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낭비를 하고 있는가?

조회 수 73 추천 수 0 2018.08.01 13:47:53

(출35:4-9, 36:5-7) 거룩한 낭비를 하고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65)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출35:4-9)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36:5-7)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낭비

 

모세가 시내 산에 40일 간 두 번 머무르면서 하나님께 받은 계시는 크게 나눠 셋입니다. 십계명과 기본적인 율법과 성막관련규정입니다. 십계명을 제외한 율법과 성막규정은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는데 모세 시대와 지금과는 약 3500년의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문화, 관습, 제도는 물론 사고방식 등에 큰 변화와 차이가 생겨서 그대로 실행하기에 부적합 합니다. 율법과 성막에 담긴 하나님의 뜻만 이어받아서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면 됩니다. 특별히 십계명의 근본 의미만이라도 온전히 이해하여 실현하면 충분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와 고난은 십계명 그것도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 계명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본문을 따로 살펴보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관련해서 따져볼 내용이 몇 가지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과 부대 소품과 장치 제작에 소용되는 물품을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갖고 와서 쓰고도 남았습니다. 모세가 그만 갖고 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마음이 되어서 순종하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고 보기에 좋습니다. 금은 보물과 짐승 가죽과 향품 등은 상당히 고가품인데도 전혀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에 지나치게 헌금 혹은 헌물 하는 것을 두고 흔히 “거룩한 낭비”라고 말합니다. 본문 외에도 성경의 곳곳에 그런 예들이 있습니다. 대표로 둘만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에선 열왕기하 4장에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방을 하나 지어서 언제든 유숙하게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자기 집을 오픈해서 사역자에게 숙식을 무료로 무한정 제공하며 섬긴 것입니다.

 

또 신약 마가복음 14장에는 잘 아시는 대로 한 불쌍한 여인이 자기 결혼을 위해 준비한 나드 향유 한 병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의미로 병을 깨트려 머리에 부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삼백 데나리온보다 더 비싸게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 텐데 말 그대로 왜 낭비하느냐고 비난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가 볼 때는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데 종교적 열성이 지나치거나 이단의 꾐에 빠져서 낭비한다고 오해 받을만합니다. 저도 부끄러운 고백을 하겠습니다. 초신자 시절이 마침 경제적으로 아주 궁핍해졌던 때입니다. 먼저 믿은 집사람이 교회 일이나 교인들을 적극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축을 낸다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헌금 낼 때에 손 떨림이 없어지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풍족해져 돈 걱정이 없어진 때가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돈으로는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는 고난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믿음도 적고 성경에 대해 잘 모를 초기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시험해보려고 움켜진 손을 억지로 풀고 드렸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문제가 해결되고 도리어 채워지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현실에서의 직접적인 보상보다는 간접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더 큰 유익을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종합적으로 다방면으로 장기적으로 즉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는 결과를 많이 얻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성장 충만해짐을 절감하게 되었고 그런 후에야 겨우 하나님께 드림에 손 떨림이 조금 없어졌습니다.

 

목사로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동일한 한 사람의 성도로서 제가 체험한 것을 성경의 진리와 비추어서 단연코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낭비를 하는 신자에게는 본인은 물론 그 주변까지 반드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유익이 임하며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소유 중에 자원하여

 

그러나 단순히 많이 드린다고 그 보상이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낭비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고 오늘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 소유 중에서 드려야 합니다.(5절) 빚을 내어서라도 바치라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유의 일부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보호하고 채워주셔서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할 뿐 아니라 더 풍족해짐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소유 중에 바쳐야 함은 모든 소유를 하나님이 마련해주셨기에 하나님의 일에 당연히 돌려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가 쓸 일이 있어 필요하다고 하는데 안 드린다면 자식이 아닙니다.

 

둘째는 반드시 마음에 원하는 대로 바쳐야 합니다.(5절) 헌금 드릴 때에 손이 떨리는 것은 아깝고 미련이 남아서인데 그것을 두고 믿음이 약하거나 잘못했다고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이지 돈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은 돈에 의해 돌아가고 신자도 세상 안에 살아야 합니다. 신자도 어쨌든 돈에 메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으로써 자연스런 반응일 뿐입니다. 손이 떨림에도 불구하고 눈을 질금 감고 바쳤습니다. 표현하고 이해하기 쉽게 낭비라고 했지만 자기 형편에 과분할 정도로 바친다는 뜻입니다, 손이 떨림에도 바친 것이야말로 문자적 의미대로 낭비한 것입니다.

 

소유 중에 더 좋고 귀한 것은 자기를 위해서 남겨두었다거나, 여럿이 있어서 한두 개 없어져도 상관이 없는 것을 바칠 때는 손 떨림이 안 생깁니다. 낭비한 것이 아니라 잉여분을 처리하면서 생색을 낸 것뿐입니다.

 

잘 아시는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비록 일부를 숨겼다 해도 땅을 판 돈이라 상당한 금액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였고 교회를 속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격을 속였습니다. 자신을 죽인 셈입니다. 스스로 이 땅에 살 가치가 없다고 자인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즉사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동전 두 개를 드린 사렙다 과부는 분명히 손뿐 아니라 가슴까지 떨렸을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기쁘게 바쳤을 것이라고 너무 단편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우리 중에 돈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떨면서도 넘치게 바쳤기에 예수님께 칭찬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가 명하신 대로

 

소유 중에서 자원해서 내야할 것은 신자가 즉, 헌금을 드리는 자가 준수해야 할 사항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헌금을 받는 자 즉, 교회와 사역자가 행할 의무를 더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4절 처음부터 강조하기를 여호와가 명한 일에만 받으라고 합니다. 교회가 당장 행해야 할 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지 않는 일에만 드려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제 개인적 간증을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유학생 교회를 하면서 4년 만에 자체 교회 건물을 구입했습니다. 미국 교회 건물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렌트를 매년 대폭 올렸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주중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 공부할 처소는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미국교회에 꼭 지불해야 할 한 달 렌트와 은행에 갚아야 할 모기지가 일치되도록 대출금과 다운페이 액수를 책정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98년이었는데 8만 불이 있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 교회로선 아주 큰 금액인데 세 달 기한으로 작정 헌금을 했습니다.

 

유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한국에 계신 믿는 부모님들과 학위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 취직한 선배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감일이 되었는데도 만 불이 아직 모자랐는데 놀랍게도 한 교인의 누님이 저희와 일면식이 없는데도 그 거금을 송금해주었습니다. 정말로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채워졌습니다.

 

그 작정 헌금과 교회건물 구입 전후로 전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기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성숙되고 각 자와 각 가정에 은혜 받은 간증이 넘쳤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큰 영적인 업그레이드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들의 거룩한 낭비에 하나님이 거룩하고 신령한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었습니다.

 

성막제작 과정을 기록한 출애굽기 35-40장에서 제일 많이 반복해서 나오는 문구가 있습니다. “여호와가 명하신 대로”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만 행했습니다. 지시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같이 목사나 당회가 교회 이름을 높이고 의로움을 자랑하려고 당장에 필요 없는 큰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이왕이면 계획을 크게 잡아서 장차 부흥하리라는 믿음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습니다.

 

언뜻 보면 사치 고가품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막의 기구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상징하고 그에 걸맞은 성도들의 순전한 믿음과 헌신의 표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미 다 마련해 주신 것이었지 백성들이 열심히 일하여 모은 것을 무리하게 헌물 하라고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동식 장막인지라 쉽게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튼튼한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장하여 인위적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거나 신자에게 위압감을 조성하려는 의미는 전무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 찬양 경배하는데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최소한을 하나님이 지시하셨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만 가져오라.

 

교회가 행할 두 번째 의무는 모세처럼 모든 필요가 채워지면 더 이상 갖고 오지 말라고 명하는 것입니다.(출36:6) 물론 지금은 성막 제작, 요즘으로 치면 교회건물 건축이라는 한시적 프로젝트입니다. 작정 헌금이 채워지면 더 받아선 안 됩니다.

 

그럼에도 주목할 점은 더 많이 들어왔다고 해서 처음 식양을 수정해서 화려하게 증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명하신 바로 그곳에서 중지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섰습니다.

 

현대교회에 적용하자면 교회의 모든 사역이 예산과 결산에 따라 철저하게 공명정대하게 집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인 숫자가 증가하거나 헌신의 열성이 늘어서 예산보다 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일 헌금을 중지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분께 신자 각자가 받을 은혜를 교회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초과되는 수입은 반드시 교회 본연의 일에만 사용하거나 지역사회의 봉사 구제에 활용해야 합니다. 최소한 언제 누가 요구를 해도 무슨 돈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했다고 밝힐 수 있게 투명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여 평가 승인 받아야 합니다. 수입 잉여금으로 교회가 영리적 목적에 사용해선 안 됩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개인적 용도로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남용 오용해선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 일이 드러나도 교회의 일이고 목사도 연약한 인간이라고 은혜로 그냥 덮어버려 해선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형법상 횡령죄에 해당됩니다. 신자는 신자가 되기 전에 건전한 시민부터 되어야 하는데 하물며 목회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회개 사죄 보상하여 용서받는 절차를 몇 번이라도 간곡히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아무 진전이 없으면 교회가 나서서 고발해야 합니다.

 

지금은 경제 사정이 너무나 안 좋아 생존마저 염려해야 할 판국인데도 성도들이 피땀 흘려서 번 돈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교회와 목사가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적 명분을 대어도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됩니다. 교인들이 하나님께 낭비하면서 바친 돈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으로 당신의 뜻대로 낭비하실 텐데 중간에 인간이 가로챈 것입니다. 천벌을 받을 죄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장 쉽게 추악해지는 요소나 원인은 돈입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단지 용서만 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가 돈에 깨끗하지 못하면 곧바로 교인들이 시험에 들고 모두가 추악해지며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재정은 철두철미 합법적으로 공평하게 운영되어야 하고 다시 강조하지만 최소한 투명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 드린 네 가지 사항은 여러분들도 상식적으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정리한 것뿐입니다. 새삼스러운 내용이 아닙니다. 신자가 정작 하나님께 거룩하게 낭비해야 할 더 중요한 것들은 따로 있습니다.

 

헌금이 더 쉽다.

 

여러분에게 하나 질문해볼 테니 정말로 솔직하게 스스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물질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쉽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잘못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너무 어려운 계명입니까? 그럼 조금 수준을 낮추어서 형제를 말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기보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는 주일마다 헌금은 손을 떨어가며 형편에 넘치게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서 낭비해야 할 것이 물질 뿐이겠습니까? 본문은 소유 중에 자원해서 바치라고 했는데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물질만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면에선 헌금하는 일이 가장 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안 계시겠지만 평소에 계명대로 살지 못했기에 보상 차원에서 헌금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으로 치면 속죄 제사에 헌물 드리듯이 또 앞으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징벌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드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거룩한 낭비의 두 가지 예를 다시 살펴봅시다. 열왕기하 4장의 수넴 여인의 경우 엘리사에게 방 하나 내어주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보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한 집에서 기거하는 불편함은 그보다 훨씬 대단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로 항상 기도하고 말씀을 볼 텐데 그럼 밖에서 큰소리도 못 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도 없습니다. 또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릅니다.

 

방 하나 제공하는 어려움은 그녀가 겪는 일상생활의 불편함,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 깨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적습니다. 그녀는 시간, 수고, 노력을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낭비했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녀도 평소의 삶이 엘리사와 동일하게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기에 불편하지 않는 동거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향유는 돈을 모아서 다시 또 구입하면 됩니다. 당시의 사회 관습상 여인이 그것도 처녀가 남자들 그것도 랍비가 가르치는 현장에 함부로 동석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자들은 베드로 같은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단순히 종교적인 수사로만 여겼습니다. 메시아로서 로마와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데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당시에 이 여인만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말씀을 순전하게 믿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 의미를 되새겨본 것입니다.

 

그 현장에선 성경기록에 따른 여러 정황상 죄인으로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광신자 심지어 미친 여인으로 매도되었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양보해 잘 봐주어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녀자가 남자들 일에 나섰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향유를 낭비하는 것은 큰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수치심과 자존심 등을 낭비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이 여인은 틀림없이 한이 많은 생을 보냈으며 요즘으로 치면 극심한 우울증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감정적인 상처도 깊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특별히 그분이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해주면 마음속의 그 모든 갈등과 고뇌가 씻은 듯이 깨끗해졌을 것입니다. 지금껏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하지 못한 평강이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씀을 예사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은혜를 누린다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당시의 그녀로선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으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르게 자신을 완전히 충만하게 더욱 활력이 넘치는 인생으로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데는 전혀 의심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의 자기에 대한 위치 평판 소문 루머 요즘으로 치면 악플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거룩하게 낭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낭비한 까닭은?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도 단순히 하나님이 명령한 것이니까 종교적 열성으로 낭비한 것이 아닙니다. 금송아지 배역 사건을 철저히 회개했다는 반증입니다. 문자적 기록만으로 그 사건을 접하는 현대 신자들은 당시 상황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다섯 번이나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했다는 것은 당신 현장의 긴박감, 위기감, 두려움 등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반영합니다. 고대인들의 종교성은 신들의 노여움을 달래는 일에 집중합니다. 이스라엘도 비록 애굽에서 우상 신들을 통해서였지만 신들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오래 동안 봐왔기에 잘 압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언약을 회복 갱신한 후에 성막을 지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우리도 비록 이동식 장막이지만 우리만의 성전을 갖게 되었고, 우리들의 제사장을 모시고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고 기뻤겠습니까? 비유하자면 한국이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었는데 정부청사 하나 지을 돈이 없어 쩔쩔매었다면 국민 모두가 금반지 정도는 기꺼이 자원해서 다 내놓지 않겠습니까?

 

비록 어떤 형상을 갖춘 신상은 없지만 은혜를 베풀 속죄소를 금으로 제작하게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만들었습니다. 지금 속죄소를 비롯한 성막의 기구들을 아주 정교하게 금과 은으로 제작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출애굽 당일 날 밤에 은금패물을 애굽 사람들에게서 달라는 대로 공짜로 취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 비로소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바로 그 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인지 회개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놀라운 은혜 앞에 완전히 항복했기에 그 귀한 물건들을 성막제작을 위해 아낌없이 거룩하게 낭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의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많이 심으면 많이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되돌려주면 하나님은 그것을 신자에게 되돌려주면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신자를 위해 낭비하십니다.

 

단 그분께 드릴 때에 우리에게 없애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기적 목적으로 드려선 안 됩니다. 그분과 흥정 혹은 거래하겠다는 시도를 말아야 합니다. 징벌 예방 차원이나 천국보장보험들 들려는 목적도 배제해야 합니다. 특별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교회와 이웃 앞에 자기 의를 자랑하려는 의도로는 결코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기꺼이 낭비하시면 이번에는 하나님 쪽에서 신자를 위해서 거룩하게 낭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정작 낭비해야 할 것

 

하나님께 정작 낭비해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큐티나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놓거나,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자칫 그것도 종교적 명분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시간을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분께 받지 않는 시간, 그분이 통치하지 않는 순간이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그분의 일을 위해서 거룩하게 낭비해야만 합니다. 너무나 쉽고도 엄숙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신자가 그분을 위해서 바친 시간만큼만 그분도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단 하나라도 하나님께 받았다기보다 내 실력 노력 공로로 얻었고 그것을 힘에 과분하도록 바쳤는데도 하나님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없다고 의심과 불만이 생기면 바로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 세상과 사탄에 져서 그쪽에 붙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을 지고 그분의 은혜와 반대편에 서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낭비할 것은 나 자신만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 전부입니다. 내 주변도 다 그분께 받은 것입니다. 내 가정, 내 부부 사이, 내 자녀와 관계, 내 이웃, 내 직장 등에 오직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가 없어져야 합니다. 내 자존심, 감정, 체면, 욕심, 계획 등을 완전히 깨트려서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내 속에 것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그분께 거룩한 낭비가 됩니다.

 

혹시라도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선교사 같은 하나님 일에 충성하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지금 현재의 시간은 그분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양보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천천히 고치겠습니다. 저의 트라우마이자 제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고 여겨집니까?

 

그런 그분이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자꾸만 더 힘들게 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꾸만 깨트릴 것입니다. 내 것이 없어질수록 그분께 드릴 것이 생기고 그분의 은혜로 채울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신자의 가장 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7/29/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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