역사건에 하나님은 격노하셨지만 모세의 세 번에 걸친 간절한 중보기도로 화를 누그러트렸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마지막 요청에는 당신께서 동행할 뿐 아니라 앞장서서 가시겠다는 약속의 증표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은 모세가 깨트린 십계명 돌 판을 다시 만들어서 산 위로 올라오라고 명합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 절차를 마무리 하시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를 천대까지 베푼다고 선언한 것입니다.(7절a)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것입니다.(7절b) 하나님의 축복은 오래 많이 주시는 반면에 징계는 짧게 적게 준다는 뜻인 줄 짐작은 됩니다. 그러나 왜 아비의 죄로 후손이 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푼다는 말씀과도 모순 상충되는 것 같아 곤혹스럽습니다.

 

연좌제(連坐制)를 시행하는 하나님

 

그러다보니 이 구절에 대해서 두 가지 잘못된 극단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오래 전 냉전 시대에 한국에선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로 판결 받아 실형을 살게 되면 자식들의 사회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연좌제를 시행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제도였습니다. 그 연좌제에 비추어 기독교의 하나님은 몰상식하고 독선적인 신이라고 기독교 외부에서 비난하는 것이 첫째 잘못된 반응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보면 그런 비난이 도리어 몰상식한 것입니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치면 천대는 25,000년이 됩니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여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 시대가 겨우 수천 년밖에 안 되니까 그 몇 배가 되는 긴 기간입니다. 그러나 어떤 민족, 나라, 가문이라도 그렇게 오래 동안 계속해서 복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한 의미를 강조하려고 과장하는 수사법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벌을 준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 구절만 따로 떼어서 그것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선 안 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를 몰라도 상식만으로 판단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기독교 외부에선 성경을 모르니 그럴 수 있지만 일부 신자들마저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의심과 불만을 품는다면 참 곤란합니다.

 

쇼핑을 마치고 영수증을 받아 나오다 계산이 많이 적혀 있으면 바로 돌아가 따져서 환급받습니다. 그러나 가끔 가격이 적게 나오면 왠 횡재인가 싶어서 모른 척 그냥 갑니다. 여러분은 안 그러시겠지만 목사인 저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삼사 대에 걸쳐서 벌을 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뭔가 잘못이라고 여겨지면 왜 하나님이 천대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대로 넘어갑니까? “하나님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나는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해야 상식적으로 합당한 것 아닙니까?

 

인간의 본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고상하기는커녕 상식조차 못 지킬 정도로 초라하고 치사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겠습니다. 적게 계산된 것 알고도 그냥 갈 때에는 그나마 목사 양심에 뒷목이 뻣뻣해집니다. 집사람도 돌아가서 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재촉합니다.

 

그럼 지금 돌려주면 직원이 잘못한 것을 매니저가 알게 되어서 근무성적에 나쁘게 작용될 수 있으니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목사가 이런 판국이니 하나님의 천대에 이르는 자비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제가 감히 이 자리에 서서 이런 설교는 꿈에도 하지 못합니다. 벌을 삼사 대만 주고 그치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이자 은혜인지 모릅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둘째로 잘못된 해석은 마찬가지로 문자적 해석에만 치우친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비의 죄에 대한 벌을 대대로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계에 흐르는 하나님의 형벌이든 사탄의 저주이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축복과 징벌의 대물림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겔18:2)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빨이 시린 법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나면서 소경이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요9:1-3)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집니다. 인간의 공로나 조건은 눈곱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수십 명을 살해한 희대의 악마라고 해도 아들이 심판을 받는 법은 없습니다. 출애굽기 강해를 통해 이미 배운 대로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베풀 자를 당신께서 택하여서 당신께서 주십니다.(출33:19)

 

하나님이 택하시어 구원을 준 자를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며 당신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요10:27,28) 바울 사도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즉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이루신다고 했습니다.(빌1:6)

 

예수 믿는 신자에겐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내주하여 함께 해주십니다. 신자를 사탄의 저주에 그것도 대대로 묶이도록 버려둘 리는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예수 십자가 대속 구원의 권능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는 탓입니다.

 

벌도 자비 안에 속한다.

 

본문 7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연좌제를 시행한다든지 사탄이 신자를 대대로 농락하도록 방치하신다는 의미는 일절 없습니다. 문제의 7절을 다시 자세히 봅시다. 하나님이 인자와 진실이 많다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천대를 넘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당신의 속성과 성품입니다. 인자를 천대를 베푸는 것도 그래서 변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특별히 “노하기를 더디하신다”고 했기에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설명한 셈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그 영원한 성품과 절대적 진리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지 설명합니다. 악과 과실과 죄는 용서하지만 아버지의 악행은 삼사 대까지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인자와 진실을 실천하는 두 가지 방안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를 천대까지 베푸는 것과 아비의 벌을 삼사 대까지 주는 것 둘을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는 것과 아비의 벌을 삼사 대까지 주는 것 둘이 병행으로 비교되는 것입니다. 천대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 안에 아비의 악행을 삼사 대 후손에게 벌주는 것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용서를 하려면 벌을 주어야 하고, 벌까지 받아야 용서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 둘을 합하여서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도 가해자로선 손해를 입힌 것을 보상해주어야만 합니다. 아이들 잘못하면 회초리 몇 대 때린 후에 용서해줍니다.

 

또 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고발은 물론 병원 치료비도 청구하지 않고 완전히 용서해주어도 일정 기준 이상의 상해를 입혔을 때는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형사적 책임을 물립니다. 사회법에서도 이러하거늘 하나님의 법에서는 마땅히 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본문 안에도 벌을 주어서 용서를 완성시키는 실제 례가 있습니다. 십계명의 돌 판을 처음에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제작해서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음란하게 섬기고 있어서 모세가 격분해서 던져 깨트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에 동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그분의 것을 허락도 받지 않고 깨트렸습니다. 이 경우 비록 죄와 악은 아닐지라도 과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돌 판을 네가 만들어 오라고 명했습니다. 용서는 해주지만 벌을 준 것입니다.

 

모세더러 하나님 당신과 당신의 말씀에 대해서 모든 것을 걸만큼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하라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또 모세의 그 급한 성격을 앞으로는 잘 절제하라고 충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반석에 말로 명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감정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의 성화에 짜증을 내며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치는 바람에 필생의 소원이었던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습니다. 이 일도 모세를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시되 벌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 밖으로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자비를 천대까지 베풀고 아비의 죄에 대한 벌을 삼사 대까지 주신다는 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문학적 수사법입니다. 그럼 그 상징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마음의 크기는 우주전체보다 크고 그 길이는 천대 즉, 영원만큼 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벌을 주어서 공의를 실현하는 회수는 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따라 처지하지 않으신다고 찬양했습니다. 일일이 벌을 주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자는 땅보다 하늘보다 높고 크다고 했습니다.(시103:10,11)

 

그렇다고 하나님이 공의를 실현함에 나태하거나 별로 신경을 안 쓰신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인간이 너무 연약하고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목사임에도 비겁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기에 용서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더 시급하고 또 그래야만 참된 공의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벌만 주어선 사람들이 무서워서 선한 척만 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벌을 주는 것처럼...

 

그럼에도 하나님이 구태여 아버지의 악행을 자식 삼사 대까지 벌을 주신다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증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일차적 의미는 처음 죄를 지은 부모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그 부정적인 영향이 삼사 대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결과적 외형적으로는 가계에 저주가 흐르는 모습도 가끔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벌주는 것이 천대 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 안에 포함되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이라는 맥락에서 뜻을 살펴야만 합니다. 악, 과실, 죄는 천대까지 용서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어떤 잘못이라도 끝까지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그런 것들로 결코 방해되지 않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 수정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 구체화되고 확장되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이스라엘은 그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바탕에서 아버지의 악을 자식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고 “아버지와 아들의 유비”로 표현했습니다. 언약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부모가 자녀에게 벌주는 방식 그대로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렸을 때에 부모로부터 벌을 받고 자랐습니다. 처음에는 그 벌 안에 부모의 사랑이 담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벌을 주니 무섭기만 합니다. 때로는 형이라서 아니면 막내라서 더 많은 벌을 받기도 합니다. 또 미처 사정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매만 때리니까 아주 억울할 때도 있었습니다.

 

가끔은 아주 자상하고 자식이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친구의 부모가 아주 부러웠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 부모는 돈도 못 벌고 가난하면서 벌만 주니 미워지기까지 합니다. 부모를 바꿀 수만 있다면 재벌가의 금 수저로 다시 태어났으면 싶은 헛된 꿈도 꿔봅니다. 사달라는 스마트 폰은 안 사주고 매일 공부만 하라고 닦달을 하니 싫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여호와는 십계명을 주면서 거룩하게 살라고만 합니다. 풍요와 쾌락을 보장해주며 우리가 원하는 것들 양껏 주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애굽의 황소 신이 훨씬 더 좋아집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의 심보와 같습니다.

 

사랑의 매를 이해하려면

 

그러다 점차 이성이 깨이고 분별력이 늘면 아버지의 매가 단순히 징벌만은 아니고 다 나 잘되라는 사랑의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조금씩 깨닫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자기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보고 그 아이가 격동의 사춘기가 되어서 자신도 사랑의 매를 들어보고는 부모의 심정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게 다 부모 잘 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네 잘 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부모의 꾸중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식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는 놀랍니다.

 

하나님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에게 벌을 준다는 것은 한 인격 대 인격의 관계에서 대한다는 뜻입니다. “네가 잘 되라고.”라는 꾸중은 자식이라는 사람 전체가 대상입니다. 단순히 잘못한 행동 몇 가지 고치려고 야단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득 어렸을 때에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도 밀려옵니다. 정작 진짜 괴로운 것은 “아빠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 있는데 야단만 치느냐”라고 대든 것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죄인지라 천추의 불효자라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부모가 사춘기 아들에게 매를 때리지만 “네가 지금 이 매로 아픈 것은 금방 없어지고 잊을 것이나 네가 고통스러운 것을 알고도 때려야 하는 내 가슴은 몇 배나 더 고통스럽다.”는 심정입니다. 나아가 네가 커서 나이가 60살 80살이 되더라도 나의 너희를 향한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고 똑같을 것임을 그 부모는 압니다. 자식의 상태로 있으면 부자 관계를 이어가는 그 사랑의 풍성함, 본문으로 말하면 인자와 진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워봐야 알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해 불효자가 된 것을 두고 천추의 한이라고 말합니다. 천추(千秋)가 무슨 말입니까? 가을이 천 번 바뀌는 천년입니다.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천년이 가도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그 사랑을 거역한 죄는 천 번을 죽어도 갚을 길이 없다는 뜻이 바로 천추의 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어지는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가 당신을 경외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신다고 했습니다.하나님은 우주와 같은 크기의 사랑으로 우리 부모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모세가 9절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간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긴 하지만 그들을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기업’의 뜻은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전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는 내가 주께 은총 입었다면 감히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운을 뗍니다. 일차적으로 자기 전부를 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위에 자기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즉, 그분의 자녀가 되는 관계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모세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분과 일대일 인격적인 대면을 통해 중생의 체험을 했지만 이 백성들은 아직 그런 은총을 입지 못했으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악행이 죄와 쾌락을 선천적으로 무조건 좋아해서도,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이 과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대면 체험은 없는 대신에 애굽의 우상을 섬기는 일에 여전히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천대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불쌍히 여기어 당신의 기업 즉, 자녀로 삼아달라고 탄원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오늘 본문에 비추어보면 결국 믿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식으로 대하신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부모처럼 대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로 나의 아버지라는 확신입니다. 또 그런 확신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까?

 

그럼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내 목숨을 걸만큼 나의 현재 믿음을 재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부모를 대하는 것과 단 하나도 다르지 않게 또 부족하지 않게 하나님을 대하고 있습니까?

 

부모에게는 어느 누구도 내 부모님이 맞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럼 천하의 패륜아이자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것입니다. 또 부모님 나를 사랑하느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지 그 사랑이 변함이 없는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럼 상식도 이성도 없는 조금 모자란 자식입니다.

 

아주 드물지만 아예 질이 나쁜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학대만 받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벌만 주는 무서운 분으로만 이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모든 부모의 자식 사랑은 천대까지 이릅니다. 그래서 모든 자식들은 천추의 불효자라고, 천년이 가도록 천 번을 죽어도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하나님에게도 천추의 불충한 신자로 천 번을 죽어도 영원히 주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고백 아니 절감이라도 합니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계산이 잘못되어 받을 자격과 공로가 전혀 없으니 이 은혜 refund 해드리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십자가 구원의 은혜는 정말 천추에도 갚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부모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잘못하거나 감정에 치우쳐 인간적인 허물을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모에게 적용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아무리 잘못해도 마지막까지 나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도 아내도 남편도 나의 자식도 그렇게 해주지 못해도 부모님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최소한 그런 존재로 남아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실감이라도 합니까?

 

나아가 부모의 징계를 사랑의 매로 인식하고 그 뜻에 감동하는 자식은 절대 나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각성 결단하고 노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받을 때에 그런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나를 거룩하게 바꾸려고 이런 귀한 은혜를 주셨다고 감격할 수 있습니까?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소망을 키워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으로만 자기 인생이 이끌어지도록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 목표가 무사무탈(無事無頉)이 되었습니다. 제발 나에게 나쁜 일, 재앙, 고난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빕니다. 불신자들이 아침마다 천지신명에게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비는 생각과 똑같습니다.

 

흔히들 인터넷 댓글의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도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보다 비교할 수조차 없는 큰 사랑으로 말입니다. 다윗처럼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고 천대까지 베푸시는 자비가 하늘보다 높다는 고백이 저절로 항상 나와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부모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말씀의 참 뜻입니다.

 

7/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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