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 이름 하는 하나님

조회 수 179 추천 수 0 2018.07.14 14:38:34

질투라 이름 하는 하나님 (출34:10-14)

출애굽기 강해 (6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34:10-14)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은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배역사건에 대한 징벌을 마무리하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라고 먼저 선포 합니다.(10절) 새로운 언약은 물론 아닙니다. 그 내용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이므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조금 더 구체화한 것입니다.

 

그 언약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있습니까?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상 최대의 권능을 실현해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열 재앙, 홍해의 기적,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등 이미 엄청난 기적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대로 가나안 정복 전쟁 때에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아모리 족속과 전투할 때에 해가 중천에 머무는 이적들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체감하는 감격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감각 기능은 외부 자극에 금방 익숙하게 되어 있어 아무리 좋은 것도 많으면 나중에는 시들해집니다. 세상 최고의 사치를 누려도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10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은 물론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보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 땅의 아무 거민에게도 행하지 않아서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이적을 이제부터는 누구나 보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적은 이스라엘 외에는 애굽만 목격했습니다. 출애굽의 실제 당사자인데다 하나님께 완악하게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약하다가 마지막 열 번째는 모든 장자들이 죽는 최강의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애굽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순순히 풀어주었다면 열 재앙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애굽에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백성들로 시내 산으로 이끌어내어 당신께 경배토록하고 율법을 수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의무는?

 

언약이란 쌍방 간에 준행할 의무사항이 있으며 어기면 죽음으로 갚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 쪽에선 적극적 주도적으로 이적을 베풀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쪽에서 목숨을 걸고 반드시 준행하겠다고 맹세해야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합니다.(12절)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면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진멸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진멸되면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들과 언약을 맺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서약을 하라고 요구하십니까?

 

누차 강조한 대로 하나님의 뜻은 가나안 족속의 씨를 말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11절에서도 앞서 가서 가나안 족속들을 죽이겠다고 하지 않고 쫓아낸다고만 말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진멸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가나안에서 진멸할 대상은 그 족속이 아니고 그 땅의 죄악입니다. 특별히 우상숭배와 그로 인한 폐해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단을 헐고, 신들에게 바친 기념비인 주상을 깨트리고, 아세라 신상을 찍으라고 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도 애굽과 같이 진멸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대상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도 큰 이적을 보여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할 것을 다 아시고 그 이후까지 감안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서로 이웃으로 동거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동거하기 위해선 이왕이면 화친 조약을 맺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언약을 맺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크게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말아야 할 세 이유.

 

첫째 고대에는 민족이나 나라끼리 조약을 맺으면 반드시 상대의 고유 신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표시로 조약을 체결할 때에 상대의 신들의 제사에 동참합니다.

 

그래서 14절에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습니다. 또 15절에서 그들의 희생을 나눠먹자고 청할 때에 응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단독으로 우상에 제사 지내는 경우가 아닙니다. 이방과 언약을 맺는 것 자체가 금송아지 배역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므로 철저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둘째로 고대의 전쟁은 각 나라 고유의 신들끼리의 힘겨루기로 간주되었습니다. 더 강력한 신을 보유한 나라가 승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기 전에 자기들 신에게 참전 여부를 묻고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꼭 거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화친 조약을 맺는 것은 서로의 신들이 대등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합의한 셈이고 그래서 각각의 제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역사상 최고의 권능을 보여주겠다는 뜻은 너희 신들과 당신이 아예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들에게 기적을 보여서 그들로 과연 여호와와 너희 신들이 대등한 존재가 될지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차원이 다르다고 여겨지면 너희 신들을 버리고 당신께 무릎을 꿇으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쉽게 항복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애굽과 완악하기는 마찬가지라 먼저 이스라엘에게 화친조약을 맺자고 요청할 리 없다는 것을 당신께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애굽처럼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해 사탄에 미혹되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몇 번의 기적을 보았다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때려서 말을 들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력 재력 같은 외부의 물리적 힘이 아닙니다. 그런 힘으로는 참 순종이 아니라 그저 눈치 보며 아부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성령으로 역사해야만 인간의 타락한 영혼 안에 서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큰 권능을 보이겠다는 것은 따라서 정작 이스라엘더러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적을 이스라엘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고 먼저 강조한 것입니다.(10절) 이스라엘더러 가나안 족속들의 농사에 소출이 많아 그 신들이 풍요를 보장해준 것처럼 보이더라도 절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계 최강인 애굽의 그 많은 신들도 팔십 노인인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무참하게 패배시킨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에서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맨 처음 보인 것도 홍해에서의 그 큰 권능을 상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더러 가나안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강조한 두 번째 이유는 당신과 가나안의 신들을 아예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과 조약을 맺는 것은 상대의 신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사람과 장조와 시대의 일부분만을 다스리는 지역 신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뜻도 됩니다. 지금 애굽에서보다 더 큰 권능을 보이겠다는 것은 애굽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도 당신의 큰 권능이 역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만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유일한 신임을 똑똑히 알라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인간이 만든 종교만 다를 뿐이지 지역 신이나 민족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에 태양이 중천에 멈추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엄청나게 큰 권능일지라도 지구의 일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태양은 지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지구 밖 하늘에 떠있고 모든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온 민족은 물론 하늘과 땅, 온 우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삼층천까지도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족속들과 언약을 맺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철두철미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넷째 이유

 

넷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문 14절 말씀대로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싫다는 단순한 뜻은 아닙니다.

 

유명 액션배우 아놀드 슈왈츠네거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고(2003-11년) 아내는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조카 마리아 슈라이버였습니다. 그런데 아놀드는 부인 몰래 오래 동안 남미 출신 가정부와 혼외정사를 가졌고 그 사이에 아들까지 두는 바람에 결국은 아내와 헤어졌습니다.

 

순전히 제 추측이지만 만약 그가 할리우드의 젊고 예쁜 여배우랑 바람이 났더라면 아내의 질투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 가정부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순전히 객관적으로만 따져서 외모 학력 교양 모든 면에서 마리아와 비교가 안 됩니다. 마리아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틀림없이 그저 어이가 없고 기도 안 찼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지고 밉기는커녕 그냥 싫어졌을 것입니다.

 

나아가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남자를 한 때 열렬히 좋아했고 그 동안 살을 맞대고 부부로 살았던 자기 자신에게 짜증나고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질투가 아닙니다. 질투란 반드시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자기보다 우월해야, 최소한 동등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보다 열등한 상대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잘 아시는 엘리야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 명과 대결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나중에는 하루 종일 큰소리로 부르고 칼과 창으로 몸을 찔러 피를 흘려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 전에 엘리야가 너희 신이 묵상중인지, 잠간 외출했는지, 여행 갔는지, 잠을 자는지 모르니 한번 깨워보라고 조소 아닌 조소를 했기 때문입니다.(27절)

 

그것은 조소를 넘어서 제발 진리에 눈을 뜨라는 촉구였습니다. 사백 오십 명이나 되는 자기 제사장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도 묵상하거나 외출하거나 여행 갔거나 잠을 잔다면 신으로 섬겨야 할 자격조차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 사백오십 명의 자기 충복 제사장들이 큰 소리로 통성기도 하고 심지어 칼과 창으로 몸을 찔러 피를 흘리면 뭔가 대답 한 마디쯤은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계속 침묵한다면 아예 실존하지 않지 않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너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로 신앙 양심에 비춰 따져 보라. 너희들이 그 신들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만든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이상 속이지 말고 너희 스스로도 제발 속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참 하나님은 거역하고 자기들 형통을 위해 눈에 보이는 권세 앞에 굴복하여 영원한 멸망을 길로 걸어갔습니다.

 

질투의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우상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서 이미 배우신 대로 인간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인간이 만든 허상으로 빈껍데기입니다. 거룩하게 살라는 하나님은 싫고 풍요와 쾌락을 보장해주고 자기들 마음대로 방탕하고 싶다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숨기려는 핑계일 뿐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인간이 신이 된 것이 우상입니다. 이방의 신들이 하나님과 그 권능에서 도무지 비교가 안 됩니다. 애굽과 가나안의 제사장들은 작대기를 뱀으로 바꾸는 눈속임 사기만 겨우 행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기적은 절대로 단 한 번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아예 그 신들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할 대상도 결국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이나 가나안 족속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길 뿐입니다. 어리석어서 참 진리를 모르고 사탄에 미혹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유치원생이 미적분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야단치는 부모는 없습니다. 야단치는 부모가 더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을 향해 질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대상인데 그 질투가 가장 먼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금송아지를 음란하게 섬길 때에 이방 족속이 아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먼저 진멸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또 가나안으로 진군하면서 이스라엘이 계속 목이 뻣뻣해서 행군 중에라도 진멸할까 동행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미워하는 대상이 빈껍데기 허상에 불과하한 우상 신상도, 그것을 섬기는 이방족속도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 슈라이버의 경우 앞서 말씀드린 것과 정반대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남편 아놀드에게 정이 떨어져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이 남았다면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질투는 더욱 강렬해집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그 뜨거웠던 질투가 결국에는 미움으로 변합니다. 상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집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고 반드시 복수해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는 선언이 그만큼 미워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만큼 사랑한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가나안 행군 중에 진멸할까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혹시라도 나의 그 뜨거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너희를 죽일 수도 있으니 같이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당신의 분노보다 크게 앞선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대로 자비를 천대까지 베풀고 그 죄악은 삼사 대 만에 멈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질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실감하십니까? 실제 삶에서 체험하고 있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잘 모르겠다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해보겠습니다.

 

질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 하나를 꼽으라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독점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독점욕은 모든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대부분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차원에선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연애할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지금 현재의 남편이나 아내와는 이미 식어서 어쩔 수 없이 정 때문에 살고 있을지 모르니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때로 돌아가 생각해보십시오. 연인이 질투해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너는 내 것이야. 한 눈 팔면 죽는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을 꺼야. 바람피우다 들키면 네 죽고 나 죽는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요즘 젊은이들은 그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의 증표로 연인의 이름을 자기 몸에 문신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그와 똑 같이 사랑하시고 또 그렇게 사랑하니까 질투한다고 선언합니다. “너는 영원히 내 것이다. 한눈을 팔면 진멸할 것이다. 그 언약의 증표로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 네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 영원토록 올라가 있다. 너희도 나를 영원토록 사랑해라. 다시는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지 말라.” 그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의 증표로 이스라엘도 몸에 문신을 했는데 바로 할례입니다. 신약성도는 침례식이 목숨을 걸고 다른 족속과 언약을 맺지 않겠다는 맹세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 아무도 없으며 영원히 멸망치 않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10:28) 당신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네 가지 이유를 하나로 줄이면 바로 십계명의 첫 계명이 됩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자 어느 민족도 보지 못하는 기적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과 언약을 맺었는데 구태여 다른 것들과 언약을 맺을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질투가 하나님의 이름?

 

질투하는 하나님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질투라 이름 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질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본명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대로 출애굽기 3:14에서 모세에게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야훼라는 이름은 영어로 치면 주어와 Be 동사로만 이뤄진 “I Am- 내다”이라는 뜻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은 아닙니다. 하나님에겐 이름은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때를 제외하고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이름이라고 밝힌 것은 본문이 유일한 케이스입니다. 그 이름을 ‘질투’라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파 등은 이스라엘이 특정 사건에서 여호와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깨달은 속성 하나에 빗대어 이스라엘이 지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질투라고 유일하게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수많은 속성 중에서 꼭 기억하게 하고 싶은 첫째가는 아니 유일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알아서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구태여 알 것 없고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해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미리 준비하시는 분, 여호와 닛시(깃발)는 승리를 주시는 분, 여호와 라파는 치료해주신 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보장이고, 항상 성공하는 것이며, 무병장수하는 것입니다. 결코 나쁜 소망이 아닙니다. 아주 좋은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에 비해 그분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도 엄청난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선 딱 하나 질투할 만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아주면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알아먹기 좋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당신에 대해 설명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거역하거나 잠시 잊고 등을 돌리면 죽도록 미워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당신을 기억하고 그 얼굴만 당신 쪽으로 돌려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내려 달라는 고백만 하면 죽도록 사랑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하신 유일한 존재이기에 너희와 모든 족속 앞에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권능과 사랑을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럼 우리 모두 스스로 점검해봐야 할 사항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받고 있는 중입니까? 실제로 그런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너는 내 것이니 절대로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은혜에 붙들려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이미 믿었지 않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들 아낄 리도 또 그대로 내버려 두실 리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날이 갈수록 실감하는 사실 하나는 세상의 것들, 인간이 만든 것들과 사람들 자체가 아무리 풍성하고 화려해도 참 생명과 참 위로가 없음을 계속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소망되심을 점점 확신합니다. 목사로서 종교적 교리로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실제 삶에서 세상의 것, 인간의 것, 내 것으로는 넘어지고 또 쓰러졌지만 그분의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힘으로 건건이 버티는 은혜를 지금껏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다면 죄송하지만 아직도 세상 것에 미련을 많이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다른 족속과 언약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신자에게만 일방적 수고와 피해를 강요하는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둘 필요가 전혀 없으니 세상 사탄 사람 죄악 죽음 등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실 만큼 사랑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 대신에 기껏 택한 것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7/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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